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맥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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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맥아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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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1985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밥맥명.jpg
밥 맥아두
헌액 연도
2000년



파일:밥맥아두.jpg

로버트 앨런 맥아두 주니어
Robert Allen McAdoo Jr.
출생
1951년 9월 25일 (72세)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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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206cm (6' 9")
체중
95kg (210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센터
프로입단
197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버팔로 브레이브스 지명

소속팀
버팔로 브레이브스 (1972~1976)
뉴욕 닉스 (1976~1979)
보스턴 셀틱스 (1979)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79~1981)
뉴저지 네츠 (1981)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81~1985)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86)
올림피아 밀라노 (1986~1990)
Filanto Forlì (1990~1992)
Teamsystem Fabriano (1992)
지도자
마이애미 히트 어시스턴트 코치 (1995~2014)
등번호
11번 / 21번

1. 개요
2. 학창 시절
3. NBA 커리어
3.1. 영광의 버펄로 브레이브스
3.2. 저니맨 시절
4. 코치 커리어
5. 수상 내역
6. 여담



1. 개요[편집]


버펄로 브레이브스/샌디에이고/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역사상 유일한 시즌 MVP 수상자이자 팀 최초의 데뷔 신인왕.[1] 클리퍼스의 부진한 역사 동안 초기에 팀을 거쳐간 4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중 가장 오래 팀에서 뛴 선수였다.[2]

전성기때는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클리퍼스가 버펄로에서 연고이전을 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본인의 커리어도 저니맨이기에 영구결번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NBA와 버펄로'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


2. 학창 시절[편집]


학교 교사였던 어머니와 대학 관리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밥 맥아두는 벤 L. 스미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농구부와 취중악부를 병행하는 학생이었다. [3]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선배인 바비 존스의 예전 기록을 깨고 67득점이라는 주 내 최고 득점을 갱신하기도 했다.

1971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한 맥아두는 딘 스미스의 지휘 아래 최초로 주전으로 뛰는 1학년생이 되어 학교를 NCAA 파이널 포까지 올려놓았으며 ACC 토너먼트 MVP를 수상했다. [4]

이렇듯 대학에서도 대활약을 하던 맥아두였지만 가정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고, 딘 스미스 감독과 상의 후 빠르게 NBA에 도전하기로 결정한다.


3. NBA 커리어[편집]



3.1. 영광의 버펄로 브레이브스[편집]


1972년 NBA에 도전장을 낸 맥아두였으나 맥아두가 ABA의 버지니아 맥콰이어스와 이미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NBA 총재까지 나서는 소동 끝에 1라운드 2순위로 버펄로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맥아두는 루키 시즌부터 두각을 드러내면서 1974-75시즌 MVP를 수상했으나 팀은 루징 시즌을 보냈다. 그는 "우리 팀엔 선수가 너무 없어서 내 아내가 경기를 뛰어도 될거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두번째 시즌에는 필드골 성공률 54.7%를 기록하면서 득점왕을 차지. 이후 3시즌 연속 득점왕에 오른다. 이 시즌부터 5년 연속 올스타전에도 출전하면서 영광된 시간을 보낸다. (1975년 올스타전 팬투표 1위) 팀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하여 동부 4위-3위-5위로 세 차례 연속 세미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한다. 이 시기가 1992년 론 하퍼가 클리퍼스를 다시 플레이오프로 보내기 이전까지 프랜차이즈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 시기 최연소 50득점-20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앤서니 데이비스가 22세의 나이로 깨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버펄로 브레이브스는 1976년 구단주가 바뀌는 소동을 겪으면서 이 혼란으로 인해서 전성기를 달리던 맥아두도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게 된다. 그리고 브레이브스/클리퍼스는 15년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클리퍼스는 2012-13시즌 전까지 50승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가장 근접했던 시기가 맥아두의 1974-75시즌의 49승, 론 하퍼의 1991-92시즌의 45승, 엘튼 브랜드의 2005-06시즌의 47승이다.

3.2. 저니맨 시절[편집]


70년대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닉스는 캡틴 윌리스 리드가 부상으로 1974년 조기 은퇴하면서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얼 먼로, 스펜서 헤이우드, 빌 브래들리필 잭슨 등 우승멤버들은 남아있었지만 맥아두는 닉스에서는 세미컨퍼런스 파이널 이상의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1979년 보스턴 셀틱스에서 아주 잠시 뛰다가 래리 버드가 입단하는 시기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떠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얻은 픽으로 보스턴은 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쉬를 얻으며 왕조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디트로이트에서 맥아두는 부상 관련으로 자신을 주전으로 쓰지 않는 팀과 충돌이 생겼고 뉴저지 네츠로 갔으나 10경기밖에 뛰지 않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된다. 목발을 짚을 정도로 부상에 시달리던 맥아두였으나 80년대 레이커스에는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등 쟁쟁한 멤버들이 많았고, 부상에서 회복한 맥아두는 그들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레이커스에서 두 개의 반지를 얻는다.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NBA 커리어를 마감한 그는, 이탈리아 리그로 떠나 유로리그 2회, 이탈리안 리그 2회 등 더 많은 우승을 경험한 후 1992년 은퇴했다.


4. 코치 커리어[편집]


1995년 비교적 신생팀이던 마이애미 히트에 뉴욕 시절 인연이 있던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오게 되면서 코지진으로 합류한 맥아두는 2014년까지 19년 동안 코치 역할을 소화하면서 팀의 3번의 우승을 모두 함께한다. (2006, 2012, 2013)

NBA 파이널 우승 (1982, 1985)
NBA 시즌 MVP (1975)
NBA 올스타전 5회 (1974-1978)
ALL NBA 퍼스트팀 (1975)
ALL NBA 퍼스트팀 (1974)
신인왕 (1973)
NBA ALL 루키 퍼스트팀 (1973)
NBA 득점왕 (1974-1976, 3시즌 연속)
FIBA 인터내셔널컵 챔피언 (1987)
유로리그 챔피언 (1977, 1978)
이탈리아 리그 챔피언 (1987, 1989)
이탈리아컵 우승 (1987)
NBA 파이널 우승/코치 (2006, 2012, 201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2006)


5.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6. 여담[편집]


  • 맥아두는 4명의 아이를 두었고 그 중 한 아들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후배가 되었다.

  • 케빈 베이컨이 출연한 아프리카 오지에 농구 유망주를 찾으러 간다는 영화 에어(1994)의 농구 장면 기술 고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 본인의 전성기를 미국의 북동부 버펄로시에서 보냈으나 그 전성기를 보낸 팀이 현재 LA에 있고(클리퍼스), 본인이 우승을 경험한 팀도 LA(레이커스)에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 신인왕, 득점왕, 시즌 MVP와 두번의 우승이라는 괜찮은 개인 커리어가 있었음에도 약체팀, 저니맨이라는 약점 때문에 96년에 선정한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2021년 NBA 75주년 팀에 선정되었다.
[1] 이후 버펄로는 어니 디그레고리오(1974), 애드리안 댄틀리(1977) 두 명의 신인왕을 배출하며, 연고이전 후에는 블레이크 그리핀(2011)이 유일하다.[2] 나머지 선수는 모제스 말론, 아드리안 댄틀리, 빌 월튼[3] 색소폰을 담당했다고한다.[4] 이후 주전으로 뛰는 1학년생 2호가 제임스 워디, 3호가 마이클 조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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