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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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현상.jpg
성명
신현상(申鉉商)
이명
신현정(申鉉鼎)

일연(一鳶)
본관
평산 신씨
생몰
1905년 2월 12일 ~ 1950년 9월
출생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신례원리
사망지
대전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해방 후, 그리고 비참한 최후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신현상은 1905년 2월 12일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신례원리에서 신학균(申學均)과 광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산군청이 출간한 <일연추모록>에 따르면, 신현상은 부친과 함께 당대 전라도의 대표적인 유학자 전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전우는 그가 열네살의 나이로 수백 리 마다않고 찾아온 것에 감명을 받고 그를 위해 주자의 말씀을 적어줬다고 한다. 하지만 전우는 계화도에 은거하여 세간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기에 어린 나이의 신현상이 그를 찾아와서 수학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아마도 전우의 가르침을 받은 부친에게 교육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연실기간행위원회'가 1975년에 작성한 <약전>에 따르면, 신현상은 1920년 또는 1923년에 권덕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권덕규는 이 시기에 휘문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신현상이 휘문학교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은 현존하지 않다. 따라서 그가 정말로 권덕규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신현상은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학 수준은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정화암은 훗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중국에서는 명필과 명문가가 많아서 글씨도 알아주는 글씨라야 팔리게 되는데, 원래 재주가 비상한지라 그의 글씨가 곧 잘 팔려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 떨어진 중국옷을 걸치고 글씨를 써서 파는 모습을 보며 우리 동지들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정화암, <상해에서 본 일연동지>, '일연추모록', 1974.


유기석은 1928년 여름 상하이에서 신현상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28년 여름, 나는 평범하지 않은 청년 신현상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아마도 나보다 몇 살 어린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지식인이라면 학교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만든 소학교나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은 유림 출신으로 입만 열면 오로지 공자와 맹자만 알았기에 머릿속에는 예의와 염치만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서양학문을 무시했고 일본놈을 업신여겼다. 그러므로 끝까지 아들을 서양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신현상은 그의 부친을 따라 집에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한학 고적만 맹목적으로 마냥 읽었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



2.2. 독립운동[편집]


신현상은 1926년 무렵 최석영을 만났다. 당시 최석영은 당진, 예산 일대에서 미곡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신현상에게 상하이 망명을 권유했고, "이렇게 방일한 생활만 해서 앞으로 그 무엇을 할 것인가? 나 자신을 알고 남아다운 뜻을 가져야 하지, 지금의 생활은 옳게 볼 수 없다"고 충고했다. 신현상은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해 3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아나키즘을 수용한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해 역시 아나키즘을 신봉하던 정화암, 백정기, 유기석 등과 함께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했고, 글씨를 써서 팔기도 했다. 유기석은 후에 신현상의 상하이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상해에는 망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으니 상해에 도착만 하면 어쨌든 활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해로 온 이후에야 비로소 소위 임시정부란 무료한 정객들의 인이 박힌 아편관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걸었던 모든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나는 신현상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한문을 읽기에 나는 많은 새로 나온 중국어 책을 그가 보도록 소개하였다. 그는 한권 또 한권을 보면서 새로 나온 책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잠시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는 새 책의 매력이 고적보다 백배 넘는다고 하였다. 그는 리우스푸의 글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


1929년 봄, 유기석은 신현상에게 국내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는 일제가 감시하지 않은 인사는 그가 유일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면 생계를 걱정하기 바쁜 해외보다는 국내가 낫다고 주장했다. 신현상은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국내로 귀환했다. 이후 그는 1928년 10월 일제에 체포된 후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이정규의 심문기록을 직접 베껴 유기석에게 보냈고, 유기석의 국내 잠입을 만류했다. 또한 1929년 11월 7일 흑색운동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평양경찰서에 체포된 뒤 11월 11일에 훈방 조치되었다.

한편, 그는 고향인 예산에서 자금 모집을 시작했다. 먼저 최석영을 찾아간 그는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특히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이 부족해 활동이 어렵다는 점을 알리고 자금을 모집해 상하이로 망명할 것을 제안했다. 최석영은 이를 받아들이고 자금 모집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일반인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고 거액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정한 목표는 바로 호서은행이었다.

