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벽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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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재는 실전됨, 2격투술 일부 포함, 3격투술





수벽치기의 타격기술 시범 영상
1. 개요
2. 특징
3. 역사
4. 기천문과의 관계
5. 한계
6. 여담


1. 개요[편집]


택견꾼 신한승이 발굴한 한국의 전통 무술. 안대도, 김영희, 신한승 순으로 계보가 이어지며, 현재 육태안이 신한승에 이어 4대 계승자를 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해동죽지(海東竹枝)'[1]에서 씨름, 택견과 함께 한반도 민속 무예로 소개되었다.[2]

2. 특징[편집]


수벽치기는 맨손을 주로 쓰는 전통 무예다. 초기에는 중앙문화센터에서 <택견과 수벽>이라는 명칭으로 택견의 발질도 함께 전파했다. 현 전승자인 육태안은 "손은 수벽치기이고 발은 택견이라고 신한승선생으로 부터 배웠다"고 제자들에게 알렸다. 나중에 김영희 선생으로부터도 직접 배웠다. 육태안의 수벽치기는 부드럽고 유연한 수련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제압력'이 매우 강한 무예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무형문화재 등재의 심사를 맡았던 문화재위원들을 비롯한 전통무예의 전문가들은 '수벽치기'의 기술들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우리 무예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고대의 수박에서 발전한 한 유형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신한승의 유언대로 육태안은 수벽치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단순한 무예가 아니라 100세가 돼서도 수련할 수 있는 생활체조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3]

수벽치기에서는 팔을 날개로 보고, 팔을 통해 펼치는 기술들을 날개짓이라고 부른다. 육태안에 따르면 검술은 맨손무예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맨손을 수련한 후 목검으로 검술을 수련한다. 이것은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살기를 빼고 몸을 활용하는 활법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한 방법이다. 이러한 수벽치기의 이론은 '수벽치기 맨손검술'이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으며, 육태안의 석사논문을 참고하면 보다 깊게 수벽치기를 이해할 수 있다.

전통무예 중에서 검술수련의 기본을 맨손으로 명시적으로 체계적으로 수련하고 있는 무예는 수벽치기가 유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수벽치기는 맨손으로 수련한 검을 목검을 들고 수련하고, 목검으로 완성된 검술을 다시 맨손으로 수련한다. 수벽치기는 손, 발, 머리, 무릎, 팔굽 등을 사용한 타격을 기본적으로 수련하고 있다.

3. 역사[편집]


일제강점기에 레슬링 선수였던 신한승은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선정될 정도로 수련했음에도 택견 이외의 전통무예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한승의 제자 육태안은 기천, 합기도, 만주권법, 검술 등 다양한 전통무예를 수련하다가 신한승 선생의 스승인 일동 김영희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일동선생은 해동죽지라는 고서에 적혀있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예 세가지, 택견, 씨름, 수벽치기 중 하나인 수벽치기의 전승자였다. 무예의 연구 정리 기량이 뛰어났던 신한승은 일동선생에게 배운 수벽치기를 정리하여 그 기법을 제자 육태안에게 전수해주었다.

육태안은 신한승이 자신을 계승자로 삼은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신한승이 육태안을 선택한 이유는 육태안이 본인처럼 여러 전통무예를 수련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검술에 능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육태안의 논문이나 저서, 그를 다룬 신문기사들에 따르면 신한승은 병상에서도 고드기, 박치기 등 수벽치기의 마지막 수까지 육태안에게 전수하기 위해 힘썼다. 현재는 육태안과 그의 제자들이 서울, 지리산, 전라도 광주, 전주, 원주, 부산 등지에서 수벽치기를 수련,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기천문과의 관계[편집]


육태안은 기천문의 전파 초기에 수석사범을 한 기천의 고수다. 그래서 <기천과 수벽>이라는 이름으로 전통무예를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육태안의 아들 육장근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오랜 수련 끝에 수벽치기를 알리고 있다. 수벽치기의 전승자들이 초기 형태의 기천수련을 동시에 했기 때문에 수벽치기와 기천문을 혼돈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두 무예를 수련해 보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오해를 받는 이유는 수벽치기의 많은 수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기천의 수를 수벽치기의 결로 수련하기 때문이다. 즉, 전승되지 못하고 누락된 수벽치기의 일부분을 기천문의 수로 채워넣은 것일 뿐 근본적으로 기천문과는 아예 다른 무술이다. 참고로 육태안은 기천이 음의 무예라면 수벽은 양의 무예라고 했다. 기천은 빠르고 강하며, 수벽은 느리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5. 한계[편집]


택견, 씨름, 활쏘기 등의 경우와 다르게 전통무술로서 무형문화재 등재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택견꾼 신한승의 주도 하에 무형문화재 등재 신청도 했었고 심사도 받았지만 결국 통과하지는 못한 것이다.

일단 사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전통무술로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명맥을 유지했던 택견과는 다르게 신한승이 전승자를 찾아내기 이전의 수벽치기는 사실상 괴멸 상태였고 명맥이 그대로 끊길 위기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당대에 이미 여러 수가 실전되어버려 무술을 정립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생전의 신한승은 이를 파악하고 어떻게든 수벽치기의 온전성을 되살리기 위해 완전복원사업에 착수했었지만 결국 이를 끝마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

신한승의 완전복원사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결국 현재에 와선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천문으로 수벽치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수벽치기의 무형문화재 등재는 흐지부지되었다. 이후로도 계승자인 육태안은 포기하지 않고 '수벽치기의 역사와 기법'이라는 수원대 박사 논문까지 발표하며, 실전된 전통무술인 수박과 수벽치기를 연결지어 그 역사성을 증명하고자 하나 아직까지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 외의 이유를 들자면 역사적 고증의 부족이 있다. 일제시대의 해동죽지를 제외하면 수벽치기의 역사성이나 계보를 제대로 입증할만한 기록이 사실상 없으며, 관련자들의 증언과 신한승의 보증 정도로 이를 보충하기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 심사위원들이 직접 수벽치기의 시연을 보고 전통무술일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결정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는 부족했던 것이다.[4]

6. 여담[편집]


  • 어린이 무협소설 '지킴이'에서 한국 고유의 무술 중 하나로 조연이 사용한다.
  • 배우 유오성이 드라마 장길산을 촬영하기 위해 이 수벽치기를 배우기도 했다.
  • 수벽치기는 예술분야에서 많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문화 예술인, 종교인들이 수련하기도 했다. 또한 육태안의 제자들 중에는 경제학, 역사학, 물리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의 박사학위를 가진 제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수벽치기는 평소 한국의 전통 무술에 관심이 많던 신한승이 발굴해낸 무술이었는데 사실 본래의 목적은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술 수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와서야 둘이 다른 무술이라는게 밝혀졌긴 하지만[5] 잊혀질뻔한 전통 무술 하나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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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1년 저술, 1925년 출판.[2] 수벽치기는 한글로 적혀있고, 나머지 내용은 한문으로 적혀있다.[3] 요즘(?)은 지리산 인근에 거주하며 <기천과 수벽>이라는 이름으로 수벽치기와 함께 초기 박대양 선생으로부터 배운 '기천'을 동시에 전파하고 있다.[4] 반대로 말하면 적어도 20세기 초에는 존재했던 무술이니 21세기 기준으론 나름 100년이 넘는 역사성이 있는 무술이다.[5] 상기했듯 수벽치기의 기원을 수박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의견도 있지만 증명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