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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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스만 제국 국장.svg 오스만 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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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오스만국
دَوْلَتِ عَلِيّهٔ عُثمَانِیّه
Devlet-i Aliyye-i Osmâniyye[1]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파일:오스만 제국 국장.svg
국기[2]
국장[3][4]

1683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최대영토.
دولت ابد مدت
Devlet-i Ebed Müddet
불멸의 나라

ممالكت مهراسا
Memālik-i Mahrūse
잘 보호받는 땅

مَمْلَكَةت رُّومُ / دیارت رُّومُ / اقليمت رُّومُ
Memleket-i Rûm / Diyâr-i Rûm / iklîm-i Rûm
로마국, 로마의 땅[5]
1299년 ~ 1922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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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OttomanEmpireMain.png
파일:c.prox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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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서아시아, 동유럽, 남유럽, 북아프리카
수도
쇠위트 (1299~1335)[7]
부르사 (1335~1453)
에디르네 (1363?~1453)[8]
코스탄티니예 (1453~1922)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299~1876), (1878~1908), (1920~1922)
입헌군주제 (1876~1878), (1908~1920)
인구
(1800년)24,000,000명[9]
(1900년)25,706,300명(비공식)[10]
(1907년)27,800,000명[11]
(1914년)16,128,361명[12]
국가 원수
베이 (1299~1383)[13]
술탄 (1383~1922)
파디샤(황제) (1453~1922)[14]
언어
오스만어 (공용어)[15]
민족
(현대의) 튀르키예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슬라브인, 알바니아인, 루마니아인 외 다수[16]
종교
이슬람 수니파, 정교회, 유대교[17]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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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년 건국
1302년 바페우스 전투
1326년 부르사 점령
1354년 갈리폴리 점령 (유럽 진출)
1389년 코소보 전투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1402년 앙카라 전투 (이 시기 오스만은 티무르 제국의 반식민지가 됨)
1444년 바르나 전투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514년 찰디란 전투
1517년 이집트 정복, 칼리파 위 획득[1]
1526년 모하치 전투, 헝가리 정복
1529년 제1차 빈 공방전
1534년 프레베자 해전
1571년 레판토 해전
1672년 포돌리아[2] 점령, 최대 판도 구축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
1743-1746년 오스만 페르시아 전쟁
1774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1827년 나바리노 해전
1839년 탄지마트 개혁
1853-1856년 크림 전쟁
1876년 미드하트 헌법 제정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
1908년 2차 헌법 제정
1912-1913년 발칸 전쟁
1915-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 갈리폴리 전투
1919-1923년 터키 독립전쟁
1922년 제국 멸망
}}}
통화
악체
쿠루시
리라#s-1[18]
면적
5,400,000km² (1683년)
1,700,000km² (1914년)
성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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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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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명
4. 국력
4.1. 강역
4.2. 인구
5. 외교
6. 군사
6.1. 보병
6.2. 기병
6.3. 기타
6.4. 항공 전력
6.5. 보급
6.6. 상인
6.7. 쇠퇴했는가?
7. 경제
7.1. 유럽과의 비교
8. 문화
8.2. 복식
8.2.1. 서민층
8.2.2. 귀족층
9. 행정 구역
10. 세금 제도
11. 종교 국가인가 아닌가: 오스만 제국의 종교와 국가 이데올로기
12. 튀르크인의 나라?
13. 평가
15. 역대 군주 목록
16. 대중매체에서
16.1. 창작물에서 모티브를 딴 것들



1. 개요[편집]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발칸 반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ān Gāzi)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였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룸 셀주크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으로는 오스트리아폴란드, 서로는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는, 전 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보수적 성격으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한데다가 무능한 황제까지 배출되어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전파가 늦어진 탓에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위세가 수축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악수를 두고 협상국에 패배하였다.[19]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에 뜻에 의해 갈라졌다. 튀르크 전체가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할 뻔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 기사회생하여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20] 1922년 11월 1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제국의 종교는 이슬람이었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기에, 이슬람을 국교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실제로, 제국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한 시기는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이 처음으로 제국의 존속기간(1299~1922)을 따져보면 623년 역사 중 46년밖에 안 된다.


2. 국명[편집]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왕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중세 라틴어식 표현인 오토마누스(Ottomanus)에서 유래한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다. 터키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나 오스만 튀르크 둘 다 잘못된 표현이며, 오스만 제국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튀르크(Türk)라는 말은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있었지만 튀르크어를 모어로 하는 집단이 아니라, 척박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민들이나 유목민 부류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다. 가난뱅이, 시골뜨기처럼 좋지 않은 뉘앙스의 말이었기 때문에 남을 욕할 때나 쓰였고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튀르크를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도 신민들도 투르크라는 말을 썼는데, 이 경우에는 민족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그냥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21] 예컨대 그리스 혈통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을 투르키(Τούρκοι)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발칸 지역의 일부 국가들에는 무슬림을 싸잡아 투르크, 터키 놈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남아 있다.

튀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민족주의 물결에 따른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수많은 종족들을 지배했는데, 이 때의 제국은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 불던 내셔널리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런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의 국력 자체가 쇠퇴하여 많은 영토를 유럽 열강에 빼앗기면서 제국 내에서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터키어)를 쓰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의 인구 비중이 전례 없이 커지게 되었다. 이 지역 패권국가로서의 선배 격인 동로마제국이 쪼그라들면서 안 그래도 높던 제국 내 정교도 그리스어 사용자의 상대적 비중이 더욱 올라가서, 말기에는 사실상 그리스 민족국가나 마찬가지가 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거의 같은 현상이다. 여하튼 이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재발견된 말이 바로 튀르크이다.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되고, 그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튀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튀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신민들을 가리킬 때 쓴 말은 오스만인(Osmanlı)이었다. 이 말은 오스만 제국이 소규모 군장국가이던 시절 오스만 가문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던 말인데, 제국이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나 군인 등 제국 지배층과 식자층을 주로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바예지드 1세룸 셀주크에서 분열된 국가들을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룸 술탄(رُّومُ سلطان)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룸 카이사르(قیصر روم,‎ Kaysar-i Rûm)를 자칭하면서, 오스만 제국 전기에는 ‘로마국(مَمْلَكَةت رُّومُ, Memleket-i Rûm, دیارت رُّومُ, Diyâr-i Rûm, اقليمت رُّومُ iklîm-i Rûm)라는 국호도 사용되었으며,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던 동로마 고지의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역의 지배층과 식자층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문명,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22] 그들은 또 로마 지방(동로마 고지)에 산다는 의미에서 로마인(Rûmi)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로마 계승 의식과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바예지드 2세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각각 쇠퇴하고 점차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회 신민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굳어 그리스 독립 이후에는 확실하게 후자로 의미가 고착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흐메트 1세메흐메트 4세는 종종 로마의 황제[23]를 자칭했다. 오스만인들에게 있어 사파비 제국을 비롯한 동쪽의 외국(عجم, Acam)과 대비되는 내지는 로마(Rûmi)였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 바깥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나 민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아나톨리아, 룸(Ruhm, Rum) 등으로 불렀다. 제국 말기에 튀르크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은 튀르크라는 정체성이 없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민족들도 범튀르크주의와 투란주의가 유입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을 튀르크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튀르크 민족의 이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 잘 몰랐고, 오스만 제국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 '투르크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정식 국호인 오스만을 잘 쓰지 않고 그냥 투르크 제국(Imperium Turcicum, Imperium Turcarum), 터키(Turchia) 등을 훨씬 많이 썼다. 오스만 투르크라는 표현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기존의 관습적 표현인 투르크에 원래 국호인 오스만을 덧붙여 만든 잘못된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엔 그냥 투르크나 터키라고 불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자 오늘날 터키(터키 공화국)가 아닌 옛날 터키(오스만 제국)를 가리키기 위해 투르크, 터키 앞에 오스만을 덧붙인 것이다. 21세기 들어 용어를 엄밀하게 따지는 학술용어로서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일반인들의 글에서는 한국이든 서구권이든 오래된 습관이 잘 바뀌지 않아서 아직까지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s)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스만 제국/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국력[편집]


역대 이슬람 제국[24] 중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25] 강력한 제국이었으며[26] 유럽 중부·동부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끼게 해 준 단 뿐인 제국인 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멋진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기도 하다. 유럽사에서 악의 축이나 마왕 같은 이미지로서, 서로 전투를 벌이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이 상대라면 신성 동맹등 기독교적 명분 아래 한 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는 일도 빈번했다.[27] 유럽 국가뿐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고 부분/전면적으로 튀르크계 국가이기까지 한 카라만 베이국, 백양 왕조, 사파비 제국, 맘루크 왕조도 다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을 정도다. 19세기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세계의 공공의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래 존속한 제국 중 하나인데 600년 넘게 존속하였다. 웬만한 이슬람 제국은 단명하는 사례가 많지만 오스만 제국은 600년이나 갔다.[28] 게다가 적어도 부르사, 에디르네 초기 양대 수도 점령 이전까진 거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후로는 몇몇 술탄 개인이 문약한 성격이었거나 술탄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황제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제국들 중 독보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황제권을 휘두른 국가이다. 동시대 사파비 제국은 훨씬 일찍 18세기 초반, 그것도 내부 권력 구조의 취약함이란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방 토후였던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무굴 제국 또한 알람기르 1세 치세의 과다한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반란을 틀어막지 못한 채 18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델리 일대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식물 정권으로 마지막 한 세기를 보낸 걸 보면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끝에서 네 번째인 압뒬하미트 2세(1876~1909년 재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 그대로 전제 권력을 유지했으니 이슬람 제국 국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근대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 집권 전제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허나 오스만 제국의 장수에는 운빨도 크게 작용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연달아 터지지 않았다면, 혹은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팽창을 막고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았다면 18세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이스탄불에 깃발을 꽂거나 발칸반도를 분할 점령했으리라는 것에는 학자들의 이견이 없다.(Sicker 2001)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여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상당 부분 부정하고 세워졌기에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더라도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당장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즘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데다 황제가 곧 칼리파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지만[29]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의 관계는 조선, 대한제국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하다.


4.1. 강역[편집]




▲ 전성기 지도
▲ 쇠퇴기(후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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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할지
봉신국 및 자치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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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유럽
    • 우안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 1669~1699)
    • 크림 칸국(Khannate of Crimea, 1478~1774)
    • 라구사 공화국(Ragusa, 1458-1808)
    • 조지아계 소국(Georgian Principalities)[2]
      • 이메레티 왕국(1555~1804)
      • 압하지야 공국(1555-1810)
      • 사메그렐로[1] 공국(1557~1803)
      • 구리아 공국(1614~1810)
    • 다뉴브 이북
      • 중부 헝가리 공국(Central Hungary[3], 1682~1685)
      • 트란실바니아 공국(Transylvania, 1526~1692)
      • 왈라키아 공국(Wallachia, 1417~1859)
      • 몰도바 공국(Moldavia, 1514~1859)
  • 아프리카
    • 알제리(Province of Algiers[4], 1515~1830)
    • 튀니지(Province of Tunis, 1574~1881)
    • 트리폴리타니아(Province of Tripoli, 1551~1911)
  • 아시아
  • 메카 샤리프국(Sharifate of Mecca, 1517~1803[5][6])


1683년 이전까지 상실한 영토 (아제르바이잔, 서부 이란, 걸프 북부[30], 예멘[31], 에리트레아)
1683년 이전까지 상실한 봉신국 (데르벤트, 후제스탄)

전성기 시절에는 튀르키예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 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32][33], 서아시아[34], 캅카스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소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라는 묘사로 종종 회자된다.[35]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절정에 이른 16세기 후반~17세기 초중반에는 북쪽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저 동쪽 멀리 인도네시아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무스카트를 잠시 정복하였고 이후 1650년에 건국된 무스카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의 주요 속국중 하나였다. 그리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을 지원해 에티오피아를 멸망시킬 뻔 하기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스페인 제국 내부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인들에게도 미쳤다. 스페인 제국은 항상 모리스코 공동체에 미치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우려하였고 이는 모리스코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결국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였다. 1522년 로도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수시로 이루어 졌으며 몰타 공방전에서 구호기사단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시들시들해진 19세기에도 칼리프국이라는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지 청나라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야쿱 벡이 오스만 제국과 수교하며 에미르로 인정받고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하였다.

또한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온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36], 비슷한 시기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멸망직전까지 몰린 이후 청야전술같은 극단적인 방어에 급급할 정도로 오스만 제국에게 밀리는 형세였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지 못했던 모로코는 1545년 술탄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모로코의 술탄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다.[37]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슬람 토호국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영문 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


4.2. 인구[편집]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전성기가 시작되는 1500년대의 인구가 1,100만~1,500만명이었으며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 직전 제국의 최대 판도를 자랑할 당시의 인구가 대략 3,00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대 중국 및 인도는 이미 1억을 넘는 수준이라 비교가 안 되고,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400만명 정도고 오스만과 동시기 프랑스 인구가 2,000만명을 넘었다.[38]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반면에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다. 그나마 3천만 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인구상으로 최정점을 찍은 시기인 1856년에 고작 3,500만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000만명도 안 되는 1,852만명에 불과했다. 동로마가 갓 분열되었을때가 3,000만명 정도의 인구로 추정되는데, 오스만의 영토는 분열직후 동로마의 영토에서 마그레브와 메소포타미아를 더한 영토인데다 1000년 넘게 후대의 제국인걸 감안하면 정말 영토대비 인구는 참 적은 국가라 할 수 있다.

참고로 1906년 조사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다. 문제는 이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던 열강인 이탈리아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다. 즉, 20세기에 와서는 인구에서 유럽 전체도 아니라, 유럽 열강의 한 국가 보다도 열세였던 것. 오스만이 망하고 들어선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도 인구가 고작 1,463만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과 한바탕 전쟁을 벌인 당시 그리스 인구가 약 750만 정도로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그리스계가 200만 명 정도이니 그리스 입장에선 해볼 만하다고 느낀 셈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인 사막화로 인구부양력이 오히려 감소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인구가 오늘날까지 유럽보다 적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인구와 농토가 지속해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 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39]


5. 외교[편집]


오스만 제국의 외교방침은 전근대시대 중화제국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서는 칼리파의 권위를 이용한 종속 혹은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했으며, 유럽에 대해서는 과거 동로마 제국의 대유럽 외교정책을 담습하여 외국인 조계지와 교역권한을 부여하는 증서를 부여해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제노바를 시작으로 현대 터키어로는 Kapitülasyon(카피튈라시용),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Ahidnâme(아히트나메)라고 불린 특권증서를 부여했는데, 이것은 해당 국적의 상인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의 한정된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즘미(zımmi, 비무슬림)상인의 중개[40]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상품을 교역할 수 있는 권한, 협정을 맺은 국가가 오스만 제국에 대사를 파견할 권리, 외국인의 안전보호 보장과 조계지내 군사징집, 지방세, 거주지 수색의 면제, 조계지 내 치외법권을 포함한다. 이 증서는 상인 개인에게 부여되기도 했으나, 국가를 대상으로도 부여되었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 시절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1535년경 프랑스 국민 전체에게 해당 증서를 부여했으며, 이후 대유럽교역 활성화를 목적으로 여기저기에 발급하기도 했다. 이 카피튈라시용을 통한 외교관계는 오스만의 시각에서는 제국을 상대국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술탄들은 이를 제국의 관대함을 보이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유럽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오스만이 제국이 외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셀림 3세시기인 1793년 런던에 대사관을 개설한 이후의 일이다.

