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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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10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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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지혜제일 사리풋다
(사리불)
2대 신통제일 마하목갈라나
(대목건련)
3대 두타제일 마하카사파
(대가섭)
4대 해공제일 수부티
(수보리)
5대 설법제일 푸르나
(부루나)
6대 논의제일 마하카트야야나
(대가전연)
7대 천안제일 아니룻다
(아나율)
8대 지계제일 우팔리
(우바리)
9대 밀행제일 라훌라
(라후라)
10대 다문제일 아난다
(아난)



파일:석굴암 사리불.jpg

나는 지금 가지가 없는 큰 나무와 같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것은 큰 나무에 가지가 잘려나간 것 같다. 대중들을 살펴보니 마치 텅 빈 것 같구나. 그들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있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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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9경


그 분은 제2의 부처님이라고 할 만큼 법을 잘 받들었습니다. 능히 여래를 따라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었으니, 부처님의 제자 중에 지혜가 제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혜를 그 분의 지혜에 견주면 16분 중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직 여래만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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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급다 존자가 아쇼카 대왕에게, 『아육왕경』 2권(ABC, K1013 v30, p.357a01)


석가모니십대제자 중 필두인 인물. 그가 열반하기 전까지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사리풋다와 나머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이 때문에 남방불교 경전에선 물론이고 대승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금강경과 함께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은 사리자 즉 사리뿟따를 향해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는 내용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샤리뿌뜨라(Śāriputra), 팔리어로는 사리뿟따(Sāriputta)라고 하는데, 이 명칭을 한역하여 '사리불(舍利佛)' 혹은 '사리자(舍利子)'라고 한다. '샤리뿌뜨라'는 '샤리의 아들'이란 뜻인데, 샤리는 그의 어머니 이름이다. 어머니 이름으로 아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한자로 아들 자(子) 자를 넣어서 '사리자'라고도 옮긴 것이다. 그의 원 이름은 우빠띠샤(Upatiṣya), 팔리어로는 우빠띳사(Upatissa)이다.

마가다 왕국 출신의 브라만 가문의 후예로 우빠띳사(또는 날라까)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친구 목갈라나(목건련)와 함께 산자야라는 수행자의 교단에 출가했는데, 그는 '진리는 확정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을 주창하던 육사외도였다. 사리뿟따는 이러한 가르침에 "그러면 '확정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답할 수 있는가?" 하며 번민하던 중에 석가모니를 만났다.

사리뿟따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친구 목갈라나, 자신들을 따르는 수행자 250여 명을 이끌고 불문에 귀의했고, 석가모니도 그들을 특별히 아껴 사리뿟따를 자신의 오른쪽에, 목갈라나를 왼쪽에 앉혀 그들을 자신의 수제자임을 분명히 하였다.[1] 사리뿟따도 석가모니와 그 교단에 헌신하여, 훗날 데바닷타[2]가 일부 비구들을 이끌고 교단을 이탈하려 하자 목갈라나와 함께 나서서 비구들을 조리있게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는 등 활약하였다.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비로워서 주로 대중들을 교화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다른 비구들은 그에 비하면 지혜가 16분의 1도 미치지 못한다고도 하였고, 간혹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한 일도 있다. 또한 외법(불교 외의 교단)에도 밝아 위의 데와닷따의 얘기처럼 이들 교리의 헛점을 논파하는 데에도 능했고, 한편으로는 방대한 지식을 살려서 불교 교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게끔 정리하는 데에 일조하여 오늘날 대승 불교의 기초를 마련했다고도 말한다.

목갈라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열반에 들었는데, 정확하게 시기가 언급된 것은 아니나,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에 경전 편찬을 당시 두 사람이 아닌 3인자 위치였던 마하깟사빠(가섭)가 주도했으므로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음은 확실하다. 그들이 열반한 후에 석가모니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보이지 않는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만 같구나."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리뿟따가 태어나고 입적한 날란다 지방의 사원에는 사리뿟따를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나중에 여기에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불교 대학이 설립되었고 한때는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자이나교의 경전 <이시바샤임>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사리뿟따의 가르침'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불교의 대표자를 사리뿟따로 본 것이다. 초기 불교 승단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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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보다 먼저 들어온 비구도 많았기 때문에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석가모니는 둘의 전생 이야기까지 하면서 설득했다.[2] 여담으로 사리뿟따는 한때 '데바닷타는 신통과 위력이 뛰어난 비구'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데바닷타가 석가모니의 교단을 떠나 자기 교단을 세우려 들면서 교단의 분열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