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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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형균
2. 중구(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신형균



1. 진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형균[편집]


파일:신형균.jpg
성명신형균(申亨均)
일본식 이름平田亨均
생몰1920년 1월 2일 ~ 1984년 7월 17일
출생지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 내촌리
사망지서울특별시
위패국립대전현충원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신형균은 1920년 1월 2일 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 내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경 서울 양정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심훈의 <상록수(常綠樹)>, 이기영의 장편소설 고향 등을 접하고 민족의식을 키운 그는 이듬해 2월 하순 동교의 동급생 서주원(徐周元) 등과 함께 이광수의 <흙>을 읽고 조선의 농촌과 농민의 어려움을 통분스럽게 여기고, 그 원인이 일제의 압정에 있다고 보고 교우 관계에 있던 동급생들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 동지회(同志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강경석(姜璟錫)·이완익(李完益)·최창규(崔昌圭)·김학조(金學祖)·김인석(金仁錫)·김상정(金相廷)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경성부(京城府) 통의정(通義町) 자택 등에서 서주원 등과 함께 조선독립의 실행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는데, 1941년 6월 30일 동지회 조직 사실이 드러나 모두 구속되었다.

1941년 7월 15일 인치되어 1942년 7월 7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육군형법(陸軍刑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0월 31일 출옥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4년 7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신형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중구(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신형균[편집]


성명신형균(申衡均)
생몰1872년 11월 24일 ~ 1927년 11월 21일
출생지경성부 의주통 2정목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의주로2가)
사망지경성부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신형균은 1872년 11월 24일 경성부 의주통 2정목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2일 500여 명의 시위대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성부 봉래정에서 의주통으로 행진할 때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는 시위대가 서대문 프랑스 영사관 앞에 도착하자, 군중 앞에 나아가 "조선독립을 꾀함은 바로 이때이다. 각자는 이를 위하여 신명(身命)을 버릴 것을 각오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며 시위군중을 독려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7년 11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신형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