유럽 국가들이 파견하는 상주대사는 포로이자 인질로 취급되었고 오스만 조정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분쟁이 벌어지면 투옥당하는 신세였다. 카피튈라시용에는 대사에 대한 처우도 포함되었지만 18세기까지 유럽의 국제법은 오스만에서 전혀 준수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스파이 혐의를 받아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갤리선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술탄의 심기를 거스른 사신의 목이 뎅겅뎅겅 잘리는 중동에서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유럽에서는 야만적이라고 인식되었고 오스만의 대외관계와 이미지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더 큰 문제는 외교관의 부재로 인해 오스만이 외교전과 정보전에서 계속 뒤처졌다는 것이다.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오스만에는 서유럽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관료가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주선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했을 지경이었지만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라는 것을 절감한 18세기부터 전문 외교관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개종한 기독교도였다. 18세기 오스만 정부 내 외교관의 비중과 위상은 계속 상승하며 마침내 18세기 말에는 상주대사를 파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상주대사의 파견은 오스만 제국이 비로소 유럽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국보다 우위였기 때문에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넌센스다.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였으며 오스만은 이를 목표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외교관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이 유럽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는 항구적인 평화 운운이 자주 나오는데 불신자와의 항구적인 평화는 모든 국가를 잠정적인 정복대상으로 봤던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오스만 조정이 유럽과의 국력 격차를 인식하고 전쟁을 회피하려 했다는 증거다.[41] 18세기 오스만은 유럽 열강들에 외교를 맡기다시피 했고 이들 국가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압박해서 자국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주선할 때마다 특혜를 퍼부었다.[42] 오스만의 상주대사들의 또다른 임무는 파견국의 선진문물을 기록하고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서구화 개혁은 상주대사들의 보고서를 많이 참조했다.

이미 15세기부터 외국자본은 오스만 경제를 잠식했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경제가 외국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면직물의 50-70%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43] 1838년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에 들면서 밀레트 제도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주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카피튈라시용을 발급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 베네치아 공화국 (1454)
  • 프랑스 왕국 (1535, 1673, 1740)
  • 잉글랜드 왕국 (1579, 1675)
  •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1809)
  • 네덜란드 공화국 (1612, 1634, 1680)
  • 오스트리아 공국 (1615?)
  • 러시아 제국 (1711, 1783)
  • 스웨덴 왕국 (1737)
  • 사르데냐 왕국 (1740, 1825)
  • 덴마크 왕국 (1746년 또는 1756년)
  • 프로이센 왕국 (1761)
  • 스페인 왕국 (1782)
  • 미합중국 (1830)
  • 벨기에 왕국 (1838)
  • 한자 동맹 (1839)
  • 포르투갈 왕국 (1843)
  • 그리스 왕국 (1854년 또는 1855년)
  • 브라질 제국 (1858)
  • 바이에른 왕국 (1870)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계기는 크림 전쟁이후 1856년에 체결된 파리 조약 이후이다. 파리 조약에는 러시아에 대항해 당시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로 구성된 유럽국가협의회에 오스만 제국을 포함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근대식 주권국가 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있다. 또한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유럽국가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기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그 계승국인 터키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이기도하다.

카피튈라시옹은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1914년에 무효화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1923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6. 군사[편집]


당시의 오스만의 예니체리를 현대에 재현한 모습.

오스만 제국군의 역사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뉜다. 1300년대 초부터 점차 영토를 확장해나가며 1453년에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을 1단계로 치며, 메흐메트 2세가 본격적으로 통치한 1451년부터 지트바토로크 조약이 체결된 1606년까지가 2단계, 이후 1606년부터 술탄이 직접 지나치게 비대해진 예니체리를 강제 해체시켜버린 1826년까지를 3단계, 급격한 군대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1826년부터 1858년까지가 4단계, 그리고 마침내 불안정한 정세로 나날이 국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쇠퇴해갔던 1861년[44]부터 1919년에 체결되어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한 무드로스 종전협약까지를 마지막 5단계로 치는 것이다.

오스만 군대 역사의 1단계인 12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건국 바로 직후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이었으며, 군장이나 무기도 통일되지 않았기에 정규병이라기보다는 약탈 집단에 조금 더 가까웠다. 이들을 1200년대 후반에 오스만 1세가 하나의 지휘계통 하에 통합하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점차 체계를 갖춘 병졸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시기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기병 위주의 군대로, 활이나 투창 등을 사용하였으며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복한 곳의 토지들을 약탈하거나 아예 땅을 분배받는 형식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 약탈이 끝난 것은 오르한 1세가 병사들에게 정식으로 봉급을 주는 것을 시작하고, 대대적으로 서구나 페르시아의 용병들을 고용했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45] 일반 보병들은 '야야'(yaya)라고 불렀으며, 보조병 성격으로 기타 잡일들도 도맡아 하던 경보병들은 '뮈셀렘'(müsellem)이라고 불렀다. 14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초기 형태의 총을 구비한 총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피야데 톱추'(piyade topçu)라고 부르는 총보병이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들 중 처음으로 총기를 전격적으로 군대에 도입한 국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워낙 총기를 이른 시기에 도입했기에 당대의 오스만 군대는 동시대의 페르시아, 혹은 비잔틴, 서양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이나 인도의 무굴 제국 등이 앞다투어 총기를 도입할 정도였다. 이들은 전장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여 바예지드 1세 재위기에 쇠락해가는 동로마의 군대를 끝장내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시대에는 개종한 무슬림들로 만들어진 예니체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세계의 첫 상비 총보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의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군사 개혁을 실시하였고, 이 시기가 오스만 군대의 2단계이다. 술탄은 개종한 그리스인과 동로마인들을 모아 만든 데브시르메 제도를 개정하여 본격적인 상비군을 편성하는 등 군대를 편제를 확립하였으며, 군대를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중앙군을 '카프쿨루', 지방군을 '에얄레트'라고 불렀다. 또한 화기에도 신경을 써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큰 공헌을 한 대포 '다르다넬스 대포'를 확대 생산하였으며, 이 덕에 오스만 제국은 1800년대까지도 이 대포를 상시 운용하기도 했다. 1465년에는 본격적인 머스켓병들이 등장하였으며, 16세기에는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사용하여 머스켓 총을 생산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발전된 화기를 군대에 새로이 도입했던 덕분에, 오스만 군대는 몇 백년 간 서구 군대에 비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터키와 소아시아를 여행한 중국 명나라 여행가 자오시젠이 '터키의 총기가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다. 이같은 화력의 우위, 그리고 예니체리 부대의 강력한 조직력과 지휘능력 등이 합쳐지면서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유럽의 웬만한 군대들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군악대 역시 16세기의 예니체리 부대에서 '메흐테르'라고 이름으로 처음으로 창설된 것이다.

3단계에 해당하는 1606년부터 1826년까지의 핵심 주제는 기존의 군대였던 예니체리들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600년대까지만 해도 예니체리는 여전히 제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으며, 조직력도 강했고 여전히 군의 기강도 어느 정도는 살아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예니체리들이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술탄마저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했고, 군대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예니체리들은 군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특권층이 되어 향락에 빠져들었고, 이전의 군사적 규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당대의 술탄들도 할 수 있는 선에서 프랑스 장교들을 영입하여 프랑스식 군사 교육을 들여오고, 포병 창설, 보스포루스 해협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군사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미 근본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예니체리들의 일소 없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야심차게 추진한 해군 창설과 새로운 병종 등은 기존의 군대에 제대로 흡수되기는커녕 배척당하는 게 흔했고, 기껏 영입해온 프랑스 장교들은 군조직 내에서 냉대를 받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서구의 근대식 군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벤치마킹했던 셀림 3세 시기에 유럽식 군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신군이 창설되는 등 조금이나마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소규모의 제대로 훈련된 근대식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식 군대는 1만 명이 채 되지 못했고, 동시대 유럽 열강들이 몇십만 명에 달하는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게다가 셀림 3세가 그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에 의해 1808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면서 군대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를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 넘기다가 결국 예니체리 철폐를 강행, 성공하였고, 이 시기부터를 오스만 제국군 역사의 4단계로 본다. 한편 먼 남쪽에 있던 이집트 지역에서는 무함마드 알리 파샤 총독이 사실상 제국에 반기를 들고 자치적으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급박해진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가 사라진 잔재 위에 대대적인 근대식 군대 창설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본격적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1861년부터를 오스만 제국군의 마지막 시기인 5단계로 치며,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타 유럽 열강들에 비하여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주로 발칸 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활약하였으며, 프랑스식 군사교육체계를 더욱 효율적인 독일식 군사교육체계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술탄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방비를 삭감하고,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제대로 된 훈련과 지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군사들의 기강이 끝없이 해이한데다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탓에 제국 자체가 붕괴하면서 오스만 제국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6.1. 보병[편집]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 보병은 크게 정예군인 예니체리들과 경보병인 '야야(Yaya)'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이며 실제로도 오스만 군대의 핵심 전력이 바로 예니체리였는데, 술탄 무라트 1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도 노예들을 모아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에는 오직 기독교도 가정 출신의 매우 어린 아이들만을 따로 선별하여 혹독한 훈련을 거쳐 술탄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게 세뇌시켰으며, 나중에는 기독교도 부모들도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제 자식들을 예니체리에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예니체리들은 이후 술탄의 친위대나 호위 등의 역할을 맡아 엄청난 효율과 전투력을 보이면서 제국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마치 제 아버지와 같이 여기도록 교육받았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졌기에 자신과 같은 예니체리들을 같은 가족으로 여겼다. 또한 '카프쿨루' 라고 하여 '문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술탄과 가장 가까운 세력집단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예니체리들은 크게 3개의 종류로 분류했는데, 베일릭 예니체리, 세크반 예니체리, 제마아트 예니체리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베일릭 예니체리는 술탄의 직속부대이자 최정예 군대였으며, 유럽 열강 등 주요 적들과 인접했던 발칸 반도의 영토들과 수도를 방비했다. 한편 제마아트 예니체리는 봉급을 받고 싸우는 상비군 집단으로,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의 중요 거점들을 방비했으며 주로 전방의 도시들에 배치되어 있었다. 베일릭 예니체리가 상대적으로 소규모 최정예였다면, 수가 더 많았던 세크반 예니체리들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 주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일릭 예니체리들은 61개의 오르타(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마아트 예니체리들은 총 101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크반 예니체리들의 역할 역시 제마아트 예니체리들과 동일하였으며, 주로 경보병으로 적을 추격하고 섬멸, 전리품을 챙기는 등의 활동을 했다. 주로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대적인 훈련도는 베일릭 예니체리나 제마아트 예니체리에 비하여 떨어졌다. 총 34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니체리 훈련병들을 따로 '아제미 오을란'이라고 불렀으며, 궁정 경비 등을 맡았으며 34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은 편제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짰으며, 1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를 '불룩스 바시스', 1,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고급 장교를 '셰샤야', 예니체리의 총사령관을 '아가'라고 불렀다.

예니체리들은 초기에는 오직 기독교에서 개종한 노예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며 완전히 술탄에게 종속된 말그대로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점차 공을 많이 세우면서 제국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권력을 잡으면서 이같은 제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가게 된다. 게다가 '피정복자들이 제대로 출세할 수 있는' 정말 몇 안되는 방법이기도 했기에 시간이 흐르자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기독교도 가정에서 자식들을 예니체리에 보낼 정도였다. 또한 1500년대 후반에는 개종한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일반적인 무슬림들도 예니체리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15세기 이후의 예니체리는 아예 토종 무슬림들로만 이루어진 완벽한 이슬람 군대로 변모한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이 입고 있던 군복은 오직 예니체리들만을 위해 제작된 특별 군복이었다. 정예군은 황색 상의를 걸치고 다녔으며, 황실 경비대는 붉은색으로 된 로브를 걸쳤고 일반 예니체리들은 그냥 황색과 붉은색을 섞어 놓은 튜닉 비슷한 군복을 입고 다녔다. 한편 군화의 색으로도 계급을 구분할 수 있었는데, 고급 장교들은 붉은색 군화를, 일반 병사들은 검은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수녀처럼 하얀 천을 머리 뒤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니 모양의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뵈르크'라고 부르며, 전장에서 술탄이 자신의 로브 소매를 잘라준 것을 머리에 묶고 다녔던 일화를 배경으로 인하여 쓰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도 굉장히 독특했는데, 정수리만 남기고 아예 싹 밀어버렸다. 이유는 적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참수한 후에 머리를 잡기 편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염도 일반 무슬림과는 다르게 콧수염만을 기를 수 있었는데, 이는 예니체리가 근본적으로 오직 술탄에게만 종속된 노예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 징표였다.[46]


6.2. 기병[편집]



오스만 기병의 경우에는 6가지의 종류로 나누었다.[47] 가장 먼저 실라흐타르(Silahdar)가 있었으며, 이들은 실라흐타르 아아(Silahdar Agha)가 지휘하였으며 술탄을 가장 근거리에서 모시는 최정예 부대였다. 오직 자살 임무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이들만이 가까스로 이 실라흐타르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술탄의 최정예병답게 받는 혜택도 엄청났다. 이때문에 한 예니체리 부대 안에서 실라흐타르 입단자가 나오면 주변의 모든 예니체리들이 그를 질투했을 정도라고 한다. 후대에 가면 점점 권력층으로서의 면모가 강해지면서, 제국의 수상이나 최고위 궁정 관료들이 속한 계급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한편 두 번째 기병 부대가 바로 '시파히(Sipahi)'로, 완전무장을 한 중기병 병종이었으며 사실상 오스만 기병의 중추였다. 이때문에 오스만의 기병 자체를 두고 아예 시파히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규모도 가장 컸다. 이들 중 실력이 좋은 자들은 '카프쿨루 시파히'라고 해서 궁정을 경비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술탄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지방에 영지를 가진 자들을 '티마를루 시파히'라고 따로 불렀으며, 이들 중 발칸 반도에 봉지를 받은 자를 '루멜리아 시파히', 아나톨리아 쪽에 봉지를 받은 이를 '아나톨리아 시파히'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자 봉지의 영향을 받아 루멜리아 시파히의 경우 체인메일이나 투창 등 유럽식 기사와 비슷한 무장을 한 반면, 아나톨리 시파히들은 터키식 검이나 둥근 방패들을 주로 활용하기도 했다. 다만 총기가 대대적으로 활약하면서 갑옷의 중요성이 떨어진 17세기부터는 둘다 갑옷을 입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자연스레 예니체리 부대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서로 간에 대립했고, 나중에는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들을 학살할 때에 그의 편에 서서 예니체리를 상대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대신 군력을 포기하고 대신 술탄이 창설한 신식 군대에 자연스레 편입되는 방식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마지막이 '아큰즈(Akıncı)[48]'가 있는데, 오스만 제국 초기에만 약탈이나 공급을 담당하는 경기병 겸 야전병이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제국이 안정되고 더이상 약탈보다 안정적 지배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자연스레 시파히에 밀려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6.3. 기타[편집]



현재 전통적인 오스만 제국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주력부대인 예니체리시파히들이지만, 그 외에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군 부대들을 따로 운영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포병부대인 '톱추(Topçu)'가 있었으며, 이들은 1400년대 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초기에는 주로 기독교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코소보 전투나 바그다드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아예 따로 부대가 창설되어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제베지(Cebeci)'라고 하여 소수의 무기 제작과 관리를 담당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는데, 그 수가 다른 부대들에 비하여 극도로 적은 편이어서 1574년 기준으로도 62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에는 병기와 화포들을 전장까지 안전하게 운송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평화시에는 주로 무기고에서 근무하면서 무기 제작이나 신무기 개발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다. 비슷한 부대로 '훔바라즈(Humbaracı)'가 있었는데, 이들은 특히 화포들을 중심으로 관리하는 부대이다. 16세기에 대대적으로 창설되었으며, 이후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들을 쓸어버릴 때에 술탄의 편에서 큰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대포를 끄는 마차를 담당했던 부대인 '톱아바라즈', 다양한 공작활동들을 수행했던 부대인 '라음즈' 등도 있었다.

