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리치필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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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공회 리치필드교구(Diocese Of Lichfield)는 잉글랜드의 유서깊은 교구이다.
교구에는 4인의 보좌주교와, 4개 대리구를 관할하는 4명의 대부제가 있으며, 슈루즈버리 주교는 샐롭 대리구를, 스테퍼드 주교는 스토크 대리구를, 울버햄프턴 주교는 리치필드, 월솔 대리구를 감독한다. 오스웨스트리의 주교는 2023년에 신설되었으며, 캔터베리관구 내의 여성 성직 거부 신자, 특히 강경한 고교회 성향 신자들을 전담사목한다.
2. 역사[편집]
머시아 왕국의 왕자였던 페아다(Peada)가 653년경에 노섬벌랜드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올 때, 사제 4명이 함께 들어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656년에 머시아를 총괄하는 머시아교구(Diocese of Mercia)가 세워지고, 디우마(Diuma, 생몰년도 불명.)가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그리고 머시아 내에서도 그리스도교 교세가 커지고, 교구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해[5] , 669년에 5대 머시아교구장 체아다 주교[6] 가 리치필드 일대를 본인의 관할지역으로 선포하여 리치필드교구의 역사가 시작된다. 787년 첼시 주교 시노드 때, 머시아 왕이었던 오파(Offa)의 입김을 통해 잉글랜드 지역 제3의 대교구로 격상되었다가, 796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직권취소되는 일도 겪었다.
9세기에 들어서 바이킹의 침략으로 리치필드 일대가 황폐화되어 교구는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1075년에 체스터로, 1102년에는 코번트리로 주교좌를 옮겨 살 길을 모색하였다. 오랜 기간 코번트리에 주교좌를 두었다가, 1539년에 리치필드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리치필드교구는 중세 동안에 영국에서 가장 컸던 교구였기 때문에, 헨리 8세에 의해 1541년에 체스터교구가 분할, 신설된다.
이어, 1837년에 코번트리 지역이 우스터교구로 이관되고, 1884년에는 더비 일대가 신생교구였던 사우스웰 & 노팅엄교구로 이관되었다. 이후로는 교구분할 없이 3번의 대리구 조정이 있었고, 1997년에 조정된 대리구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3. 여담[편집]
- 특이하게 잉글랜드 성공회임에도 불구하고 웨일스의 일부를 관할한다. 머시아 왕국의 영토가 현재 리치필드교구 관할구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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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버햄프턴의 주교[2] 슈루즈버리의 주교[3] 스테퍼드의 주교[4] 오스웨스트리의 주교, 캔터베리관구 내의 강경 고교회 성향 신자 전담사목.[5] 이 시기에 우스터, 린지(현 링컨), 레스터, 헤리퍼드 교구가 생겼다.[6] Ceadda, 634(추정)~672. 가톨릭 성인으로, 자신의 동생과 함께 잉글랜드 곳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664년에 요크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하필이면 이미 요크교구장이 존재하는 상태여서, 한 교구에 교구장이 2명인 몹시 이상한 꼴이 되었다. 결국, 669년에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타르수스의 데오도르가 교황의 명대로 교통정리를 해주어, 체아다는 머시아교구장이 되었고, 3년간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다 선종했다. 이후에 성 베다가 그에 대한 전기를 작성했으며, 가톨릭 교회에서는 3월 2일을 체아다의 축일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