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제2기 (1360-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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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
1415년

1. 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6)
2. 카스티야 내전 (1366~1369)
3. 프랑스의 반격 (1369~1375)
4. 아서 왕의 죽음 (1375~1379)
5.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
6. 금성의 기사들 (1386~1389)



1. 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6)[편집]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조약의 내용에 의하면 모든 중장병과 자유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성과 요새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대장 아래 종군하는 수많은 가난한 부대원들이 한데 뭉쳤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왕들은 전쟁을 관뒀지만, 우리는 전쟁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는 부르고뉴로 행군했습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북부에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에스파냐, 나바라, 독일, 스코틀랜드 등 온갖 지역에서 몰려온 자유계약 용병들이 프랑스의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로부터 보호비를 갈취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군대'(free company)라 불렀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정규 군대를 따라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뒤따라온 부대'(tards-venus), 또는 소규모 분견대의 부대원들을 의미하는 '루티에'(routiers)라고 불렀다. 모두 결국 용병대라는 뜻이지만, '루티에'는 특히 백년전쟁 중기에 프랑스에서 악명을 떨친 '잉글랜드 용병단'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앞에서 말했듯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인이나 가스코뉴인들이 주축을 이뤘고 북부 프랑스인들은 가스코뉴인들도 그냥 잉글랜드인이라고 불렀으므로 루티에는 잉글랜드 용병의 동의어로 쓰였다.

하지만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낼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어 남동쪽으로 행군하며 프랑스 동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도 아니고, 기사 등 맨앳암즈 3,000명과 보조병 9,000명이 포함된 정예부대였다. 결국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는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아비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교황에게서까지 보호비를 뜯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다음, 유명한 잉글랜드인 용병 존 호크우드를 비롯한 군대의 절반 가량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고용돼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황의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서 이전처럼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 민중과 지방 중소귀족들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왕국과 샤를 5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약탈을 일삼는 이들 용병 무리를 진압할 정규군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1363년부터 마침내 '주민세'(fouage)가 시행된 것이다. 1363년 11월 아미엥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그랑드 콩파니라는 국가적인 재앙에 맞서 "우리 왕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6,000명의 전사(맨앳암즈)를 상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몫을 부담하며(le fort portant le foible) 가구 소득에 따라 최하 1프랑에서 최고 9프랑까지 평균 3프랑의 주민세를 부과[1]한다는 데 동의했다.

샤를 5세와 샤를 6세 시기 프랑스 발루아 왕실의 연간 조세수입은 이전의 3~5배인 200만 프랑 내외에서 최대 240만 프랑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참고로 전신갑옷과 각종 무기 및 2~3필 이상의 군마를 소유한 맨앳암즈 6,000명 + 준마나 조랑말을 탄 경기병과 승마궁수 18,000명 + 조랑말을 탄 종복 6,000명으로 구성된 기병대 30,000기의 365일치 봉급이 186만 프랑이었다. 샤를 5세는 이후 10년 이상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음에도 1380년 사망했을 때 아들인 샤를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재정사의 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용병 도적떼들은 결국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와 방해, 내부 분열을 겪으며 서서히 프랑스군에 매수되거나 진압되었다. 그러나 남부 프랑스에서는 도적단 토벌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등으로 향한 잉글랜드 용병들은 그곳에서 철저한 규율과 잔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존 호크우드처럼 몰락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사생아를 아내로 얻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다가 평화롭게 생을 마감한 사례도 있었다.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은 1364년 오레 전투에서 친영파인 몽포르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게클랭이 포로가 되고 샤를 드 블루아가 전사하면서 잔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포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이 되어 프랑스와 화해했다.


2. 카스티야 내전 (1366~1369)[편집]


파일:Battle_of_Montiel 1369.jpg

이제 여러분이 듣게 될 것처럼, 여기서부터는 연민, 사랑, 그리고 정의가 함께 어울리는 고귀하고 인상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찬도스 해럴드, '흑태자의 삶'


카스티야 내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끼어든다.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는 페드로가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잉글랜드군이 떠난 뒤 몬티렐 전투에서 페드로가 전사하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엔리케 2세가 왕위에 오른다.


3. 프랑스의 반격 (1369~1375)[편집]


파일:Karel5_Guesclin_Fouquet.jpg

진실의 여왕이 물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그대들이 만든 과부, 거지, 불구자, 고아들이 얼마나 많은지, 폐허로 만든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셀 수나 있을까? 비록 주님의 뜻에 따라 스코틀랜드 왕을 포로로 잡고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끔찍한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그 결과 그대들은 지금 이 두 왕국의 백 분의 일에 불과한 영토만을 차지하고 있다네."