의무병의 경우, 오스만 제국에서는 크림전쟁 이후 서구식 의료체계가 오스만에 도입되면서 서구식 의무병력이 양성되었다. 현재 적신월의 상징인 빨간색 초승달 문양은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인도주의 단체인 오스만 적신월 뿐만 아니라 군의 의무병력들도 사용했다. 군의 의무병력들은 남성들이었지만 발칸전쟁제1차 세계대전 시기 부터 여성 간호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1차대전 초창기에는 독일 등 동맹국 간호사들의 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추후 자체적인 간호사가 적신월사 소속등으로 활동하며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터키 독립전쟁에서도 구호 활동을 펼친다.


6.4. 항공 전력 [편집]


오스만 항공분대의 라운델
해군의 일부 항공기에 쓰인 표식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를 보유한 군대를 창설하여 운영한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 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후 이를 관람한 오스만 정부는 비행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0년에 유럽으로 항공후보생들을 파견, 조종술과 비행기 관련 기술들을 배워오도록 시켰으나,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1년 만에 조기귀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대의 창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마흐무트 셰브케트 파샤의 주도 하에 끊임없이 유럽에서 기술을 배워오도록 후보생들을 파견하였으며, 1912년 2월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비행기술 과정을 수료해 온 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군용 비행기를 몰수있는 조종사와 기술자들을 양성하고자한 새로운 군사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1912년 말에는 15대의 비행기를 운용했다고 했으며, 당시 오스만 정부 측에서는 이런 새로운 부대의 이름을 오스만 항공분대(Ottoman Aviation Squadrons)라고 붙였고, 이들은 주로 육군과 해군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항공분대가 첫 선을 보인 때는 그리스, 알바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오스만의 폭정에 반발하여 대대적으로 발칸 전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오스만 항공분대는 비행기 조종과 정비에 미숙했고, 전쟁 도중 상당수의 비행기들을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이 전쟁을 계기로 비행사들이 본격적인 경험을 쌓았고, 전쟁 후반부에는 제대로 된 엘리트 조종사들도 등장하면서 발칸 전쟁 이후의 오스만 항공분대는 제대로 된 근대식 항공대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기에는 몇 십여대에 달하는 군용기를 독자적으로 운용하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 제국의 항공대 장교들에게 교육을 받는 등 질적 향상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결국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항공분대는 해체되었고, 전쟁 직후의 오스만 항공분대는 약 80여대의 비행기와 100여 명의 조종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오스만 항공분대 역시 자연스레 터키군으로 흡수되어 현재 터키 공군의 모태가 되었다. 참고로 오스만 항공분대가 가장 규모가 컸던 시절은 1916년 12월로, 총 90대에 달하는 비행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오스만 항공분대는 세계 최초의 흑인 파일럿인 아흐메트 알리 첼릭텐(Ahmet Ali Çelikten)을 배출했다. 오스만 제국의 아프리카 영토 일부, 아라비아 반도 일부 지역에 흑인 거주민들이 있었으며 수도에도 흑인 노예들, 황실 하렘의 흑인 환관들도 존재했다고 한다.


6.5. 보급[편집]


오스만 제국 관료들은 원정이 있기 전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을 계산해야 했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전부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현지에 세워둔 창고에서 해결하려 들면 해당 지역의 물가가 심각하게 교란될 수 있었으므로, 관료들은 이전 원정에서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보급해야 하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분석해서 필요한 식량의 양을 결정해야 했다. 또 다음해의 원정을 위해 그해에 모은 식량을 몽땅 써 버릴 수는 없었으니 잉여분도 충분히 잡아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을 징발한 게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관료들은 식량 운송비는 물론 식량 구입비까지 계산해야 했다. 주둔지나 행군경로 인근의 작황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구입비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았다가 남은 식량은 비축되기도 했지만 봄이나 추수기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해당 지역에 되팔았는데, 대개 원정이 겨울에 끝나다보니 식량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정부가 저가로 식량을 판매하는 것은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6.6. 상인[편집]


오스만 제국군은 보급부대와 함께 다수의 상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1570년대 크레타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과 외과의들이 동행했고, 1730년의 동방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뿐만 아니라 제화공, 이발사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 갔다. 징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원정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1730년 원정 시 참가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고, 결국 이 불만이 폭발해 술탄 아흐메트 3세가 퇴위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중동에서 상인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도 이란의 상인들은 영국의 담배전매권을 취소시킨다든지, 헌법을 도입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만의 상인들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는 있어도 중앙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에 적극 개입했지만 상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49]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바빴는데, 1586년 오스만과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 시 타브리즈의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지급받은 화폐의 가치가 이전의 3/5로 떨어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이 시기 원정을 다룬 역사가 무스타파 알리에 따르면 당시 캅카스 지역에서 밀가루 1옥카(okkas=1.28kg)는 66악체, 빵 1옥카는 알툰(altun)금화 두개, 즉 250악체와 맞먹었는데, 여기 주둔하던 병사들의 급료는 하루 5 악체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 병사들은 당연히 이 지역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군대는 통솔을 잘 따르지 않거나 아예 반란에까지 동참하게 되었고, 예니체리들마저 부업에 나서게 되었다.


6.7. 쇠퇴했는가?[편집]


단도직입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멸망 직전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18세기까지 오스만군은 최소 현상유지는 했고 19세기부터는 빠르게 근대화되었다. 문제는 오스만보다 유럽의 진보가 훨씬 더 빨랐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오스만군은 서유럽 기준으로도 선진적인 군대였고 유럽 최대의 상비군을 운용했다. 기술력 면에서도 16세기 오스만의 화기 수준은 서유럽과 비슷하거나 더 우수했다. 허나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화기 수준이 오스만을 능가하기 시작하며 이는 대부분이 화기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며 야전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신 장기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50]

오스만은 이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고 상비군을 확충하고 더 많은 징집병을 뽑아내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16세기 초 1만 남짓이었던 예니체리는 17세기 말 4만 8천으로, 카피쿨루 기병대는 5천에서 1만 5천으로 증가했다. 또한 동급의 열강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페르시아와의 장기전에 필요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티마르 제도를 폐지하고 현지 유력자들에게 징세를 맡기기 시작했다.[51] 이는 오스만이 오스트리아보다 2배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17세기 중반까지는 유효했지만 제도의 격차를 머릿수의 우위로 커버할 수 없게 된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냈고 장비와 전투력은 그대로인데 규모만 비대해진 예니체리는 정부를 장악하고 술탄마저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예니체리는 서구화 개혁과 과학기술 도입을 결사반대했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도 불사했다.

병력 규모 면에서도 16-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육군과 해군을 합해 약 15만의 동원가능한 총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제국에 필적하는 숫자였다. 스페인 제국의 병력 대부분이 저지대에 묶여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제 동원가능한 병력은 오스만이 훨씬 더 많았다.[52] 그러나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러 서유럽 열강들이 수십만의 상비군[53]을 유지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도 수십만을 쭉쭉 뽑아내는 것이 가능해지자 오스만의 수적 우위는 무색해졌다. 실제로 18세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오스만이 국지적인 수적 우위를 점한 전투는 많았지만 총병력은 항상 열세에 있었다. 8차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서부전선에 병력 대부분을 배치했음에도 오스만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의 다뉴브 방어선이 붕괴되지 않았던 것은 운빨과 정치적 요인[54]도 주효했지만 보급의 어려움과 전염병의 공이 컸다. 당시 다뉴브 일대는 미개간된 습지가 많았는데 이들 지역은 전염병의 온상이었고 말라리아도 창궐했다. 또한 오스만의 핵심 중추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에서는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돌았는데 토착민은 전염병에 어느 정도 면역이었지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수십만씩 떼지어 죽기 일쑤였다. 당장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크림전쟁을 보면 러시아군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보다는 전염병으로 입은 피해가 10배는 더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유럽의 선진문물과 군사기술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17세기부터 있었고[55] 2차 빈 포위전 실패 후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지만 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장군들의 졸렬한 지휘로 인해 오스만군이 괄목할 성공을 거두면서 거의 백지화되었다. 뜻밖의 성공에 고무되고 자만한 오스만은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고 이는 장래 러시아와의 대결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역설적으로 성공이 몰락의 단초가 된 셈이다.

기강의 해이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오스만은 비정규병[56]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않아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병들은 전시에나 평시에나 약탈로 생계를 해결했다. 오스만 군대의 악명높은 잔혹성과 야만성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통제되지 않는 비정규병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57] 이브라힘 파샤도 헝가리 영내의 초토화와 부다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을 기록하며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16세기까지 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7세기 이후 유럽의 전쟁이 근대화되고 규율 잡힌 상비군이 대세가 되면서 오스만 군대의 효율성을 극도로 저해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오스만이 서구화 전에도 전근대 비유럽 제국들 중 가장 선진적이고 근대화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 오스만이 유럽의 변방인 러시아에게 맥을 못추고 무너지기 시작한 18세기는 유럽과 비유럽의 운명이 판가름난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제국의 서구화 개혁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100여년간 진행된 개혁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기에 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으며 뒤이어 일어난 터키 독립전쟁에서도 그리스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7. 경제[편집]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그랜드바자르
제국 지방의 바자르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는 명실공히 루멜리아 즉 발칸반도였다. 오스만 유럽 영토에서의 세입은 16세기 오스만 정부수입의 절반을 차지했고 18세기에는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또한 실크 로드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유럽에 팔았고, 유럽의 황금과 은을 그 대가로 받아챙겼다. 당시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지중해 인근의 모든 무역로들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나와있으며, 이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근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압도적으로 비싼 무역세를 지불하면서 아시아와의 무역을 진행해야만 했다. 이같은 고관세, 고세율은 종교 문제와 함께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같은 종교에 따른 관세 차별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특히 셀림 1세의 재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은 2%의 관세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에 반하여,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은 4%에서 5%에 달하는 관세를 오스만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국 상인보다는 유럽 상인들이 더 많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높은 관세는 카피튈라시옹을 체결한 국가의 상인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각종 규제를 받아야 했다. 중세부터 이슬람 군주들은 세입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대한 많은 외국 상인과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의외로 해외무역 장려에는 무관심했는데 국고에도 이익이 안 되고 국부가 유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과의 무역은 유럽 상인조합과 회사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상인들은 국내와 해외 모두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했다. 세법을 보면 183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수입과 수출 모두에 3%의 관세를 부과했고 자국과 외국 상인 모두 상품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유통할 때 8%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1838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수출에는 12%, 수입에는 5%의 관세를 부과했지만 외국 상인은 제국 내 관세를 면제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전신인 셀주크 튀르크에게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육상 교역로를 넘겨받았고, 이 교역로를 이용하는 카라반이나 대상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특히 교역로 중간중간에 초소와 국영 여관 등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를 통한 수입을 따로 챙기기도 했다. 다만 도로의 질은 당대 술탄의 통치 능력이나 정부의 효율성에 크게 달려있었기에, 16세기와 17세기에 도로의 질이 가장 좋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도로의 질이 옛 시절보다도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해상 무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상 무역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며 그저 선박들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하는 데에 세금을 걷는 데에만 만족했다. 다만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해상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도 있어서, 조세를 늘리기 위하여 선단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향신료 무역을 실시했던 적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해양 활동 범위는 주로 동지중해와 에게 해, 그리고 흑해홍해, 페르시아 만 등이었다. 에게 해와 동지중해를 다니는 선박들의 주요 거래 품목은 밀이었으며, 흑해에서는 밀과 목재를 주로 거래했다. 아시아와 가까웠던 홍해와 걸프 만에서는 향신료들이 주요 물품이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터키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에서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던 길이 43m의 거대한 난파선을 해저에서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 적재량만 1,000톤이 넘었으며 이탈리아의 자기, 인도의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초, 심지어는 명나라의 유약 자기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활발한 무역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은 어디까지나 농업국가였고 19세기까지 인구와 세입의 80%가 농업과 관계되어 있었다. 무역량이 대폭 증가한 19세기 수출입은 오스만 GDP의 2-3% 정도를 차지하며 1차대전 직전에는 11%까지 증가한다.

