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셰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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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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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옛 성당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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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성당 유적

1. 개요
2. 역사
2.1. 혼란기
2.2. 소아시아 최후의 보루
2.3. 근현대
3. 갤러리
3.1. 성 요한 바실리카 유적


1. 개요[편집]


Alaşehir

튀르키예 서부의 도시.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10km, 데니즐리에서 서북쪽으로 60km, 아이든우샤크아크히사르에서 각각 동북 / 서남 / 동남쪽으로 75km 떨어진 쿠주차이 (코가무스)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5만의 소도시지만 중세에는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빌라델비아였고, 세계 각지에 있는 필라델피아 지명의 유래가 될 정도로 번영하였다. 20세기 초까지는 소아시아의 주요 기독교 거점 중 하나였다.

시가지는 보즈다으 (트몰루스) 산과 게디즈 (헤르무스) 강의 알라셰히르 지류 사이에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한때 45개의 모스크와 여러 교회가 있었지만 튀르키예 독립 전쟁 중의 대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현재는 일대의 미네랄 온천과 건포도 용으로 쓰이는 설태너 청포도 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옛 교회 유적을 방문하려는 성지 순례객들이 종종 방문한다. 시가지 동북쪽에는 군사 기지가 있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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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성당 유적. 현재 건축물은 서기 600년 경에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189년 페르가몬 왕국에우메네스 2세가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인 필라델포스란 별명을 지닌 동생이자 후계자 아탈로스 2세 필라델포스를 기리며 세워진 도시로, 향후 필라델피아란 지명의 근원이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기에는 사르데스 관할의 도시였다. 서기 17년 대지진을 겪은 도시에 대해 티베리우스 황제는 면세 혜택을 주었고, 칼리굴라 황제 역시 재건을 도왔다.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에는 그의 가문명인 플라비아가 더해졌고, 카라칼라의 치세에는 황제 숭배가 행해지며 자체 주조된 동전에 신전 관리자란 의미인 네오코론이 새겨졌다. 한편 필라델피아 (빌라델비아)는 초기 기독교 거점 중 하나였고, 서기 1세기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에서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6번째로 언급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마나 (스미르나) 교회와 함께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되었고, 따라서 이후 개신교 교회들이 종종 필라델피아란 이름을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기 인근 에페소스사르데스가 쇠퇴하며 필라델피아는 일대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6세기 들어 '작은 아테네'라 불릴만큼 번영하였다. 다만 각종 다신교 축제와 신전이 남아있는 등 당시까지도 완전히 기독교화가 되지는 않았고, 이단으로 규정된 몬타누스파의 사도 암미아가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다. 서기 600년 경에는 돔을 지닌 성 요한 바실리카가 세워져 일부 잔존한다. 또한 성벽도 둘러졌으나 현재는 북벽 일부만 잔존한다. 만지케르트 전투 후 1074년과 1093-94년 튀르크 인들이 점령했으나 1098년 1차 십자군과 함께 동로마 군이 수복하였고, 이후 트라케시온 테마의 둑스 (총독)와 스트라토페다르크 (군관)가 상주하는 최전방 군사 거점이 되었다. 다만 12세기 말엽 제국이 쇠퇴하자 필라델피아는 종종 반란의 거점이 되었다.

2.1. 혼란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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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를 거점으로 자립한 테오도로스 마카파스가 현지에서 주조한 은화

1182년 5년전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의 승장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가 권신이자 제위를 노리던 5촌 당숙 안드로니코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필라델피아 부근에서 제국군을 격파했으나 곧 병사하였다. 1188년에는 현지 귀족 테오도로스 마카파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였고, 이에 이사키오스 2세가 남하하여 필라델피아를 포위했지만 마침 다가오던 3차 십자군이 급선무였기에 협상에 나서 테오도로스는 칭제를 관두는 대신 일대에 대한 자치권을 얻었다. 1193년 트라케시온 테마의 장군 바실리오스 바타치스에게 패하여 룸 셀주크에 망명했던 테오도로스는 4차 십자군의 혼란을 틈타 재차 필라델피아에서 거병하여 리디아 지역을 석권하였다. 더 나아가 동로마 제국을 복원하려 북상하던 그는1205년 3월 아드리미티움 전투에서 라틴 제국에게 패배하여 세력이 꺾였고, 곧이어 니케아 제국테오도로스 1세에게 필라델피아마저 상실한 후 포로 신세로 죽었다.

2.2. 소아시아 최후의 보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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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경 동로마 제국 강역. 고립된 필라델피아가 보인다

니케아 제국과 복원된 동로마 제국 하에 필라델피아는 재차 안정을 누렸고, 제국 내의 주요 가죽 제품 및 붉은 비단의 생산지로써 제노바 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등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4세기 들어 필라델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산하 리디아 대주교구의 중심이 되었고, 20세기 초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소아시아 19개 대주교구 중 하나였다. 필라델피아는 1337년 이래로 오스만 제국아나톨리아 베이국 등 튀르크 세력에 둘러싸여 수도와의 육상 연결이 끊겼음에도 여전히 명목상으로 동로마 령이었고, 로도스 기사단의 도움으로 일종의 중립 도시로 남았다.

전략적 / 무역 거점으로써 중시되던 필라델피아는 1370년대 동로마 내전 당시 요안니스 5세마누일 2세가 군사 원조를 대가로 오스만 측에 할양한다고 약속하여 본국으로부터도 버려졌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저항을 택하였고, 12년 간의 봉쇄 끝에 1390년 술탄 바예지트 1세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시 포위 진영에서는 오스만 측에 제후로써 참전한 요안니스 7세마누일 2세가 무력히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후 튀르키예식 지명인 알라셰히르로 명명된 도시는 1402년 앙카라 전투티무르에게 점령되었고, 그는 포로들의 시신으로 벽을 세웠다고 한다.

2.3. 근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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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셰히르 의회 (Alaşehir Kongresi)

오스만 시기 알라셰히르는 마니사에 기반한 사루한산작에 속한 중소 도시였고, 19세기 말엽 발칸 무슬림들이 정착하였다. 1917년 발칸 무슬림 집안에서는 후일 튀르키예 7대 대통령에 오르는 케난 에브렌도 있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기인 1919년 9월 알라셰히르에서는 튀르키예 대국민 의회의 지방 회의인 알라셰히르 의회가 열렸고, 대그리스 항전과 민병대의 정규군화 및 전사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 등을 결의하였다. 다만 이듬해 그리스군이 점령했다가 1922년 튀르키예군이 수복했는데, 그 과정에서 화재가 벌어져 3천여명이 사망하고 시가지 70%가 전소되었다. 이로써 옛 건물 상당수가 소실되어 그 역사에 비해 남은 유적이 적은 편인 것이다. 이듬해에는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계 주민들이 떠났고, 그들은 아테네 외곽에 네아 (new) 필라델피아를 세웠다. 이로써 인구가 크게 줄어 소도시로 전락하였고, 1969년에는 규모 6.7의 지진이 발생하여 53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3.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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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흐 시난 자미 (모스크) & 튀르베시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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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슐루 한

3.1. 성 요한 바실리카 유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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