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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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콘토스테파노스
(영어:Andronikos Komnenos Kontostephanos, 그리스어: Ἀνδρόνικος Κομνηνός Κοντοστέφανος)
출생
1132년 또는 1133년
사망
미상
직위
동로마 해군 총사령관
반란 대상
안드로니코스 1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반란자. 마누일 1세의 심복으로서 여러 원정에서 활약하였고, 마누일 사후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의 위험한 본성을 뒤늦게 눈치채고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편집]


동로마 해군 총사령관인 스테파노스 콘토스테파노스의 막내 아들이다. 스테파노스는 요안니스 2세 황제와 헝가리의 이리니 황후의 딸인 안나 콤니니와 요안니스 황제의 조카인 마누일 콘토스테파노스의 아들이었다. 안드로니코스에게는 역시 유명한 사령관이었던 두 형제 요안니스와 알렉시오스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이리니가 있었다. 그는 두카스 가문의 여식과 결혼한 것으로 전해지며, 네 아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원정에 동행했으며, 1149년 코르푸 포위전을 전개하다가 전사한 부친의 뒤를 이어 해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고,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크레타의 총독을 겸임했다. 1165년 헝가리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 지역 수비대를 물리치자, 마누일은 이를 보복하고자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전장에 갈 수 없어서, 안드로니코스에게 원정군을 맡겼다. 안드로니코스는 1167년 7월 8일 제문 요새 인근에서 헝가리군과 격돌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시르미온 전투) 헝가리는 시르미움 주변 일대와 보스니아, 달마티아, 그리고 크르카 강 남쪽 지역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인정했다.

1169년, 예루살렘 왕국과 연합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 원정을 이끌었다. 당시 동원된 동로마 함대는 230척에 달했다. 그는 처음엔 공성전을 열심히 지휘했지만, 예루살렘 측이 다미에타와 은밀히 거래를 주고받은 끝에 평화 협약을 일방적으로 맺자 배신감을 느꼈다. 게다가 보급이 잘 안 돼서 병사들이 굶주리자, 그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와중에 함선 절반이 폭풍을 만나 침몰하거나 해안가에 표류했다. 1171년 3월 12일, 마누일 1세는 제국과 자꾸 갈등을 빛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응징하기 위해 수도에 체류하는 모든 베네치아인을 억류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를 파견하여 달마티아의 여러 도시를 습격하여 약탈한 뒤 키오스 섬을 공략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150척의 함대를 이끌고 키오스 섬으로 향했고, 마침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던 베네치아 함대는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는 이들을 추격하여 낙오된 몇몇 함선들을 포획하거나 침몰시켰다.

1176년,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을 정복하기로 하고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룸 술탄국의 수도 코냐를 공략한 뒤 산악지대에 숨은 적을 격멸하려 했다. 그러나 1176년 9월 17일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협곡에 매복한 투르크군에 의해 전군이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당시 후위대를 이끌고 있었던 안드로니코스는 적의 역습을 격퇴한 뒤 본대와 합류하였고, 투르크군은 동로마군의 맹렬한 저항 때문에 섬멸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당시 동로마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가 이끄는 부대는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았다. 1177년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150척의 함대를 이끌었지만 아크레에 상륙한 뒤 예루살렘 왕국이 비협조로 나오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한 후 아들 알렉시오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이가 아직 어려서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가 섭정했다. 그녀는 라틴계 출신으로, 서방인들을 중용했다. 이것에 반감을 품은 그는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아나톨리아에서 봉기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그들이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는 본색을 드러내 경쟁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그는 위협을 느끼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와 함께 안드로니코스를 축출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앙겔로스는 도망쳤지만 그는 붙잡혔다. 이후 네 아들과 함께 실명형에 처해졌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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