자체적인 산업은 19세기까지 전통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론자(Lonca)라는 길드시스템이 주류였는데, 도제(çırak), 보조자(kalfa), 장인(usta) 순서대로 진급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개점면허를 받기까지 오랜기간이 걸렸다. 또한 업종들을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도 용이치 않았다.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시기 서민부터 황족까지 널리 사용하던 구리제품들을 가공하는 공장들은 그릇을 만들기 위한 동판의 주조는 주조길드에서 담당하고, 이 동판들을 가져와서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대충 모양을 잡아 반제품을 만드는 길드와 그 위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조각, 부조를 새기는 길드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동제품은 내부에 주석칠을 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도 주석칠을 하는 길드가 따로 있어서 처리했다. 이렇게 배타적인 구조가 산업 전반적으로 만연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후 기계화를 통해 이런 진입장벽과 규제들이 사라져갔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 길드들의 반발로 꽤 오랫동안 난항을 겪었고, 현대 터키에서도 장인증서(Ustalık belgesi)를 발부하는 식으로 아직까지 수공업계에서 남아있는 관행이기도하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크게 변화를 겪는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 증기 기관과 증기선이 등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역의 대량화와 신속화가 가능해지면서 물류계의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스탄불과 베네치아를 왕래하는 정기선들이 생겨났으며 그 어떠한 화물이라도, 제국의 어느 항구일지라도 몇 십일 내에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물류의 이동이 대거 증가했다. 전통적인 목조선들이 한 번 운행할 때마다 겨우 50톤 정도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증기선은 거의 1,000톤에 달하는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으니 최소로 잡아도 몇 십배 이상 물류 이동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등 새로운 항로들이 연이어 생겨났으며, 선박들이 통행하기 어렵던 내륙의 강과 그 지류들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강 인근의 무역 도시들이 번성했다. 특히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경우, 1874년에 450만 톤의 화물들이 드나들었으며 1900년에는 무려 1,000만 톤에 달하는 화물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제국 내에서도 기술이 더 발전한 유럽과 가까웠던 발칸 반도에 집중적으로 철로와 역들이 깔리는 등 철도를 이용한 운송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근본적으로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였다. 전체 조세의 40% 정도가 농민들에게서 나왔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자작농이나 소작농으로서 집 인근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 농작물들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따로 동물들을 사육하여 그 젖이나 가죽들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당시 열악한 도로 사정 탓에 발칸의 농민들이 몇 달씩 이동하여 아나톨리아나 시리아에 생산품을 팔러 떠나기까지 했다. 또한 유목민들도 가죽을 팔거나 직물을 짜서 이를 거래하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정착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유목민들은 농민들에 비하여 정부의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18세기 들어서 대대적으로 유목민들을 강제로 도시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발달된 재배 기술이 유입되면서 농경지와 효율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다만 미국에서 엄청난 양과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이 대량 수입되면서 곡물 가격이 폭락, 제국이 붕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터키인들은 국내외 무역에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 코스탄티니예, 셀랴니크, 할레브 등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수많은 화물들이 오고가기도 했다. 1890년대에는 세 개의 지방 도시들을 따로 뽑아 조사해 본 결과, 이들을 경유하는 화물의 양이 당시 오스만의 국제 무역량의 5%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지방 도시만 해도 이랬을진데, 이스탄불,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대도시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화물들이 오고갔을 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된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마당이었고, 갈수록 제국의 영토는 좁아지고 부정부패가 행정을 좀먹는 탓에 제국의 내수는 점점 쪼그라들어만 갔다. 한편 국제 무역의 경우,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 역시 국제 무역장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18세기에 비하여 무역량이 10배에서 16배 정도 증가하기는 했다.[58] 국제항으로서 가장 번성한 곳은 당연히 수도 이스탄불과 유럽과 가까운 발칸의 항구들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으로 수출되는 양모의 양은 몇 배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무역 균형의 경우 20세기까지도 수출입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오스만 경제의 파탄을 무역수지 불균형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1856년 창립되어 오스만 제국의 중앙은행이었던 오스만 은행

오스만 재정의 경우, 거의 대부분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들였으며, 타 중동 제국들과 반대로 도시, 궁전, 군대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상업 활동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6세기의 화폐개혁 이후,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오스만 경제는 거의 500%에 달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당시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는데, 이미 산업 기반이 탄탄했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등은 오히려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졌을지 몰라도 경제구조가 취약했던 스페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상당한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니 차라리 스페인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에서 오는 상인들이 악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고 오스만 제국이 여기에 대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근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오히려 문맹률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베두인들을 계속 농촌에 정착시키는데도 불구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마저 감소하는 등등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18세기 인플레이션은 더 심화되었고 마흐무트 2세 시기 화폐가치가 90% 이상 절하되고 물가가 12배 이상 치솟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은 1850년대까지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해외에 한 번도 빚을 지지 않은 국가였다. 기독교 국가들에게 채무를 진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대출을 최대한 회피한 것인데, 이같은 노력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1854년에 유럽으로부터 첫 채무를 지게 된다. 유럽 열강들은 이 빚을 이용하여 오스만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제국이 더 많은 채무를 지도록 반강제적으로 유도함에 따라 한 번 생겨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75년 경의 오스만 제국은 무려 2억 4,200만 터키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채무를 유럽에 빚지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1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오스만 정부는 '국가채무위원회'를 만들어 빚을 변제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1914년의 국가채무규모는 1억 3,900만 터키 달러 정도까지 하락했다. 다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국가 경제는 유럽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국가채무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직후부터 오히려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경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은 빚을 빌미로 제국 내에 철도, 항만, 역 등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막대한 양의 자본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초기자본이 부족했던 오스만의 터키계 은행과 자본가들을 억눌렀다. 게다가 가뭄과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세수가 하락하며 오스만의 재정이 무너졌고, 전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주의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제국 재정의 해외 의존도는 날로 심해졌다.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이미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터키의 재정은 파탄 직전의 단계였다.


7.1. 유럽과의 비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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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영토에 비해 오스만은 인구가 적은데다 경제적으로도 발달하지 못했다. 오스만의 경제제도는 동시대 유럽에 비해 원시적이었고 조세행정도 극히 비효율적이어서[59] 여기저기 누수가 심각했으며 국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없었다. 연구에 따르면 오스만의 세입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60] 1800년부터 1차대전 사이 무려 15배나 증가했는데 19세기 서구화 개혁으로 유럽식 제도를 도입한 덕분이었다. 정부 세입은 19세기 후반 GDP 7%를 찍고 1차대전 직전에는 13%까지 증가했다.

최전성기인 쉴레이만 시절 오스만 중앙정부 세입은 은 132톤, 지출은 118톤으로 프랑스와 스페인[61]에 비해 턱없이 적었고 베네치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방정부의 수입을 전부 합해도 306톤으로 동시대 유럽 열강들에 비해 경제력에서 현저한 열세를 보였다. 17-18세기 서유럽과의 격차는 더 벌어져서 오스만의 세입은 200톤에 머무는 반면 프랑스와 영국은 1612톤과 1370톤을 돌파하여 1229톤의 청나라를 상회했다. 오스만 일개 지방보다 영토와 인구가 작은 네덜란드도 350톤의 세입을 거두었다.

이렇게까지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경제와 행정이 중요한 요인이지만 서유럽이 이미 동유럽과 중동보다 훨씬 풍요로웠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15세기 서유럽 국가들의 1인당 소득은 오스만 제국의 2-2.5배에 달했고 제국의 부와 재화가 집중되는 이스탄불 임노동자와 서유럽 임노동자를 비교하면 후자의 구매력이 50% 이상 높았다. 17-18세기 서유럽 국가들의 1인당 세입은 오스만의 수배에 달했고 영국은 12배, 저지대는 13배가 넘었다.[62] 19세기에 접어들면 오스만 세제의 서구화에도 불구하고 수십 배에 달하는 차이가 발생했다.[63][64]


8. 문화[편집]


오스만 제국 시기 이스탄불 거리의 모습

오스만 제국은 몇 백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전체, 그리고 이집트와 동지중해 연안 지방 등을 다스렸기에 문화적으로 다채로운 편이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화 된 셀주크튀르크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전 몇 천년 동안 지중해 동부를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의 문화도 섞여 있었다. 이후 제국이 점차 확장되면서 유대인, 아랍인, 동방정교도, 아르메니아인 등 타 민족들을 흡수하고, 밀레트 제도를 통하여 이들의 문화 보존을 허락하면서 이들의 문화 역시 오스만 제국 내에 점차 녹아들어갔다. 다만 역시 오스만 문화의 주류는 크게 3가지로, 첫 번째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문화, 두 번째가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문화, 마지막이 이란 지방의 페르시아 문화가 오스만 문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궁정에서는 옛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시를 잘 짓는 것을 지식인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시를 짓는 것을 연습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고전 페르시아의 시들이 사랑받으며 잊힌 페르시아어 단어들이 시를 통하여 다시 부활하였으며, '가젤'(gazel)이라고 하여 사랑과 이별에 다룬 페르시아풍의 시들도 유행했다. 한편 19세기부터는 점차 서구식 개혁인 탄지마트의 영향과 그 반작용으로 튀르키예 고유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민간 문학들의 급부상으로 인하여 주로 궁정이나 엘리트층에서나 즐기던 고전 시문학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양반들이나 사대부들이 애용했으나 근대화를 거치며 명맥이 거의 끊어져 버리고 만 시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와 비슷한 문학양식인 산문의 경우, '사즈'라고 하여 아랍의 고전적인 각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기에 시에 비하여 큰 문학적 성취는 없는 편이었다. 오스만의 산문 문화는 18세기,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들어오면서부터야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 문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캘리그래피라고 하는 이슬람권 전통의 서예다. 캘리그라피는 종교의 영향으로 식물이나 동물 등을 함부로 그릴 수 없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구불구불한 아랍 문자들을 대신 예술에 활용한 서예이자 장식 기법이다. 아바스 제국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틀이 잡혀 발전하기 시작한 캘리그래피 문화는 오스만 제국 초기에 '디와니'라고 하여 유려한 곡선으로 아랍어를 써서 이를 장식용으로 쓰는 등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며, 16세기와 17세기 초 동안에는 기존의 아랍식 캘리그라피에서 탈피하여 네스탈릭, 리카 같은 오스만 풍의 캘리그라피가 따로 만들어졌고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재위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제국의 술탄과 관리들도 자신의 서명을 이 캘리그라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기아 소피아에 걸려있는 것이 바로 이 쉴레이만 1세의 캘리그래피 서명이다.

공예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까지도 유명한 튀르키예의 카펫 제작술이 있으며, 이 카펫들은 서양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갈 정도로 그 품질과 인기가 좋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 카펫에 넣어진 문양과 색의 화려함으로 주인집의 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특히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은 이 카펫을 바닥의 깔개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나 천장에 장식용도로 걸어놓는 태피스트리처럼도 이용했다. 또한 모스크에 가장 빈번하게 기부되는 물품도 바로 이 카펫이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일부러 공물처럼 카펫을 세금으로 걷어들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스탄불에서 60km 정도 떨어진 헤레케 지방에서 짜낸 카펫을 최고급으로 쳐줬으며, 그 외에도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외뤽의 카펫과 우샥, 밀라스 지방에서 만들어진 카펫들도 그 질이 굉장히 좋아 고급품으로 유통되었다. 한편 세공술의 경우에는 특히 금과 은세공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귀금속은 은이었으며, 황금은 귀족층이나 황실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 세공술은 오스만 제국이 옛 동로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분야들 중 하나로, 일부러 성화를 새겨넣거나 비잔틴 양식의 돋을새김을 넣는 등 비잔틴풍의 금속 세공품들은 오스만 역사 내내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대부분의 보석 세공사들은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이었으며,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오스만 제국에서 일부러 서구에서 시계 제작가들을 초빙해오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대중 공연 분야도 있었다. '멧다'(Meddah, مداح)라고 하여 커피집 등에서 소규모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원맨쇼도 있었으며, 민화, 국제관계, 일화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논하면서 주로 그 속에 들어있는 교훈적인 내용 등을 전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물론 길거리나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다들은 사교나 유흥을 위주로 한 것이라 음담패설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재미있어할만한 호메로스일리아드, 혹은 오디세이 등 심지어 그리스 서사시까지 읊어주기도 했다. 특히 이 멧다를 하는 사람들은 1인극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의 역을 맡아야 했는데, 이때문에 지방별 사투리를 따로 연습하거나, 아예 목소리를 바꿔서내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한 작은 우산이나 손수건, 모자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고,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당시의 만능 엔터네이너인 셈. 2008년에는 이 멧다가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라괴즈'라는 이름의 그림자 인형극, '메디안'이라는 이름의 대형 연극도 사람들이 즐겨 관람하는 편이었다.


8.1. 하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하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2. 복식[편집]


오스만 제국이 500여 년간이나 기나긴 시간동안 존속했기에, 사람들의 의복 문화 역시 시기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65] 초기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 튀르크, 비잔틴 풍이 섞인 의복을 입고 다녔으며,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귀족과 평민 가릴 것 없이 복식이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쉴레이만 대제 시기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대적인 복식 규제가 가해졌고, 이로 인하여 종교와 계급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 거의 금지되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의 남성들은 '민탄'이라고 하는 짧은 조끼 형태의 상의와 '샬와르'라 부르는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며 '카프탄'이라고 부르는 외투 형태의 기다란 망토를 주로 걸치고 다녔다. 특히 이 카프탄이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고위급 관료나 대상인들은 이 카프탄의 끝단 부분에 모피를 붙이거나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부를 과시하고는 했다. 중산층의 경우 중간 정도의 길이의 망토인 '쥡베'나 짧은 튜닉에 해당하는 '흐르카'를 입고 다녔으며, 빈민층의 경우 목깃이 없고 단출한 조끼인 '옐렉'을 입고 다녔다.[66]

한편 여성들의 경우, 남성과 비슷하게 바지인 '샬와르'를 아래에 입었으며 그 위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형태의 '굄렉'을 입었다. 상체에는 얇은 튜닉이나 조끼를 입은 후 그 위를 벨트로 고정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한편 친구들을 만나거나 사교행사에 참석할 시에는 남성과 비슷하게 카프탄을 입었으며, 여성의 카프탄의 경우에는 가슴 부분에만 단추가 있어서 배 쪽과 그 아래에는 단추가 없어 자유롭게 풀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교를 신봉하던 오스만 제국이다보니, 여성이 외출할 때에는 아예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기다란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다녔으며, 얼굴에도 벨벳 등으로 만들어진 얇은 베일을 써서 일부러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황제의 모후 등 황족 여성들은 호토즈(Hotoz)라는 특유의 모자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유럽인들이 그린 오스만 여성 초상화에도 묘사되고 있다.[67] 이후 17세기 후반부에 들어 점차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고 사회규범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반대급부로 사람들의 복식은 날로 화려해져만 갔다. 특히 점차 군사력이 쇠퇴하던 튤립 시대 이래로 이러한 경향이 강해져 갔으며, 이같은 유행은 대대적 서구식 개혁이 진행되기 직전이었던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서구식 사회개혁이자 정치개혁이었던 탄지마트 시절에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폈고, 복식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전통적으로 쓰고 다니던 터번을 현대 터키를 상징하는 모자인 낮은 원통형의 모자 '페즈'로 바꾸었으며, 서구식 복식을 받아들여 귀족이나 술탄 모두 서구식 코트나 하이힐, 혹은 넥타이 등으로 치장하고 다녔다. 사람들도 이같은 정책을 받아들여 점차 서구식 양복을 즐겨입기 다니기 시작했고, 특히 남성의 경우에는 오스만 전통 복식을 오래된 것으로 간주, 대신 '개화된' 서구 복식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다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서구식 복식 도입이 늦은 편이었으며, 여성들의 전통 복식은 19세기까지 쭉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화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고 밖으로 나갈 일이 많아지자 여성들의 옷들도 소매가 줄어들고 입는 법이 간소화되는 등 점차 서구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외출 시 베일조차 쓰고 다니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68] 19세기 후반부터는 황족 여성들이 서양식 드레스를 입기 시작하면서 이 당시 서양식 복식을 입고 찍은 황족 여성들의 사진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후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권력을 잡고 급진적인 세속화, 현대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아예 복식 자체를 서구화시켜버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오스만 전통 복식도 완전히 생활 속에서 사라졌으며, 1960년대부터는 거의 서양의 시민들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8.2.1. 서민층[편집]



위의 그림은 오스만 제국 시절 서민층들의 복식을 나타낸 그림으로, 당대의 중산층과 하류층들이 어떤 복식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맨 왼쪽의 남성은 수수한 민무늬 카프탄을 걸치고 있으며, 머리에는 백색 터번을, 그리고 바지인 푸른색 샬와르를 입고 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시절의 샬와르의 경우, 공통적으로 허벅지와 무릎 바로 위까지는 상대적으로 품이 넓은 것에 반해, 무릎 아래쪽인 종아리 부분부터는 위쪽에 비하여 다리에 딱 붙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있는 남성이 입고있는 푸른색 옷이 중산층의 망토인 '쥡베'이며, 또한 오른쪽을 보면 두 남성이 민소매 조끼를 입고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가 앞서말한 '옐렉'이라 불렀던 조끼이다. 옐렉은 남녀 구분없이 단추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가슴 상부 쪽에만 몇 개 달려있었으며, 아예 단추를 매지 않는 형태의 옐렉도 많았다. 또한 두 남성이 옐렉 아래에 받쳐입고 있는 하얀색 튜닉이 '흐르카'이며, 띠나 장식을 둘러 멋을 부리기도 했다.