호서은행은 1913년 조선인 대지주와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은행으로, 본점을 예산에 두고 충남 광천, 천안, 홍성, 경기도 안성에 지점을 설치했다. 1927년에는 본점을 천안으로 옮기고 충남 대천과 경기도 장호원에 지점을 추가로 설치하면서 충남 서북부 일대 금융을 장악했다. 호서은행의 주요 영업 대상은 내포 지역에서 미곡 무역을 하는 지주와 곡물상들이었으며, 이들에게 어음 거래를 통한 대출이 주요 수입이었다. 신현상과 최석영은 이러한 호서은행의 신용거래를 이용하기로 했다.

최석영은 당진, 합덕, 삽교, 예산, 신례원, 선장 등지에서 정미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호서은행과 얼마든지 신용거래를 할 수 있었으며, 어음 발행과 인출 등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었기에 이를 이용해 자금을 탈취할 수 있었다. 신현상과 최석영은 인천기선주식회사의 인장을 조각했고, 조각된 인장으로 인천기선주식회사 선하증권 15통을 위조했다. 이후 두 사람은 위조한 선하증권을 가지고 어음을 발행했고, 1930년 3월 호서은행에서 어음을 할인받아 자금을 인출했다.

이들이 위조한 어음은 7만원이었으며, 할인을 받아 인출한 금액은 58,000원이었다. 자금 인출은 호서은행 예산지점과 천안본점에서 이뤄졌다. 이들이 인출한 금액이 거금이었기에 예싼지점에서 모든 금액을 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금 인출 작전에는 석윤옥, 인각수, 신현국, 최병하, 정만희, 김학성, 장재욱 등도 함께했다. 석윤옥은 인장을 위조한 조각가였고, 인각수와 신현국은 탈취한 자금 일부를 보관했다. 최병하는 최석영의 친족이었으며, 신현국은 신현상의 집안 인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정만희, 김학성, 장재욱 등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하지만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해서 자금 탈취에 성공한 신현상은 함흥으로 이동한 뒤 아나키스트 차고동을 만나서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때 그는 자금이 워낙 거금이므로 한꺼번에 운반할 수 없었기에 일부 자금만을 가지고 베이징에 가기로 했고, 베이징에서 안전한 장소가 확보되면 나머지 자금도 가져오려 했다. 원래는 인천에서 배편을 이용해 중국으로 가려 했지만, 자금탈취 사실을 알아낸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배편을 이용한 탈출을 포기하고 철도를 이용해 원산, 함흥, 청진, 회령, 중국 용정, 단둥을 거쳐 3월 22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베이징에 거처를 마련한 뒤 북경시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유기석을 찾아가 자금을 성공적으로 탈취했음을 알리고, 유기석과 함께 탈취한 자금의 사용방법을 논의했다. 당시 그가 탈취한 58,000원은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8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큰 돈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이 소식을 듣고 '천우신조, 기사회생'으로 판단하고 이 자금을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유기석과 신현상은 임시정부가 아닌 아나키즘 운동에 활용하기로 결정하고 무정부주위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대표자회의는 1930년 4월에 개최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논의 끝에 만주에서 추진되고 있는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에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또한 유자명, 장도선(張道善), 정종화 등은 신현상이 가지고 온 자금의 일부를 토대로 1930년 4월 20일 상해 법계(法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맹식을 거행하고 선언강령 규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1930년 4월 28일, 일본영사관과 결탁한 중국 경찰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숙소를 습격했다. 그 결과 신현상은 유기석, 김종진, 이을규, 최석영, 정래동, 오남기, 국순엽, 차고동, 김지강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행히 유기석이 뷱경시에서 근무하면서 윗선에 연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5월 16일 모두가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경찰은 신현상과 최석영을 다시 체포하여 국내로 송환하려 했다.

이에 유기석은 여론을 조성해 이들의 국내 송환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베이징의 신문들은 사건을 보도했고, 신현상과 최석영의 일본영사관 인도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베이징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두 사람을 천진의 일본영사관에 인도했고, 두 사람은 1930년 7월 국내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국내로 송환된 그는 1930년 12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는 신현상과 최석영이 '현사회제도와 경제조직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아 항소했고, 그들은 결국 1931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3. 해방 후, 그리고 비참한 최후[편집]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한 그는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냈다. 하지만 "국토개발사업도 애국"이라며 아산에서 간척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다 1945년 8.15 광복 후 국내로 귀환한 김구의 비서실장을 맡았으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봉환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김구의 추천으로 조선민족청년단에 참여했으며, 반민특위 검찰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에게 피랍된 뒤 1950년 9월 대전형무소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북한군에게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현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