박제형(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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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제형.jpg
출생
1882년 7월 5일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동
사망
1948년 8월 30일
경상북도 영주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본관
반남 박씨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제형은 1882년 7월 5일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동에서 박운수(朴雲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순칠(舜七), 호는 철오(鐵塢)이다. 그는 일찍이 김휘철(金輝轍)[1842~190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웠다. 1909년 8월 영주에서 영주금융조합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11월 경북유림시찰단이 되어, 일본 도쿄[東京]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1925년에는 영주금융조합 조합장이 되었다.

1925년 봄, 김창숙이 베이징서 이회영 등과 함께 내몽고 지방의 3만 정보를 개간하여 군사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25년 1월 군사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 원을 국내에서 영남지방 유림을 대상으로 모집하기로 하는 등 구체적인 군자금 확보 계획을 세웠다. 이에 1925년 11월 상순 김창숙·김화식(金華植)·송영호·정수기 등이 영주 지역을 비롯하여 영남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이때 박제형은 송영호의 지시를 받고, 1926년 1월 중에 영주군 동면에 거주하던 부호 정원섭에게 김창숙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김동진 등과 함께 영주 지역의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면서 토지를 비롯한 양조장·인쇄소 등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제공하는 등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박제형도 이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제형은 출옥 후 1927년 3월 경상북도 평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1927년 8월 29일 설립된 신간회 영주지회의 총무간사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3월 24일에 개최된 임시대회에서 회장에 선출되는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는 영주에 은거했고, 1948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박제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