8.2.2. 귀족층[편집]



위의 그림은 오스만 제국의 고위 권력층, 상류층과 부자들의 옷차림을 나타낸 것이다. 부유한 상류층들의 경우 겉에 두르던 카프탄 끝단에 두터운 모피나 보석류들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으며, 아무래도 서민층에 비하여 크게 활동할 일이 적었기에 발목까지, 아니면 아예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망토를 걸치기도 했다. 또한 오른쪽 세 노인들의 경우, 망토 안에는 살와르와 튜닉인 '카미스'를 입고 있었다고 하며, 이 역시 평범한 옷들이 아니라 황금실이나 은실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노인들이 쓰고 있는 원통형의 길쭉한 모자 역시 터번의 일종으로, 왕실 인사나 고위급 관료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이 터번이 단순히 머리 위에 천을 칭칭 둘러맨 것이 아니라 먼저 머리 위에 가벼운 나무로 만들어진 틀을 쓴 후에 그 틀 위에 감아 핀으로 고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편 왼쪽의 남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고위층들은 칼을 차고 다닐 수 있었으며, 주로 장식용으로 애용하며 들고 다녔다. 이들이 입고 있는 소매가 넓고 헐렁한 형태의 긴 웃옷은 '돌만'이라고 부르며, 상류층들이 주로 입고 다니던 예식용 겸 일상복이었다.


9. 행정 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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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alet 행정 구역, 1609년.
Vilayet 행정 구역, 1904 - 1912년.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은 크게 1867년 이전과 그 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해 1월 21일을 기하여 최상위 지방 행정 구역이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먼저 1867년 이전까지 지방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일릭(Beylerbeylik) 또는 파샬륵(Paşalık)라고 했는데, 1365년 무렵에 오스만 제국령 남동유럽을 통째로 '루멜리 에얄레트(Rumeli Eyalet)' 로 묶은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는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사이에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69], 이에 루멜리 전체를 지방 행정 구역으로 묶어 관리하려던 것. 이후 바예지트 1세가 루멜리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도 아나돌루 에얄레트(Anadolu Eyalet)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게 되었고, 1398년에 아나톨리아 동부의 튀르크계 공국이었던 에레트나 공국을 멸하고 그 땅에 룸 에얄레트(Rûm Eyalet)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5, 16세기까지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에얄레트가 계속해서 설치되게 된다. 각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이(Beylerbey)[70]라 불리는 총독이 관할했으며, 하위단위인 산작(Sancak)으로 나누어졌지만 일부는 시파히들에게 하사하는 영지로 편성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알리' 문단에 소개된 것처럼, 베일레르베이들은 각자가 담당한 에얄레트 내에서는 군사권, 행정권, 경찰권 등 폭넓은 권한을 보유하며 그 지방 내에서는 황제와 거의 유사한 권한을 행사했다.

최대 판도이던 16세기 말엽 기준 에얄레트와 산작 편성도.

각 에얄레트 아래에는, 산작이라 불리는 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다. 각 산작은 산작베이(Sancakbey)라 불리는 지방관이 관할했으며, 에얄레트의 하위 단위인데다 그만큼 관할 범위도 좁다는 것을 제외하면 에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처음 생겨난 것은 이쪽이 조금 더 일러서,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4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또한 각 산작 아래에는 카자(Kaza)라 불리는 최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는데, 이쯤 되면 향촌 단위로 카디(kadi)라 불리는 법관이 통치하거나[71]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 유력한 부족이나 귀족이 통치하고 있던 경우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동부의 쿠르드족과 남동부의 아랍인들은 동쪽에 위치한 강력한 적인 사파비 제국에 맞서기 위해 이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화국시기 직전까지도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에얄레트와 산작은 지방 행정 단위이기도 했지만, 그 동시에 군대 편제이기도 했다. 먼저 베일레르베이와 산작베이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각자 맡은 구역에 대한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작베이는 각자가 맡은 산작이 속한 에얄레트를 다스리는 베일레르베이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각 베일레르베이는 원정을 총지휘하는 황제 또는 재상의 지휘하에 들어가거나 원정의 규모가 작다면 베일레르베이가 총사령관을 맡는 체제였기 때문. 실제로 산작라는 말 자체가 터키어로 '군기'라는 뜻이다.

1867년 이전까지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와 그를 대신하게 된 빌라예트의 가장 큰 차이는, 각 에얄레트(또는 빌라예트)의 크기가 대체로 일정한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그때그때 정복한 땅에 설치되었던 에얄레트는 크기가 완전히 제각각이어서 두어 개의 산작만을 거느린 에얄레트가 있는가 하면[72] 스무 개가 넘는 산작을 거느린 에야레트도 있을 정도였는데,[73]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갈 때야 지방 행정 구역을 어떻게 짜든 상관이 없었지만 남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심심하면 러시아가 쳐들어오고 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방 행정 제도가 필요했던 것. 1878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 체제는 다음과 같다. 자세히 보면 당시의 오스만 행정 구역이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나 빌라예트)의 전신임을 볼 수 있다.


10. 세금 제도[편집]


밀레트 제도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서로 다른 세금을 납부했다. 무슬림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종교세이자 소득세 역할을 한 제캬트(Zekât)[74], 그리고 병역 혹은 병역을 대신할 세금을 납부했으며 기독교인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교회에 납부하는 십일조, 비무슬림에 대한 생명 및 재산 보호세 명목이지만 사실상 소득세의 역할을 한 지즈야(Cizye)를 납부했다. 기본적으로 세금은 각 가정의 노동이 가능한 성인이자 자유인인 남성 인구를 대상으로 부과되었으며, 어린이, 여성, 장애인, 노인, 노예등은 모든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지즈야를 납부하는 비무슬림 인구는 지즈야가 소득세 겸 병역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 지즈야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세금들은 빈민층, 특히 농노에게는 가혹했지만 부유층에게는 그다지 높은 세금이 아니었다. 세금을 걷는 관료는 각 세금 종류마다 다 다른데, 이를테면 제캬트와 십일조는 각자의 종교시설에 납부하는 세금이고, 지즈야의 경우 지즈예다르(Cizyedar)라고 불리는 지즈야를 책정하고 걷는 세무원에게 납부하고, 지대와 도시세는 봉건 영주 혹은 각 도시의 총독에게 납부하는 세금이다. 이렇게 걷어진 세금은 각각 중앙에 납부하는 할당량을 제외하고는 해당 주체가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중앙에서 할당한 세금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 지방, 도시, 모스크, 교회에서 예산으로 활용했다.

당시 조세 저항이 가장 심했던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알바니아 산골 마을에 지즈예다르가 찾아왔다. 목적은 당연히 지즈야를 거두려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총을 가지고 나와 허공에 대고 쏘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지즈야를 낼 수 없다!" 고 뻗대기에 지즈예다르는 소득없이 돌아갔다. 그 후 모병관이 마을을 찾아와서 "당신네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거나 병역세를 내라!" 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조상 대대로 기독교인이다. 우리가 왜 군대를 가야 하냐?" 라며 모병관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그 다음 달에는 지즈예다르가 다시 찾아왔고, 또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라며 쫓아내어 마을 사람들은 사실상 면세를 누렸다는 일화인데, 오스만 제국의 복잡한 세금 제도와 부실한 지방 장악력이 드러나는 일화.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는 주요 거점 만을 장악한 형태로, 촌락, 부족, 지주들의 영지는 각 촌장, 부족, 지주 등 유력자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고유 권한은 중앙 정부나 지방 총독도 간섭할 수 없었다.


11. 종교 국가인가 아닌가: 오스만 제국의 종교와 국가 이데올로기[편집]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종교개혁이 대두하고 기독교 세계 전체가 개신교 각종 종파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격이 크게 바뀐 가톨릭 교회로 분열되고, 이에 따라 이전 중세의 일상 사회문화적 종교적 느슨함과 동남부 유럽 변경지대에서 이교, 이슬람, 유대교 등 비기독교 이교도들이 본격적인 박멸과 청산의 대상으로 떨어진 동시대 유럽과 달리[75] 근세의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으로 신민들의 일상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황실과 정부는 분명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강조했고, 엄연히 폭력적인 정복 전쟁으로 인해 건설된 나라인 만큼 피정복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기세를 꺾는 과정에서 각종 잔학행위와 제노사이드를 저지른다던지, 현지 기독교 성인의 유해를 소각한다던지[76], 특정 종교 민족 집단을 집중적으로 박해하던 일들 또한 많았던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종교 정책은 깊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단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여러 종교인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거 자체는 굳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가 아닌 종교국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이런 사례를 가지고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종교와 민족과 관련되어 정말 어떠한 차별과 탄압이 없으며 종교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오스만 국가 내에서 이슬람이 핵심 계층 혹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분명 지배 계급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숭상하고 출세하고 싶으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국교'도 있지만 민간 사회에서의 종교적 다양성까진 굳이 건드리지 않는건 저 멀리 오스만 제국까지 갈 필요도 없고, 당장 우리네 동아시아에서도 자연스러운 풍조였다. 조선만 하더라도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불교계의 정치적 권력은 철저하게 때려잡고, 사회문화적으로도 확실하게 주류의 위치에서 끌어내렸지만 굳이 불교 전체, 불자 개개인을 때려잡으며 강제개종하려고 들진 않았고, 중국에선 이마저도 훨씬 덜했다. 일본의 경우도 20세기 국가신토란 괴상망측한 전체주의 사이비 사상 비슷한거 이전엔 애초에 국교를 일괄적으로 강제할만큼 특정 종교가 중앙 정치 권력을 독점한 경우도 없고, 센고쿠 시대 승병 집단들이 보여주듯 불교계의 독자적인 정치적 권력도 일정부분 계속 유지가 되었지만 어쨋든 에도 막부 성립 이후 공식적인 관이 권장하는 사상은 유교였다.

다른 동시대 문화권을 예를 들자면, 인도에 자리 잡은 무굴 제국이 황실은 이슬람을 믿으면서도 토착 힌두교를 전반적으로 존중한건 유명한 경우고, 무굴 제국 역사상 예외적으로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다는 아우랑제브도 최근 역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실 진짜 동시대 유럽 국가처럼 동네 마을 주민들도 강제개종 시킨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토착 힌두교 귀족, 사원 세력과 마찰을 겪으면서 이 와중 사원 파괴 같은 종교적 탄압 또한 따라온것이라 보고있다. 같은 근세 이슬람 제국 중 가장 종교적으로 억압적이었다 볼만한 시아파 사파비 제국 페르시아도 막상 탄압의 집중 타겟은 '같은 무슬림'인 수니파였지, 아예 종교 자체가 달랐던 유대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존중했던 편이다.

결국 애초에 '종교 국가' 운운하려면 전면적으로 나라 안에 다른 종교 모두 전체를 영구적으로 소멸시킬만큼 종교적 통일성, 단일화를 추구한 경우 자체가 따지고 보면 종교 개혁이란 그 지역 일대에서 중요했던 사건을 겪었던 근세 유럽의 특수성이라 봐야지, 다른 문명권에 유럽만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해당이 안되니깐 '종교 국가라 할수 없다'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명나라, 조선은 '유교 국가'가 아닌게 되고,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12이맘 시아파 종교국가가 아니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주장도 할수있다. 그리고 사실 근세 자체가 엄연히 시대의 한쪽 발은 중세에 걸치고 있었던 만큼, 유럽 안에서도 이런 '종교적 다양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 국교는 확실한 나라'는 자세히 찾아보면 많다. 당장 이런 '근세 유럽 교법화 과정'의 끝판왕인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바로 그 교황령만 하더라도 대중동 무역망 유지란 이유로 안코나에 예외적인 유대인,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 커뮤니티의 존재를 용인했던 바가 있다. 그것도 다른 교황도 아니고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 가톨릭 교회의 교조화, 배타성 증가를 상징하는 인물 그 자체라고 평가 받는 바오로 4세 교황 시절 일이다.

각종 현실적인 여건에 의해서 자국 내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거하고 국가 내에서 종교의 중요성 자체하곤 전혀 다르다는 말이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제국'으로서 면모는 충분히 중요하다. 일단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 전쟁 명분 자체가 이교도를 쳐서 이슬람의 땅을 확장한다는 종교적 명분이었다. 각종 공문서, 대외 외교문서 등에서 오스만 제국은 특히 '이슬람의 땅을 침략했던 이교도들을 거꾸로 정벌하는 제국', '무슬림들의 복수를 위해 보내진 지상의 하나님의 그림자 [77]' 같은 전투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강조했다. 사회적으로도 오스만 제국이 '다른 종교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걸 '종교 정책 전반에 흥미 없었다'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오스만 제국의 종교정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비유럽권 근세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아예 종교 자체가 다른 이교도 신민들의 공존도 인정했지만, 이와는 별개로 무슬림 커뮤니티 내에선 이런 저런 종교 정책도 적극적으로 국가가 나서서 관여한 편이다. 당장 나라 정치구조 자체가 개종자 유럽인들이 엘리트 집단을 차지했던 나라다 보니 이런 출세와 신규 지배층 편입 과정을 담당하는 예니체리 양성기관 엔데룬 학교를 중심으로 원래 발칸반도 전반에 퍼져있던 신비주의적, 비문자적 성향을 강조한 벡타심 수피 교단을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반면 이면으로 도저히 국가 내에서 인정해주기 힘들고,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한 아나톨리아 동부, 특히 시아파 페르시아와 접경 지대의 반체제 시아파와 신비주의 수피 교단, 이를 따르는 튀르크나 아랍 부족은 철저하게 때려잡으며 핍박하고, 오늘 현대 터키에서의 알레비 박해 같은 이슬람 내에서의 타자화, 핍박 현상의 역사적 기원을 마련했다. 17세기까지 오스만 내에서는 이교도 박해보다 소수종파 박해가 더 심했다고도 볼수 있다.[78]

정리하자면 오스만 제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성격은 한번도 중요하지 않은적이 없었다. 다만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실제 사회에서 수많은 비-수니파 무슬림 신민들이 엄청나게 많고,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국가 운영은 커녕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과 굳이 상호배제적인게 아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스만 제국은 분명히 종교적 다양성, 공존을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 정책 차원에서 명시했고 이는 17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러나 이게 오스만 제국이 무슨 이슬람 제국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표방 안했다더니, 아예 현대 세속 민주주의 국가급의 종교적 평등을 추구한것처럼 오버해서 해석하는것도 곤란하다. 상술된 사례들도 있지만 제국 초창기에나, 전성기를 누리던 고전기에나, 쇠퇴기에나, 말기에나 아예 계획적으로 해당 종교 자체의 씨를 말리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선 종교적 탄압이라 느낄법한 억압 사례도 분명히 종종 있었다. 사실 종교적 명분보다는 근대 민족주의적 명분아래 자행된거지만 어쨋든 나라 자체가 망하면서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아나톨리아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아랍인들에게 아예 줄줄이 케밥 돌림빵으로 제노사이드급 탄압을 저지른 사례를 보면 아예 이거 나머지 전반적으론 민족, 종교적 관용으로 유명했던 그 제국 맞나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와하비즘을 비롯한 현대 이슬람권에서 기승하는 근본주의 문제는 사실 따지고보면 오스만 제국 끝자락 말기 이전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런저런 근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인식적으로 가장 시대적으로 가까운 통합 중동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사례가 전혀 상관도 없는 문제에 끌려오는것에 불과하고... 결국 특히 근세의 관점에서 특정 나라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것하고, 아예 사회적으로 이교도의 존재 자체를 포용하냐 마냐는 별개의 문제란 점을 인정한다면 오스만 제국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충분히 '이슬람 제국'이라 할만큼 종교적 정체성 또한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스만 제국 황실과 국가 엘리트층이 '수니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것과 별개로 실제 집행에 있어선 한창 종파적 배타성이 팽창해가던 동시대 유럽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 다른 이슬람 제국 국가들에 비해서도 유연함과 관용이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초창기에는 튀르크 부족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로마와의 성전"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기 까지 가지(Gazi)로 대표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으로 대규모의 비무슬림 피정복민들을 끌어안는 상황이 되자 이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립 당시부터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와 레반트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제국 내에서 비무슬림 인구가 무슬림 인구보다 더 많았고, 이후에도 비무슬림 인구의 수가 상당한 세를 차지했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 까지도 제국의 백성들을 '그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 밀레트)를 형성하게 하여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통치하고, 형법(Kanun) 만큼은 모든 밀레트가 공통적으로 지키게 했다.

