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시노에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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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2대 파라오
아르시노에 2세
Arsinoe II


파일:아르시노에 2세.jpg

이름
아르시노에 2세
Ἀρσινόη | Arsinoë
출생
기원전 316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멤피스
사망
기원전 270년/268년 (향년 46-48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70/268년 (약 3-5년)
전임자
아르시노에 1세
후임자
베레니케 2세
부모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어머니 : 베레니케 1세
배우자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번째 여성 파라오이며, 형제와 결혼하여 제국을 공동 통치해 후대 여성 파라오들의 모델이 되었다.


2. 생애[편집]


고대 이집트의 멤피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베레니케 1세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 자매로 필로테아를 두었다. 그녀의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버지 라구스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공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어머니 베레니케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네 번째 아내로, 프톨레마이오스와 결혼하기 전에 필리포스라는 귀족과 결혼하여 키레네의 마가스를 낳았다. 아르시노에 2세는 기원전 300년 또는 299년경 디아도코이 중 한 사람이며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서부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리시마코스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필리포스를 낳았다. 리시마코스는 이오니아의 도시 에페수스를 아르시노에의 이름을 따서 '아르시노에아'로 개명했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리시마코스 왕과 아르시노에 왕비"가 백성들의 행운을 위해 호의를 보장한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비문은 기원전 290년에서 28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녀가 이 시기에 소아시아와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공식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리시마코스에게는 그녀 외에도 많은 부인이 있었지만, 비문에는 아르시노에 2세 외에 어떤 여자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르시노에 2세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보이오티아의 테베에 어머니의 상을 봉헌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는 후계자로 삼았던 장남 아가토클레스가 자신에게 반역을 꾀했다고 의심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민심을 잃어버렸다. 아르시노에 2세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남편을 충동질하여 아가토클레스를 죽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당시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하여 그리스로 진출하길 희망하고 있었던 셀레우코스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소아시아로 쳐들어갔고, 기원전 281년, 사르데스 근처에서 벌어진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전사시켰다. 아르시노에 2세는 그 직후 잔여 세력을 수습하여 아르시노에아에 자리잡고 소아시아 해안지대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군이 도시 외곽에 주둔하자, 시민들이 성문을 열었다. 아르시노에 2세는 누더기 옷을 입고 도시를 가까스로 빠져나갔고, 그녀의 여종은 왕복을 입고 궁궐에 그대로 있다가 셀레우코스 1세의 장군들 중 한 명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아르시노에 2세는 가족 및 용병대와 함께 칼키디아 반도의 카산드레아에 정착했다. 한편,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의 옛 영토를 모조리 장악한 뒤 트라키아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하던 중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안티파트로스의 딸 에우리디케의 장남으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후계다툼을 벌이다 패한 뒤 리시마코스에게 망명했다가 리시마코스가 망한 후 셀레우코스 1세에게 귀순했던 인물이다. 즉 그는 아르시노에 2세의 이복오빠에 해당한다. 그는 셀레우코스 1세를 죽인 뒤 셀레우코스의 군대를 자기 병사로 삼고,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서부 일대를 장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그녀의 자식들을 잘 대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고,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결혼식이 거행된 뒤 카산드레아에서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다.

그러나 케라우노스는 약속을 어기고 아르시노에 2세의 어린 두 아들을 죽였다. 그녀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만이 탈출하여 일리리아에 망명할 수 있었다. 아르시노에 2세는 도시에서 쫓겨나 사모트라케 섬에 숨었다. 그녀가 숨어 지내는 동안, 케라우노스는 몇 년간 마케도니아에서 왕노릇을 했지만 기원전 279년에서 277년 사이에 켈트족의 침략에 맞서다 전사했다. 이후 그녀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한 여러 경쟁자들이 마케도니아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점점 수세에 몰리자, 그녀는 장남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리시마코스의 딸 아르시노에 1세를 부인으로 두었으나, 리시마코스가 몰락한 뒤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기원전 275년 자신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로 아르시노에 1세를 콥토스로 추방했다. 이 조치가 아르시노에 2세가 돌아오기 전에 이뤄졌는지, 아니면 아르시노에 2세가 깊이 관여한 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기원전 273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자신의 동복누나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로 인해 '필라델포스(Philadelphus: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대 이집트에선 형제•자매 및 부모와 자녀의 결혼은 왕실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전통이었지만, 그리스인들에겐 무척 낯설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정적들은 이 일을 빌미삼아 그를 비난하였고, 시인 소타데스는 그의 결혼을 조롱했다가 암살당했다. 반면 궁중 시인들은 "제우스께서도 누나 헤라와 결혼하지 않았느냐?"라며 파라오를 옹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과 아르시노에 2세를 '테오이 아델포이(Theoi Adelphoi 형제 신)'의 현신으로 승격시켰으며, 또다른 누이 필로테라 역시 신으로 숭배받게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정부인 빌리슈테 역시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었다. 이후 후대 파라오들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선례를 따라 근친결혼을 이어갔다.

아르시노에 2세는 파라오 집권 후 자신을 숨겨준 사모트라케 섬에 감사의 의미로 신전을 봉헌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했다. 남편과 함께 시나이 강을 따라 나라의 국경을 시찰하기도 했고, 멘데스에 있는 중요한 신전들을 방문하였다. 기원전 272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아테네에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제안한 서한에는 그와 아르시노에 2세의 이름이 같이 들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새로 정착한 메타나 식민지의 주민들은 칼라우리아 섬에 포세이돈 신에게 헌정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아르시노에 필라델포스' 동상 2개를 세웠다. 학자들은 이와 비슷한 동상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세력권 곳곳에 세워졌으리라 추정한다.

파일:아르시노에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webp

아르시노에 2세가 정치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제작된 조각상 등 유물들은 그녀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동등한 통치자였음을 암시한다. 타니스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신전의 석회암 벽에는 두 파라오가 나일 강에서 서로를 똑바로 마주보는 모습을 연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의 이중 왕관(프셴트)을 쓴채 오른손에는 와즈셉터를 들고 왼손에는 번개를 들고 있으며, 그 위에는 "wśr-kȝ-n-Ramr--mnn" (아문의 사랑)이라는 상형문자가 적혔다. 아르시노에 2세의 위에는 " hernm.t-bb-nāw mrỉ.t-nār.w"(신이 사랑하는 왕과 마음을 합친 사람)이라는 상형문자가 적혔으며, 한 손에는 파피루스 대장을 들고, 다른 손에는 그녀의 불멸을 나타내는 안키 마크를 들고 있다. 여왕은 긴 칼라와 칼라를 쓰고, 긴 가발 위에 독수리 모자를 쓰고,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고안된 복합 왕관을 쓰고 있다.

또한 그녀의 초상이 담긴 금화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세에 발행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베레니케 1세는 앞면에, 그들의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아르시노에 2세는 뒷면에 등장하는데, 이는 라구스와 아르시노에에서 내려오는 왕조의 혈통을 나타낸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그녀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동격의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5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270년 또는 268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에 <코마 베레니스>를 작곡한 시인 칼리마코스는 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전 국민이 탄식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보름달 너머 북두칠성 아래 천국에 있는 자신의 처소로 향하는 그녀의 전신을 찬송하는 시를 지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르시노에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59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집트에서 추방되어 리키아에 있는 도시 텔메수스로 돌아가서 마케도니아 왕을 자칭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전 아내 아르시노에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프톨레마이오스 3세로 옹립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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