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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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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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 전투
영어: Battle of Auray
프랑스어: Bataille d'Auray
파일:오레 전투.jpg
시기
1364년 9월 29일
장소
프랑스 브르타뉴 남서쪽 해안지대 오레 마을 외곽 평원
원인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결판을 내려는 몽포르 가문과 블루아 가문의 대결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장 드 몽포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첸도스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샤를 드 블루아†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베르트랑 뒤 게클랭
병력
2,000명
3,000~4,000명
피해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
800명 전사, 1,200명 생포
결과
몽포르 가문의 승리.
영향
장 4세 드 몽포르의 브르타뉴 공작위 등극, 브르타뉴 내전 종결.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64년 9월 29일, 장 4세 드 몽포르가 이끄는 몽포르 가문-잉글랜드 연합군과 장 드 블루아가 이끄는 블루아 가문-프랑스 동맹군이 브르타뉴 오레 마을 외곽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최후의 전투이다.


2. 상세[편집]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한 뒤 장 3세의 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3세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공작위를 놓고 대립하면서 벌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대결인 백년전쟁에 휘말리면서 23년째 결판이 나지 않았고, 브르타뉴 전역은 군소 군벌간의 분쟁과 도적떼의 창궐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몽포르[1]는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편으로서 23년간 아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몽포르 가문 및 잉글랜드군과 항전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몽포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첸도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래늗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벨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고, 잉글랜드 장궁병과 프랑스 석궁병간의 사격전이 펼쳐졌다. 이후 양측 맨앳암즈들과 창병들이 정면 충돌했다. 양자 모두 길고 잔혹한 전쟁을 이번 전투에서 끝내고 싶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반나절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끝에, 존 첸도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첸도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녹스는 찬도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벨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몽포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종식되었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풀어준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게클랭 역시 프랑스 왕이 10만 프랑을 친히 지불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샤를 드 블루아는 갱강에 안장되었고, 1904년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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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3세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의 아들로,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1345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