그리고 가지의 의미가 이슬람 전사라 하더라도 딱히 십자군 전쟁 같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전쟁을 한 것도 아니다. 상술 된 오스만 건국에 대한 일화가 보여주듯 기독교계라도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면 얼마든지 동맹이나 파트너가 될 수 있었고, 초기 오스만 공국 입장에선 동로마가 워낙 가깝고 군침흘릴만한 문화 유산이 많았긴 했어도, 인근의 아이딘 공국 같은 다른 무슬림 아나톨리아 튀르크 공국들도 실컷 털어먹었다. 14-15세기 아나톨리아 문맥에서 '가지'의 종교성은 사실 저렇게 노략질로 벌은 돈으로 수피 순례자들 모시고, 이마렛이라 하는 모스크와 그 옆에 딸려 있는 여행자용 편의 시설을 건설하는 등 비전투적인 면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때문에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국이 조각나기 시작하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교 문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자의 종교법에서 금지하는 것[79]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서로 다른 밀레트 간의 민사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밀레트에 속하지 않은 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일도 매우 흔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당시의 풍토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자신을 소를 떼먹고 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샤리아법대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정교회 신자 아버지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척)하고 남편을 '불신자'로 보아 혼인 무효를 이끌어내는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여성,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튀르크인 선원,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리아의 한 시골 마을 같은 이야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이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무슬림은 튀르크인들조차도 포로로 잡힌 영국 선원들에게 '이슬람을 믿을 것을 권하다가' 이들이 한사코 개종을 거부하자, 선실 하나를 내주어 교회로 개조하게 하여 '그럼 기독교라도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예배를 독려하는 튀르크인 선장 이야기라든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왜 성모님께 기도하지 않소?' 라고 개신교인 선원에게 힐난하는 무슬림 선원 등의 일화가 줄줄이 나열된다.

오스만 초기 황제들 또한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보호하고자 했다.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장본인인 메흐메트 2세는 전란으로 허물어진 로마 제국 시절의 정교회 성당 복구에 금전 지원을 했고 보스니아를 정복한 뒤에는 '제국 신민들 중 그 누구도 기독교도들이나 기독교회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며[80], 셀림 1세아토스 산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도원들을 수리하게 하는 동시에 "그간 전쟁, 천재지변으로 무너지거나 손상된 정교회 성당, 수도원을 수리할 것이며 이들을 절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교회나 가톨릭, 유대교에 대한 지원을 간간히 한 기록이 발견되며, 성 니콜라오스의 교구였던 미라의 성당 또한 러시아 차르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지원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졌다.[81] 그러나 중후기 오스만 황제들은 타종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고 이는 나라에 망조가 들기 전인 17세기부터 보여진다. 패전 후 만만한 기독교도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도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사소한 부분으론 겉으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전면적으로 을 금지한 사례는 없었다. 애초에 오스만 황실의 기원인 튀르크계 유목민들부터가 술에 관대한 편이고, 옛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대폭 받아들이고 유럽 지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술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에 계속 나왔듯이 당장 비(非) 무슬림 계열 백성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술을 완전 금지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아예 술탄 본인이 술을 즐기는 애주가인 경우도 있었을 지경.

일각에선 바티칸에 비교하면 피상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를 보고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그 동기로 지목하는 모양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교권은 아예 상실했지만, 딱 이 이상으론 본 적이 없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피상적인 평가다. 정복 후 총대주교좌 또한 처음에는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격이 높았던 성 사도 성당을 쓰게 해주었다. 성 사도 성당은 몇 년 뒤 다시 뺏기고 아예 해체,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정복자의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이건 황실의 종교적 편협성과 심술보의 산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노후화 문제로 생긴 문제로, 옮긴 옆의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상당히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다.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16세기 후반 오스만 황실이 뺏어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때 새로 받아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요르고스 성당(아야 요르기)도 상당히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성당의 규모는 모스크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크기 자체는 작으나 적어도 지금 현대 모습으로 18세기 재건축할 때는 황실에서 당대 최신식 유럽의 건축가, 건축 기술 다 끌어오며 공들여 지은 것이며, 자세히 조목조목 살펴보면 당장 외부부터 대리석 떡칠에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호화롭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 정부가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만 봐도 종교적 박해나 탄압이 없었던게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이스탄불에서 백년 전엔 이 도시의 반이 그리스어를 쓰며 정교회를 믿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마인이라 불렸던 현지 그리스계 공동체가 사라진 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이후 공화정 시절 각종 재산권 분쟁을 빌미로 한 실질적인 민족 탄압 정책이 실시된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물론 터키 내 그리스계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자 업보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 내 터키계 공동체가 그리스의 변방인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 정도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에서 거의 해체되어버린 일도 일어났지만 말이다.

막상 이걸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모욕적이고 가슴아픈건 매한가지겠지만, 사실 중세와 근세 지중해권의 관점에서 보면 저렇게 특정 정복국가가 피정복민들의 종교적 중심지를 뺏어 새로운 지배자들의 종교적 건물로 재개장하는건 해당 국가의 장기적인 종교적 관용, 불관용 정책 자체하곤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데, 애초에 이슬람권, 기독교권 불문하고 지중해와 유럽권 도시 전반에서 주교좌 성당, 금요일 모스크 같은 종교적 중심지는 시장과 시청 같은 다른 경제, 정치적 실무 기관하고 딱 붙어있는게 일반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 도시를 지배하는 정치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중심적 건물에 녹아들기 마련이고, 이런 문맥에서 피정복민들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방금전까지 치열하게 맞서싸우던 적대 세력의 온갖 왕사, 휘장, 예술품 기타등등을 휘황찬란하게 전시하고 있는 중앙 종교 건물을 그나마 좀 세련되게 용도만 바꾸던, 미개인마냥 우악스럽게 때려부수던 간에 어떻게든 새로운 정복자의 정통성을 과시할 용도로 바꾸는건 필연적인 선택이다.

당장 여기서 서술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과 싸운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들도 그랬고, 이전 중세 레콩키스타 전쟁 시절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카스티야, 아라곤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 무어인들을 정벌하면서 쿠르투바, 잇시빌랴, 가르나타 등 무어인 도시의 중심 모스크들은 재깍재깍 기독교 성당으로 개조했지만, 막상 무슬림들에 대한 강제 개종과 추방은 300-200년 뒤인 1400년대 후반에서야 집중적인 국가 공식 정책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기독교 정복지들도 동네의 중심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보단 약간 급이 낮거나 도시 중심지에서 떨어져있는 성당은 피정복민들이 쓰라고 존립시킨 경우가 보편적이다. 동로마 제국시절부터 오스만 정복 이후로도 한번도 모스크로 개종당한적 없고 지금까지 계속 정교회 성당으로 남은 진귀한 기록을 가진 이스탄불 시내의 몽골인들의 성모 성당이 이러한 경우.

하여간 오스만 제국은 이교도에게 특별히 잔혹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관대한 나라도 아니었다. 이베리아라면 모를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이교도라고 무조건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처럼 타종교 비율이 높았다면 오스만 치하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처럼 2등 시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되려 신교도 국가들은 오스만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몇 안되는 자국 내 무슬림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도 했다.


12. 튀르크인의 나라?[편집]


오스만 제국의 기원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단 튀르크인들이 형성한 나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요즘 터키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사학자들이나 극우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조건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족만의 민족국가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일단 군주의 모후들부터가 휘렘 술탄이나 쾨셈 술탄, 나크시딜 술탄등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인, 슬라브인, 캅카스인(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등), 알바니아인들이 상당수 였던지라 제국의 왕가는 비(非)튀르크계 혈통도 많이 섞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을 세운 오스만 1세오르한 정도라면 모를까 후손으로 가면 갈수록 순수한 '튀르크인' 이라고 하기 어려워지며[82], 게다가 오스만도 당나라처럼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는 민족이고 출신이고 안 가리고 오직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고향에서 헐벗은 소작농 출신의 아이도 능력만 인정받으면 이스탄불의 최고급 교육기관에서 수학하고 군주의 근위병이 되거나, 건축, 병법, 교육 분야의 능력자가 되거나, 심지어 고향에 지방관으로 부임할 기회나 군주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재상까지 오를 기회도 열려있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에서 유명한 사람들만 하더라도 순수한 튀르크계 혹은 이슬람 배경을 가진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제국의 고관들은 대부분 발칸 반도캅카스 출생들이었다.

오스만의 영토였던 동유럽 출신 인사들을 고관으로 기용된것만큼 흔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의 외부의 기독교 동네인 서유럽 출신 인물들이 관직에서 등용된 사례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 해적 출신들도 있었지만 당시 유럽의 상위 신분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 초빙되어 활동했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해와 기용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오스만군의 군제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 훔바라즈 아흐메트 파샤[83],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한 독일 출신 메흐메트 알리 파샤[84], 폴란드 출신 무스타파 젤라레딘 파샤[85] 등이 있다. 베네치아 도제의 서자로 쉴레이만 1세 시절 오스만에서 베이오울루라는 이름으로 오스만의 동유럽 토벌에 협력한 알비제 그리티(Alvise Gritti)의 사례도 있다. 탄지마트를 시행하면서 서유럽인 초빙 후 등용은 더 늘어났다.

(1908년 오스만 제국 의회 의원들의 출신 민족을 나타내는 지도)

동유럽, 북아프리카 영토가 독립, 혹은 서구 열강에 떨어지고 있던 제국 말엽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석들을 보면 142명의 튀르크인 의원들 외에도 아랍인 의원 60명, 알바니아인 의원 25명, 그리스인 의원 23명, 아르메니아인 의원 12명, 유대인 의원 5명, 불가리아인 의원 4명, 세르비아인 의원 3명, 블라흐인[86] 의원 1명 등 절반 가량의 의석이 비튀르크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리스를 비롯한 피지배국들이 독립하던 시절에도 압뒬하미트 2세는 민족주의가 아닌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정하고, 제국 내에 튀르크인보다 수가 많은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까지 했다. 아타튀르크 문서를 보면 당시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청년튀르크당의 혁명을 초래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핀트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다민족,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보편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현재의 "터키 공화국 영토 내에서 거주하고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스스로를 터키인으로 인식하는 자는 모두 터키인."이라는 케말리즘적 튀르크 민족주의의 정의를 최초로 내린 사람인 오스만 제국의 사회학자인 지야 괵알프(Ziya Gökalp)는 자자계 출신이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을 작곡한 메흐메트 아킵 에르소이(Mehmet Âkif Ersoy)는 알바니아계 출신이다. 아타튀르크 본인도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출신에다 금발벽안의 백인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그의 동료이자 공화국 2대 대통령으로 제임하는 이스메트 이뇌뉘는 쿠르드인, 3대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는 불가리아계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의 민족국가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 평가[편집]


메소포타미아[87]레반트[88] 모두를 400여년 가까이 지배하여 역사상 최장 기간 지배한 기록을 세웠다. 그 뒤로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약 200여년 간 지배하였다. 로마 제국(동로마 포함)은 이집트와 레반트는 오래 지배했지만[89] 북부 일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잠시 차지했던 것 외에는 지배한 적이 없다. 그곳 자체가 파르티아-사산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거리도 서로 멀고 국력도 강해서 완전 병탄을 할 수 없는 로마 입장에서는 잠시 찔러볼 수는 있을지언정 영유할 수는 없었다.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부터 19세기의 슈퍼 파워 영국, 20~21세기 슈퍼 파워 미국조차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장기간, 그것도 완벽히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그리고 미마르 시난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돔형 지붕의 거대 모스크들은 북쪽으로는 헝가리로 부터 시작하여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그리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 걸쳐 남쪽으로는 이집트, 튀니지, 수단 해안 지대, 예멘까지 엄청나게 넒은 지역에 오랜 시간 동안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히 남아 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계사적 위세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오스만 제국 국력의 원천지이자 정치적, 경제적 핵심지였던 지방은 흔히 생각하는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 등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해안 도시들과 '로마인들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라고 불렸던 남동유럽의 현대 그리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방 일대였는데, 정작 이곳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네가 19세기 이후 각각 민족 국가로 독립하면서 소위 과거사 청산을 위해 많은 수의 오스만 모스크들과 목욕탕, 정부 건물 등 사적들이 기독교 교회로 강제 개조하거나, 심한 경우 아예 국가 차원에서 무신론을 밀었던 공산 정권 시절 방기, 혹은 파괴당했다. 물론 독립 투쟁의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이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보존, 유지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자체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 되다가 발칸 전쟁과 1차세계대전이란 거대한 참화까지 맞았다 보니 역사적으로 제국 두번째 도시였던 테살로니키가 1917년에, 세번째 도시였던 이즈미르(스미르나)가 1922년에 대방화 사건을 겪고[90] 구시가지가 싸그리 불타는 등 20세기의 참혹한 수난을 피해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당장 16~17세기에 걸쳐 변방 도시로서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자 무역로에도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이 알토란 같이 잘 개발해 놓아 16세기 말에는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대도시였던 베오그라드만 하더라도 현대에는 한때 존재했던 273개의 모스크 중 남아 있는게 하나밖에 없다. #

이에 덧붙여 추가로 설명하자면 학계 내부에서라도 민족주의적 앙금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최근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오스만의 과거 유럽 속주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자국 통치 시기를 무조건적인 암흑의 시대로만 규정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오스만의 유산에 대해 호의적인 터키 쪽에서도 핀트가 심하게 어긋난 근대 민족 국가적 관점이나, 이슬람주의적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현대적 의미의 동·서양 구분을 뛰어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정체성이 왜곡당한 면이 더욱 심했다.

