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동 폭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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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과정
3.1. 1차 폭격
3.2. 2~3차 폭격
4. 민간인 피해와 진상규명
5. 참고자료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51년 1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2. 배경[편집]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6.25 전쟁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세로 급전하여 후퇴를 거듭했고, 맥아더 사령부는 이러한 수세를 만회하기 위해 네이팜탄과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그 결과 1951년 2월부터는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다시 공세로 전환했다. 1.4 후퇴 이후 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 등 소백산맥 일대는 유엔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회전축이었고, 산성동도 바로 그곳에 위치했다.


3. 전개 과정[편집]




3.1. 1차 폭격[편집]


1951년 1월 19일 산성동 일대에 있던 미군 187 공수연대가 폭격 요청을 했고, 이에 따라 미공군의 공중폭격이 실행됐다. 19일 14시 50분 대략 18대의 전투기가 동원되어 산성동을 폭격했다. 먼저 F9F 전투기 4대가 산성동을 공습했으며, 별도로 콜세어기(F4U)와 쌍발 프로펠러 공습기(AD)가 동원됐다. 1차로 산성동을 폭격한 18대의 전투기 중 13대가 콜세어기였으며, 주로 네이팜탄을 사용해 산성리를 폭격했다. 콜세어기가 네이팜탄 폭격을 주도했다면, 1대의 쌍발 프로펠러 공습기는 장착된 로켓탄과 50구경 기관총으로 기총소사를 하며 이를 보조했다. 비슷한 시간대 산성동 이외에도 최소 마을 세개 이상을 격심하게 폭격하여 수많은 화재와 폭발이 일어났다.

이후 폭격의 결과는 "화재와 폭발 대성공"이나 "남은 집들 파괴 및 소각 대성공"으로 보고되었으며, 당시 한겨울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산간마을에 네이팜탄으로 인한 화재 및 파괴와 소각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3.2. 2~3차 폭격[편집]


1차 폭격으로부터 50분 이후인 15시 40분, 미군은 다시 산성동을 폭격했다. 당시 정찰기의 조종사는 보턴필드 대위였고 관측자는 네빌이었는데, 이 정찰기는 15시 40분의 2차폭격과 14분 뒤인 15시 55분의 3차 폭격을 보고했다. 15시 40분 총 13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 500파운드의 네이팜탄과 50구경 기관총 등으로 산성동과 예천군 북쪽 산악지대를 두루 공격했다. 2차 폭격 이후 미군 안에서는 산성동 청소해야(clean out) 한다는 주장이 관철되어 또다시 폭격을 게시했다. 따라서 산성동은 3차에 걸쳐 폭격을 받는다.

15분 뒤인 15시 55분 산성동에 다시 3차 폭격이 자행됐다. F80 4대가 50구경 기관총으로 산성리 일대를 기총소사 했다. F80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전투기인데, 3차 폭격의 결과는 역시 "성공적(Exell coverage)"였고, 이에 따라 "많은 화재가 일어났다." 15시 55분에 있던 3차 폭격의 경우 전투기에 탑재된 50구경 기관총에 의한 기총소사만 있었다. 1,2차 폭격에 비해 경미한 것이었고, 3차 폭격은 마무리 폭격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4. 민간인 피해와 진상규명[편집]


19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진평리 폭격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김○○는 마을 폭격 이후 미군들이 들어와 인근 마을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진술했고, 1951년 1월 12~19일 충북 단양군 노동리와 미동리의 미군폭격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미군의 공격이 "폭격→포격과 총격→소각" 순으로 진행되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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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p.328


가족 중 두 사람이 돌아가셨어요. 모친하고 여동생하고

폭격 희생자의 이후 증언


미군의 폭격 이후 한국군 2사단에서 그 지역에 도착하여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민간인 피해가 많이 있었고 "적군 피해는 전혀 없는 것"으로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고했다. 2월 초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연락장교 쿠치 대위를 통해 미8군과 미5공군의 사령관 지시에 의해서 미8군의 감찰감 샌더스 중령과 미5공군의 감찰감 워런 대령이 2월 8일부터 13일까지 대략 1주일간 조사하여, 2월 13일 양측 사령관에게 공동으로 보고했다. 합동조사보고서 이후 한달이 지난 3월 13일 미8군은 리지웨이 사령관의 승인 아래 "폭격이 정당하다"는 <합동조사보고서>의 결론만 주한미군사고문단에 간단히 통보했다.

3차에 걸친 폭격이었기에 당연히 이에 따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마을 주민은 남성 18명과 여성 33명 총 51명이며, 10세 이하 어린이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 67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은 것이다. 역사학자 도진순[1]에 따르면, 실제 피해는 더 심했겠으나, 한국군 2사단의 보고만으로도 피해가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망자 외에도 부상자 및 실종자를 합치면 사상자는 대략 136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사상자 136명 중 여자가 80명이고 남자가 56명이다. 폭격 피해자 중에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무하러 갔고, 여자들은 마을에 모여 명주를 짜다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폭격으로 69채에 달하는 가옥이 손실되었는데, 이는 마을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

당시 미군 자료들을 보면 "여자와 아이만 있기 때문에" 폭격을 취소하는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거기다 산성동에는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당시 들어갔던 한국군의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따라서 산성동 폭격은 사상자에서 여자나 아이의 비율이 많다는 점에서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2007년 11월 1951년 1월 19일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서 일어난 민간인 마을 폭격사건을 '미군의 오폭'이라고 결론냈다.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예천 일대를 지나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고자 학가산 정상(882m) 반경 5마일(8㎞) 내 지역을 이동 경로로 예상했고, 미 육군 10군단의 지시로 5공군이 이 일대에 폭격을 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0년 경북 예천군은 24일 6·25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보문면 산성리 현지에서 '산성동 미군 오폭 희생자 위령비'제막식을 가졌으며,김수남 예천군수를 비롯해 안태기 유족회 대표와 유족회원, 마을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해 6·25 전쟁 중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의 넋을 위로하고 아직까지 마을에 살고 있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달랬다.

과거사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미국에 알리고 협상과 위령 사업의 지원 등을 권고했지만 아직 별다른 답변을 얻지 못했다. 지난 제19대 국회에서 '예천 산성동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현재는 폐기된 상태다.


5. 참고자료[편집]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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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에 출판된 백범일지에 주해를 단 학자이기도 하다.[2] 폭격의 피해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