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메이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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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45년~44년, 옵티마테스파 장군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한 뒤 카이사르가 파견한 진압군을 상대로 아파메이아에서 항전한 공방전.

2. 상세[편집]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를 침략하여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던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2세를 상대로 젤라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동방을 떠나면서, 사촌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일련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동방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기원전 46년, 폼페이우스 휘하 장교였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티로스로 도피하여 조용히 지내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는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비밀리에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고, 수비대 병사들을 설득하려 했다.

군대 징집에 의심을 품은 섹스투스가 연유를 묻자, 그는 보스포라 왕국에 대항한 페르가몬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의 원정을 지원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라고 밝혀 의심을 피했다. 이후 충분한 병력이 모였다고 여기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섹스투스에게 격퇴되자,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했다는 위조된 편지를 병사들에게 뿌려 반란에 동참하게 한 뒤 섹스투스를 기어이 죽였다.

바수스는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고 섹스투스 휘하 군대 대부분을 인수했지만 아파메이아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간 장병들만은 가담하지 않았다. 바수스는 이들을 추격했지만, 그들은 킬리키아로 도주했다. 시리아로 돌아온 그는 아파메이아에 자리를 잡고 그 도시를 요새화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처음엔 2개 코호트만 이끌었지만 병력을 징발하고 노예도 모집해 총 2개 군단을 확보했다고 한다. 얼마 후 섹스투스의 부관 또는 새로 임명된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가 쳐들어와 아파메이아를 공략하려 했고, 섹스투스에 의해 유대 왕이 될 수 있었던 안티파르토스가 도왔다. 그러나 아랍 왕자 알칸도니오스와 파르티아 왕자 파코로스 1세가 바수스를 도우러 왔고, 베투스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기원전 45~44년 겨울, 파르티아군이 시리아로 철수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급파한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가 3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아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방비가 워낙 강력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비티니아 총독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크리스푸스는 3개 군단을 더 데려왔고, 로마군은 총 6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를 포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무르쿠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 '해방자'편에 섰지만,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명령에 따라 포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43년 봄, 모든 동부 속주에 대한 총독을 맡게 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하자,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는 그에게 군대를 넘겼다. 바수스의 2개 군단 중 하나도 카시우스 편으로 넘어갔지만, 바수스 본인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1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에서 계속 성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2번째 군단 마저 카시우스에게 가담했고, 바수스는 종적을 감췄다. 이리하여 카시우스는 동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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