오스만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던 16~17세기 시절에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알토란 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동유럽, 아나톨리아가 핵심이었고, 그밖의 영토 중에서는 기껏해야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정도가 쓸만한 땅이었다.[91] 다마스쿠스는 초기 칼리파 시절 부터 근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 지방 행정 수도였고, 알레포는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을 통한 대서방 교역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이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서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일대에서는 그나마 짦은 시일 내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할 수 있는 거리다. 이집트는 복속 이후로도 토착 맘루크 세력의 견제 때문에 제국 중앙의 권력이 잘 안 닿았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두 성지(메카메디나)가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빼면 쓸모 없는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였고, 튀니지, 알제리 등의 북아프리카 일대는 사막이 많은 불모지에다 제국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직할지가 아니라 현지 사략 해적 군벌들의 영지에 가까웠고, 현대 이라크지방 또한 사파비 제국 페르시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안정적으로 개발하기 힘든 땅이었다. 험준한 산맥 지형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지 않고, 현지 토착 민족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중앙의 통제가 힘든 동부 아나톨리아캅카스 산맥이야 말 할것도 없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으로 운영하며 정치, 군사 엘리트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인구 또한 가장 많았던 비옥하고 중요한 알토란 땅들은 당연히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필두로, 셀랴니크, 위스퀴프, 얀야, 이즈미르, 부르사, 에디르네, 트라브존, 마나스트르, 필리베, 사라이보스나, 이슈코드라, 소프야, 퓌르제린, 벨그라드 등의 현대 아나톨리아 해안가, 그리스, 남동유럽에 걸쳐져 있던 땅들인데, 이들은 로마 제국 동부의 요충지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을 통해 헬레니즘에 중점을 둔 동일한 문명권을 형성하던 지역들이다. 남동부 유럽이 터키 동부보다 백년 일찍 오스만에게 정복된 사실도 있다. 오스만이 남동부 유럽의 패자가 된 것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무너진 14세기 후반인데, 오늘날의 터키 중부 및 동부까지 오스만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반인 메흐메트 2세 치세다. 오늘날 터키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셀림 1세 때.

아무튼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술탄제에 이어 칼리파 제도 폐지하고 오스만 가문 구성원들을 모조리 국외 추방하면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으나,[92]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하에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쪽은 또 상술했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종교성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고, 국가의 핵심 이데올로기 몇가지 중 하나에 불과 했으며, 무엇보다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것이 아닌 보편 제국[93]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슬림 터키인들만의 전유물이었던양 포장하려고 들어 이건 또 나름대로 문제가 심각하다. 현대 터키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오스만 제국을 조상들의 역사로 기리며 인정하고, 자부심을 담아 묘사하려고 한다면 그때 그때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추어 어설픈 선전 영화나 찍어내고 리인액터들이나 부를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성공 비결이었던 유연한 사고 방식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14. 국가(國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스만 제국/국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본격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5. 역대 군주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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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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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통 칼리파

제2대
정통 칼리파

제3대
정통 칼리파

제4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제5대
하산

제6대
우마이야 왕조

제7대
우마이야 왕조

제8대
우마이야 왕조

하산 이븐 알리
무아위야 1세
야지드 1세
무아위야 2세
제9대
우마이야 왕조

제10대
우마이야 왕조

제11대
우마이야 왕조

제12대
우마이야 왕조

마르완 1세
아브드 알 말리크
왈리드 1세
술라이만
제13대
우마이야 왕조

제14대
우마이야 왕조

제15대
우마이야 왕조

제16대
우마이야 왕조

우마르 2세
야지드 2세
히샴
왈리드 2세
제17대
우마이야 왕조

제18대
우마이야 왕조

제19대
우마이야 왕조

제20대
아바스 왕조

야지드 3세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
마르완 2세
아부 알 아바스
제21대
아바스 왕조

제22대
아바스 왕조

제23대
아바스 왕조

제24대
아바스 왕조

압둘라 알 만수르
무함마드 알 마흐디
알 하디
하룬 알 라시드
제25대
아바스 왕조

제26대
아바스 왕조

제27대
아바스 왕조

제28대
아바스 왕조

알 아민
알 마문
알 무타심
알 와시크
제29대
아바스 왕조

제30대
아바스 왕조

제31대
아바스 왕조

제32대
아바스 왕조

알 무타와킬
알 문타시르
알 무스타인
알 무타즈
제33대
아바스 왕조

제34대
아바스 왕조

제35대
아바스 왕조

제36대
아바스 왕조

알 무흐타디
알 무타미드
알 무타디드
알 무크타피
제37대
아바스 왕조

제38대
아바스 왕조

제39대
아바스 왕조

제40대
아바스 왕조

알 무크타디르
알 카히르
알 라디
알 무타키
제41대
아바스 왕조

제42대
아바스 왕조

제43대
아바스 왕조

제44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탁피
알 무티
앗 타이
알 카디르
제45대
아바스 왕조

제46대
아바스 왕조

제47대
아바스 왕조

제48대
아바스 왕조

알 카임
알 무크타디
알 무스타지르
알 무스타르시드
제49대
아바스 왕조

제50대
아바스 왕조

제51대
아바스 왕조

제52대
아바스 왕조

알 라시드
알 묵타피
알 무스탄지드
알 무스타디
제53대
아바스 왕조

제54대
아바스 왕조

제55대
아바스 왕조

제56대
아바스 왕조

앗 나시르
앗 자히르
알 무스탄시르 1세
알 무스타심
제57대
아바스 왕조

제58대
아바스 왕조

제59대
아바스 왕조

제60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탄시르 2세
알 하킴 1세
알 무스탁피 1세
알 와티크 1세
제61대
아바스 왕조

제62대
아바스 왕조

제63대
아바스 왕조

제64대
아바스 왕조

알 하킴 2세
알 무타디드 1세
알 무타와킬 1세
알 무스타심 2세
제63대2
아바스 왕조

제65대
아바스 왕조

제64대2
아바스 왕조

제63대3
아바스 왕조

알 무타와킬 2세
알 와티크 2세
알 무스타심 2세
알 무타와킬 1세
제66대
아바스 왕조

제67대
아바스 왕조

제68대
아바스 왕조

제69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타인 2세
알 무타디드 2세
알 무스탁피 2세
알 카임 2세
제70대
아바스 왕조

제71대
아바스 왕조

제72대
아바스 왕조

제73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탄지드 2세
알 무타와킬 2세
알 무스탐식
알 무타와킬 3세
제72대2
아바스 왕조

제73대2
아바스 왕조

제74대
오스만 왕조

제75대
오스만 왕조

알 무스탐식
알 무타와킬 3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제76대
오스만 왕조

제77대
오스만 왕조

제78대
오스만 왕조

제79대
오스만 왕조

셀림 2세
무라트 3세
메흐메트 3세
아흐메트 1세
제80대
오스만 왕조

제81대
오스만 왕조

제80대2
오스만 왕조

제82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1세
오스만 2세
무스타파 1세
무라트 4세
제83대
오스만 왕조

제84대
오스만 왕조

제85대
오스만 왕조

제86대
오스만 왕조

이브라힘 1세
메흐메트 4세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제87대
오스만 왕조

제88대
오스만 왕조

제89대
오스만 왕조

제90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2세
아흐메트 3세
마흐무트 1세
오스만 3세
제91대
오스만 왕조

제92대
오스만 왕조

제93대
오스만 왕조

제94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3세
압뒬하미트 1세
셀림 3세
무스타파 4세
제95대
오스만 왕조

제96대
오스만 왕조

제97대
오스만 왕조

제98대
오스만 왕조

마흐무트 2세
압뒬메지트 1세
압뒬아지즈
무라트 5세
제99대
오스만 왕조

제100대
오스만 왕조

제101대
오스만 왕조

제102대
오스만 왕조

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5세
메흐메트 6세
압뒬메지트 2세





'황제'로 불리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 황제'를 자칭.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이다.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터키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트: 무함마드(مُحَمَّد‎), 압뒬하미트: 압둘하미드(عَبْدُ الْحَمِيد‎),[94] 쉴레이만: 술라이만(سُلَيْمَان‎)에 대응한다. 또한 현대 터키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에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터키 공화국 수립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터키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음상으로는 끝에 d가 오든 t가 오든 둘다 무성음 t발음으로 나므로 의미가 없다. 또한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오스만어에 기반한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데도 유용한데, 같은 압뒬하미트도 세속주의자 학자들은 Abdülhamit, 이슬람성향의 학자들은 Abdülhamid, 오스만 복고주의자나 친아랍주의자들은 아예 아랍식 철자로 Abd-ül Hamid로 쓰기 때문에 철자만으로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비고
00
에르투으룰 가지(Ertuğrul Gazi)[95]
1230
1281

01
오스만 1세(Gazi Birinci Osman)
(1281)1299
1324

02
오르한(Orhan Gazi)
1324?
1360

03
무라트 1세 휘다벤디갸르(Birinci Murat Hüdavendigâr)
1360
1389.6.15

04
바예지트 1세 '뇌제'(Yıldırım Sultan Bayezit)
1389.6.15
1402.7.20

혼란기 (1402~1413)[96]
05
메흐메트 1세(Birinci Mehmet)
1413.7.5
1421.5.26

06
무라트 2세(İkinci Murat)[97]
1421.6.25
1444

07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Mehmet)[98]
1444
1446

-
무라트 2세(İkinci Murat)[99]
1446
1451.2.3

-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İkinci Mehmet)[100]
1451.2.3
1481.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08
바예지트 2세 '정의제'(Veli İkinci Bayezit)
1481.5.19
1512.4.25

09
셀림 1세 '엄격제'(Yavuz Sultan Selim Han)[101]
1512.4.25
1520.9.21
칼리파 지위 획득
10
쉴레이만 1세 '대제', '입법제'(Kanuni Sultan Süleyman)
1520.9.22
1566.9.5
최장 즉위(45년 359일)
11
셀림 2세(İkinci Selim)
1566.9.29
1574.12.21

12
무라트 3세(Üçüncü Murat)
1574.12.22
1595.1.16

13
메흐메트 3세(Üçüncü Mehmet)
1596.1.27
1603.12.20

14
아흐메트 1세(Birinci Ahmet)
1603.12.21
1617.11.22

15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102]
1617.11.22
1618.2.26

16
오스만 2세(İkinci Osman)
1618.2.26
1622.5.19

-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103]
1622.5.20
1623.9.10

17
무라트 4세(Dördüncü Murat)
1623.9.10
1640.2.8

18
이브라힘(İbrahim)
1640.2.9
1648.8.8

19
메흐메트 4세(Dördüncü Mehmet)
1648.8.8
1687.11.8
중흥기·쇠퇴기
20
쉴레이만 2세(İkinci Süleyman)
1687.11.8
1691.6.22
대 튀르크 전쟁
21
아흐메트 2세(İkinci Ahmet)
1691.6.22
1695.2.6

22
무스타파 2세(İkinci Mustafa)
1695.2.6
1703.8.22
카를로비츠 조약
23
아흐메트 3세(Üçüncü Ahmet)
1703.8.22
1730.10.1
파사로비츠 조약
24
마흐무트 1세(Birinci Mahmut)
1730.10.2
1754.12.13
베오그라드 조약, 2차 중흥
25
오스만 3세(Üçüncü Osman)
1754.12.13
1757.10.29

26
무스타파 3세(Üçüncü Mustafa)
1757.10.30
1774.1.21
다시 쇠퇴기
27
압뒬하미트 1세(Birinci Abdülhamit)
1774.1.21
1789.4.6

28
셀림 3세(Üçüncü Selim)
1789.4.7
1807.5.29

29
무스타파 4세(Dördüncü Mustafa)
1807.5.29
1808.7.28

30
마흐무트 2세(İkinci Mahmut Han)
1808.7.28
1839.7.1

31
압뒬메지트 1세(Birinci Abdülmecit Han)
1839.7.1
1861.6.25
크림 전쟁
32
압뒬아지즈(Abdülaziz Han)
1861.6.25
1876.5.30

33
무라트 5세(Beşinci Murat Han)
1876.5.30
1876.8.31
최단 즉위(93일)
34
압뒬하미트 2세(İkinci Abdülhamit Han)
1876.8.31
1909.4.27
산 스테파노 조약, 발칸 반도 상실
35
메흐메트 5세(Beşinci Mehmet Reşat Han)
1909.4.27
1918.7.3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세브르 조약
36
메흐메트 6세(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
1918.7.3
1922.11.1
최후의 술탄
폐위 이후 수니파 칼리파
37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2.11.19
1924.3.3
최후의 칼리파
오스만 가의 수장[104]
-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
1922.11.1(1922.11.19)
1926.5.16
[105]
-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4.3.3(1926.5.16)
1944.8.23

38
아흐메트 니하트(Ahmet Nihat Osmanoğlu)
1944.8.23
1954.6.4

39
오스만 푸아트(Osman Fuat Osmanoğlu)
1954.6.4
1973.5.19

40
메흐메트 압뒬아지즈(Mehmet Abdülaziz Osmanoğlu)
1973.5.19
1977.1.19

41
알리 바스프(Ali Vâsıp Osmanoğlu)
1977.1.19
1983.12.9

42
메흐메트 오르한(Mehmet Orhan Osmanoğlu)
1983.12.9
1994.3.12
[106]
43
에르투으룰 오스만(Ertuğrul Osman Osmanoğlu)
1994.3.12
2009.9.23
[107]
44
오스만 바예지트(Osman Bayezit Osmanoğlu)
2009.9.23
2017.1.7

45
뒨다르 알리 오스만(Dündar Ali Osman Osmanoğlu)
2017.1.7
2021.1.18

46
하룬 오스만(Harun Osman Osmanoğlu)
2021.1.18.




16. 대중매체에서[편집]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특수 유닛인 예니체리로 간접 출연했다.[108]
    • 유명한 역사 RTS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나온다. 게임 내의 8개의 유럽 국가 중에서 상당히 개성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국가로 나온다. 다만 고증은 좋지 않아서, 아자브를 비롯해 오스만이 활용했던 다양한 보병들은 제니세리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잘려나갔고 카프쿨루 시파히도 아니고 그냥 시파히가 오스만의 주력군이 아니라 최정예 자리를 꿰차고 있다. 오리지널 기준으로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경쟁을 벌이는 게임에 오스만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오류이며[109], 그나마 실제와 가까운 건 포병 강국이라는 점 정도.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문명 3부터 꾸준히 플레이할 수 있는 문명이다. 3편에서는 오스만 1세가 지도자였으며 메흐메트 2세는 문명 4 워로드에서 오스만이 추가될 때 등장했고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 때 쉴레이만 1세가 추가되었다. 문명 5, 문명 6 몰려드는 폭풍에서는 쉴레이만만 나온다. 고유 요소로는 3에서 시파히, 4에서 예니체리와 함맘(터키탕), 5에서 예니체리와 시파히, 6에서 예니체리와 뜬금없게도 바르바리 해적과 그랜드 바자르가 나왔다.