필리프 드 메지에르, '늙은 순례자의 꿈'


렌 공방전에서 전공을 세워서 명성을 얻었던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때부터 프랑스의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브르타뉴의 최하층 귀족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게클랭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위를 거듭하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잉글랜드 군대를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로 명성이 높았던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61년 병사했고, 흑태자 에드워드는 137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다. 그밖에 존 찬도스와 월터 매니 등 에드워드 3세의 영광의 시대를 함께한 '원탁의 기사'들이 대부분 죽었다. 에드워드 왕 자신도 60대에 접어들면서 기력을 잃고 고약한 성격과 욕심만 남은 노인으로 전락했다.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을 때는 이미 프랑스가 노르망디와 가스코뉴의 일부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한 뒤였다.

한편 1372년 브르타뉴에서는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 발각되면서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4. 아서 왕의 죽음 (1375~1379)[편집]


파일:edward-iii-king-england.jpg

아서 왕 자신은 치명상을 입었고, 그 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 섬으로 옮겨지면서, 콘월 공작 카도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척인 콘스탄틴에게 브리튼의 왕관을 넘겨주었다. 그리스도 강생 542년에 있었던 일이다.

몬머스의 제프리, '브리튼 열왕사'


1376년 9월 21일 흑태자가 결국 병사했다. 이듬해인 1377년 6월 21일에는 에드워드 3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리처드 2세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5.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편집]


파일:Slag bij Westrozebeke 1382.jpg

"나는 7년 전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새끼 고양이가 지배하던 궁궐은 힘든 곳이었다'란 말을 기억한다. 성경도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왕인 나라에 슬픔이 있을지니!' 그러니 그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한 명의 폭군을 제거한 결과가 가져오는 해악과 슬픔보다는 작은 손실이 더 나으니까. 궁궐의 고양이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시궁쥐들은 사람들의 옷가지를 씹고 우리 생쥐들은 맥아를 먹을 것이다."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1379년 9월 플랑드르의 세 대표 도시들이 또다시 백작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에서도 가난한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조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플랑드르 반란은 잉글랜드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전황이 암울하기만 한 가운데 1381년 인두세 부과를 계기로 분노한 평민들[3]이 봉기를 일으켰다.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와트 타일러의 난)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85년 5월에는 장 드 비엔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4]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군 4,000명[5]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대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 결국 14년 뒤 존의 아들 헨리가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끌어내리고 헨리 4세로 즉위한다.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원정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온 귀족들을 강제로 억류한 채 프랑스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이미 비참하게 쇠락했으며 프랑스군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밝혀진다. 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를 통해 잉글랜드 본토를 침공한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1385년 11월 부르고뉴의 용담공 필리프 2세는 헨트 시민들의 반역죄를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과 특권을 돌려주는 등 거의 항복에 가까운 조건으로 반란군과 타협했다. 6년 동안 이어진 내전은 그렇게 헨트 시민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내전은 그렇지 않아도 위기에 처해 있었던 플랑드르 직물 산업의 쇠퇴를 가속했고, 이 영광의 순간을 끝으로 헨트 시의 부와 권력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6. 금성의 기사들 (1386~1389)[편집]


파일:Arundel,_Gloucester,_Nottingham,_Derby,_and_Warwick,_Before_the_King.jpg

이들은 전장 대신 침실에서 기량을 떨치는, 창 대신 혀로 싸우는, 언변은 능숙하지만 무술 시연은 굼뜬, 마르스의 기사들이 아닌 비너스의 기사들이었으므로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토머스 월싱엄의 연대기


1386년이 되자 프랑스군의 잉글랜드 본토 침공 위협이 가시화되었다. 리처드 2세의 미성년 섭정 기간이 끝나가면서 의무와 책임은 늘었지만 전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결국 의회는 에드워드 3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명분 삼아 리처드 2세의 권위에 도전한다. 궁지에 몰린 리처드 2세는 일시적으로 의회와 타협하지만 1389년 권력을 되찾은 즉시 프랑스와 종전 협상을 전제로 하는 휴전을 체결했다.


[1] 걸인이나 날품팔이 등 극빈층은 가구 수 산정에서 제외되었다.[2] 성백용, <14세기 후반~15세기 초 프랑스 왕정과 북부 도시들의 반란: 국가 재정의 문제를 중심으로>[3] 농노나 하층 임노동자들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민 부농과 도시 장인들, 그리고 자의든 협박에 의해서든 젠트리 계층도 많이 가담했다.[4] 맨앳암즈 1,000명, 그리고 전원이 기병으로 추정되는 궁수 500명과 나머지 보조병들[5] 맨앳암즈 1,000명, 경기병 3,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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