  • Paradox Interactive사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이슬람의 검 DLC가 있다면 1299년~1337년[110] 사이에 플레이할 수 있다. 에르투으룰로는 1270년대~1280년대부터 플레이할 수 있으며 독립 세력으로서의 오스만은 1299년부터다. 1편에서도 나오기는 하지만 기독교 국가로만 플레이할 수 있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Victoria 시리즈에서 개근했다.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오스만이 멸망한 이후를 다루기에 플레이하려면 터키를 병합하고 괴뢰국으로 만들었다가 괴뢰국을 해체한 후 플레이하거나, Hearts of Iron IV에서 터키로 중동을 포함한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오스만으로 바꿔서 플레이할 수 있다. 이후 DLC가 추가되면서 술탄을 복위시키고 오스만 제국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중점이 추가되었다.
VictoriaVictoria II에서는 열강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시대 배경[111]과 게임 시스템[112]상 곧 열강의 자리를 박탈당한다. 플레이어가 무난한 지역강국으로 시작했다면, 곧 스페인과 함께 스스로 무너지는 오스만 덕에 자연스럽게 열강이 될 수 있게 된다. 플레이어가 잡으면 영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고, 수도는 유럽인데 근본문화는 터키와 아랍[113]뿐이라 시민권 정당이 집권하지 않으면 인구 풀을 최대한 활용하기 힘들며 러시아의 위협에도 대처해야 해서 난이도가 있다.

  • 국내 대체역사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도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전생하여 멸망의 기로에 놓인 동로마 제국을 존속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소설인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역사와 같이 당시의 오스만은 무라트 2세 치하에서 한참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주인공을 서방을 정복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알라가 자신에게 내린 시련이며 숙적임을 인정하고 무릎 꿇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역사인 만큼 끝내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아나톨리아로 밀려난데 이어 생존을 위해 맘루크에 신종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맘루크 전쟁에서 메흐메트 2세가 전사하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 토탈 워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데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는 오스만의 등장이라는 이벤트로 투르크 팩션이 살아있다면 오스만이 예니체리 1개 군단을 이끌고 오는 것으로 등장하고 토탈 워: 엠파이어에서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게임 시작 시점인 18세기 초에 맞춰서 최대 영토를 들고 오지만 제국이 망해갈 때라 무언가 멍한 느낌이 든다. 그 뒤의 토탈 워: 나폴레옹에서는 논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하지만 올 팩션 모드로 플레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의 절정을 보여준다. 또한 시리즈 내에서 니잠 시리즈가 나올 때까지 말 그대로 세맛 예니체리만 믿고 가야하는 팩션.




  • 배틀필드 1에서 1차 세계대전 시절의 오스만 제국이 등장한다.


16.1. 창작물에서 모티브를 딴 것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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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터키어로는 Osmanlı İmparatorluğu(오스만 제국)이라고 해서 오스만 제국 시절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스만 제국의 식자층이 문학과 행정에서 사용한 오스만어(Osmanlıca)는 아랍어페르시아어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았던 반면, 현대 터키어는 일반인(halk)들이 사용하던 오스만 튀르크어에서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와 문법을 최대한 없애고 고대 튀르크어식 어휘 문법과 서구식 어휘로 대체하는 인위적인 언어 '정화'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2] 참고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등의 게임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오늘날의 튀르키예 국기 등의 이유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국기라고 하면 무조건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깃발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오스만 제국 후기에 해당하는 1793년이다.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793-1844).svg 게다가 초승달이 세로로 길쭉하고, 별의 모양도 다르다. 그 이전까지는 큰 초승달을 쓰지 않거나 붉은색 바탕에 노란 초승달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 참고.[3] 1882년에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채택.[4] 근대의 오스만 제국의 국장이 들어가 있는 회중시계. 파일:976171339_tp.jpg파일:976171347_tp.jpg [5] 전반기 한정. 대체로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인 상류층들을 포섭하기 위해 쓰인 국호로 추정한다. 참고문헌 : (Fodor, Pál (2015). “Byzantine Legacies in Ottoman Identity.” in Barbara Kellner-Heinkele and Simone-Christiane Raschmann (eds.). Opuscula György Hazai Dicata: Beiträge zum Deutsch-Ungarischen Workshop aus Anlass des 80. Geburtstages von György Hazai. Klaus Schwarz Verlag: 93-108.), (Ergul, F. A. (2012). “The Ottoman Identity: Turkish, Muslim or Rum?” Middle Eastern Studies, 48(4): 629–645.) [6] 오스만 제국의 팽창 과정, 위에서 부터 1330년, 1683년, 1913년의 영토이다[7] 또는 1326.[8]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남동유럽 사이에 동로마 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에 소통이 어려워 유럽(루멜리 에얄레트)에 하나, 아시아(아나돌루 에얄레트)에 하나, 총 두 곳의 수도를 필요로 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그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두 곳의 수도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에디르네가 정확히 몇 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으며 언제 수도가 되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무라트 1세 대에 수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9] 당시 8위[10] 당시 12위[11] 당시 11위[12] 불과 7년만에 인구밀집지역인 발칸 반도 영토들을 잃으며 인구가 500만 가까이 줄어버렸다. 이 인구조사는 오스만 제국 마지막 인구총조사로 밀레트에 따라 조사되었는데, 무슬림이 13.390.000명, 정교도가 1.173.422명, 아르메니아 교회 신자가 1.564.939명으로 집계되었다. 출처[13] 베이(bey)는 본래 지방 태수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이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임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만하다. 대략 왕 정도에 해당하는 술탄보다는 지위가 낮아서, 의역해서 생각하자면 '공작(公爵)' 정도라고 할 수도 있다.[14] 황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파디샤(Padişah), '술탄 중의 술탄'을 뜻하는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 es-Selatin)', '로마 황제'라는 뜻의 '카이세리 룸(Kayser-i Rûm)' 등이 쓰였다. 이 밖에도 몽골어인 을 쓰기도 하고 셀림 1세칼리파를 칭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국 말기에는 칼리파를 칭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여전히 술탄이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동안 술탄이라 했던 것이 관습화된 것으로 러시아의 군주가 차르에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줄곧 차르라 했던 것과 비슷한 예.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서구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선 오스만 황제들을 '술탄'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반면 터키에서는 오스만 황제들을 '파디샤'라고 부른다.[15] 터키어를 쓰지 않는 지방에 칙령을 내리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현지의 언어도 함께 썼다. 종교인과 학자들은 아랍어, 학자와 문필가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기도 했으며, 오스만어는 이 두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6] 다만 당대에는 무슬림이냐, 정교회 기독교인이냐, 유대인이냐, 아르메니아 정교회인이냐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으며 언어와 민족에 상관 없이 구분되었다. 심지어 그리스인이나 튀르키예인 항목을 가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만 현재에는 같은 민족으로 구분하는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과 폰토스 그리스인, 북부 그리스의 그리스인, 남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민족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구분되기 시작해서 20세기에야 완성되는 개념이다.[17] 다수파는 아니지만 중동의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도 있었고 중앙 유럽 일부까지 정복한 관계로 가톨릭이나 개신교도 있었다. 짐미, 즉 비(非)무슬림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를 막지 말라는 포고를 내린 적도 있었다.[18] 오스만 제국 후기 리라화 개혁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세계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7세기 쿠루시화를 발행하기 이전까지 3악체=1파라 였으며, 쿠루시화 등장 이후 40파라=1쿠루시였다. 다만 은화로는 고액 결제나 유럽과의 무역에서 불편함이 있었으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되 고액권으로 금화를 발행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 개혁으로 발행된 튀르키예 리라화(100쿠루시=금화 1리라)이전에는 시기마다 다르지만 이스탄불 제리 마흐부브(Zer-i Mahbûb=6.5쿠루시), 이집트 제리 마흐부브(Zer-i Mahbûb-î Mısıriye=5.5쿠루시),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25쿠루시), 하이리예(Hayriye=12쿠루시), 메지디예(Mecidiye=20쿠루시), 루미(Rumî=48쿠루시), 아딜리 알튼(Adlî Altın=660파라) 등의 금화들이 발행되었으며 플로린, 리브르, 파운드스털링 등 해외금화도 유통되었다. 한편 이 금화들은 시장가치에 따라 가치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시대마다 그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19] 이렇게 된 경위에는 영국의 뻘짓이 가장 컸다. 애진코트 항목 참조.[20] 이등국가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점점 강해져 현재는 지역강국에 이르렀다.[21] 민족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인 중세 및 전근대 시기에 이슬람권이 서유럽 가톨릭 신도를 퉁쳐서 그냥 프랑크인이라 부르고 동로마제국에서는 라틴인이라 불렀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22] 만주족에게 중화가 자신들이 항유한 선진적 문화인 동시에 화(華)가 한인을 의미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다.[23] 아흐메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마티아스 2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로마와 아랍와 페르시아의 광대한 지방의 황제이자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계승자(Benki ...... Ḫakân-i Mamâlik-i fasîha-i Rûm ve 'Arab ve 'Acem ve evreng-i kaysar)를, 메흐메트 4세는 동서의 술탄과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술탄(Benki sultân-i salâtin-i şark wa ğarb, sâhib kưân-i mamâlik-i Rûm wa 'Acem wa 'Arab)을 자처했다.[24] 대한민국의 주류사학에서는 중동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1856년 오스만이 유럽의 공법과 시스템을 받아들여 19세기 후반부터는 사실상 유럽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문화, 제도도 계승했다.[25] 중동 제국들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밖에 없다. 다른 중동 제국들은 많이 동원해봐야 10만 명 미만이었다.[26]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우마이야 제국보다는 적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고 동유럽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우마이야 제국는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루스)와 페르시아까지 정복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이 우마이야 제국보다 더 강한 역대 이슬람 제국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1) 우마이야 제국보다 영토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동원력이 더 높았고 2) 동로마 제국프랑크 왕국에 틀어막혀 유럽 중심부와 동유럽, 발칸 반도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우마이야 제국에 비해 대항해시대르네상스 시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근세 유럽의 영역에 끊임없이 공세를 가함으로써 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더 무서운 적'이었으며 3) 이와 연관하여 후대에 들어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열강들 중 약체화 된 18~19세기 이후는 유럽 식민 제국주의가 나머지 비서방세계를 비교적 일방적으로 침략, 정복할 만한 절대적 군사적 우위를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을 위협한 최후의 동방/비서구 제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상당부분 유럽의 관점에서, 결과론적인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우마이야 제국는 백년도 못가고 망한 반면 오스만 제국은 당장 현대 폴란드-우크라이나 변경 지대 포돌리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제국의 끝자락 국경지대 각축장을 제외하곤 한번 점령한 지방은 백년은 넘게 장기적으로 통치하는데 성공했다. 확장의 한계점 끝자락이자 최전방 전선이었던 헝가리만 하더라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까지 150년 이상 영유했고,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같은 유럽 내 핵심 지방들은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거진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통치했다.[27] 당시 유럽에서의 오스만제국에 대한 악명은 고대 그리스에서의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한 악명과 비슷하였다.[28] 한국사에선 천년 가까이 갔던 신라가 있었고 그 외에도 기본적으로 4~500년씩은 갔기에 오스만의 600년이 그렇게 긴게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한국은 반도라는 특성상 이를 악물고 상대 국가를 멸망시키려고 절멸전을 벌인 외부 세력이 빈번하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사에선 이웃국가들과 전쟁이 일상이라 한 국가와 왕조가 200년만 가도 굉장히 장수하는 편이다. 중국사만 보더라도 중간의 신나라로 단절된 한나라를 제외하면 300년 이상 통일 왕조로 존속한 왕조가 없다. 더군다나 중동 지역은 여러 국가와 민족, 부족들이 오가며 충돌하는 요지였기 때문에 한 국가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29] 다만 이조차도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 오늘날 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 그리스, 터키,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등등의 역사이기도 하듯이 오스만 제국사 역시 터키는 물론 그리스, 세르비아 등 많은 나라들의 역사이기 때문. 더군다나 로마 제국이탈리아인만 우대하지 않았듯이 오스만 제국도 튀르크인만 대접하는 나라가 아니었다.[30] 쿠웨이트, 사우디 동해안 (카타르는 포함 x. 19세기 말엽 잠시 점령하긴 함)까지 16세기 중반 ~ 1660년 경까지 간접 지배했다. 이후 간접 지배를 담당하던 바니 칼리드가 사실상 독립하고, 1700년대 바니 우투브가 이주해오며 쿠웨이트와 바레인 등 때대 걸프 국가들의 모태가 형성된다[31] 17세기 초반 예멘 북부의 자이드파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19세기 중반 다시 북예멘을 차지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보유한다.[32]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33] 다만 알제리와 튀니지와 리비아 같은 북아프리카 지역들은 이른바 바르바리 해적들을 이끄는 두목들이 다스리던 땅이었다. 물론 그들은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지만, 자신들의 영토에서 거의 왕처럼 살아가는 반독립적인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북아프리카에 보낸 튀르크인 관리와 군인들은 북아프리카의 현지 주민인 무어인들을 굉장히 업신여겼고, 그래서 무어인들은 튀르크인들을 증오했다. 심지어 1589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규모의 반란이 트리폴리를 비롯한 리비아와 튀니지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 현지의 오스만 관리들이 주민들한테 학살당하여 오스만 제국 정부가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34]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35] 물론 대영제국은 한때 6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36] 출처[37] 출처[38] 다만 프랑스는 농토의 비율이 높아서 비슷한 면적의 다른 유럽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인구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13세기 흑사병으로 1/3이 죽었는데도 인구가 1,100만명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최전성기인 카를 5세의 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를 사실상 다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유럽 내 영토의 인구만 놓고 보면 동시기 프랑스와 간신히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을 정도였다. 프랑스를 자꾸 비교하는 이유는 그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보다 인구가 적었기 때문. 다만 러시아의 경우엔 당시 유럽권 국가들보다 정부의 행정 시스템이 심하게 딸렸기 때문에 호적에 집계되지 않은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서 실제 인구는 프랑스보다 더 많았을 거라 추정한다. 카를 5세가 괜히 프랑스를 경계한 게 아니다. 현재의 6,500만명의 프랑스 인구가, 8,300만명을 자랑하는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한 터키에게도 밀리는 건, 18세기 말에 터진 프랑스 혁명부터 프랑스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기까지 프랑스의 고령화 + 전쟁으로 인한 청년들의 대규모 전사 + 저출산이 3종 세트로 터졌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프랑스는 저출산이 심각해져 극악의 출산율을 선보이며 타국들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증하는데 반해 인구가 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100만 이상, 크림 전쟁 30만 이상을 투입한데다 보불전쟁 때는 사상자만 35만으로 전국의 젊은 남성들이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나마 냉전 이래로 혼외 가정의 합법화, 셋 이상의 자녀를 출산한 여성에 대한 연금 지급 등 각종 인구 부양책에 힘입어 선진국들 중 가장 높은 출산율을 자랑하며 조금씩 인구를 회복 중이다.[39] 15세기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 인구가 중동 1,800만명, 북아프리카 800만의 2,600만명밖에 안 되었다. 반대로 유럽은 이시기에 벌써 8,000만명을 넘겼다. 현재도 유럽은 인구가 7억 4,000만명에 달해 2억 6,000만명인 중동과 2억 3,000만명인 북아프리카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40] 이게 꽤 중요한데 19세기 탄지마트 이후 튀르크인을 포함한 무슬림 상인들이 유럽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허용되기 전에는 대유럽무역을 즘미들이 독점하는 형태였다. 주로 지중해, 에게해 권역은 그리스인, 흑해 권역은 아르메니아인상인들이 중개권을 가지고 있었고 아랍 기독교인과 콥트정교회교인인 이집트인상인들도 유명했다. 지금의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 대해 이미 16세기에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 의해 논의된 바 있으나 기술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당지역을 장악하던 콥트인 상인연합의 반발로 인해 무마된 일도 있다. 운하가 뚫리면 자기들 중개권에 영향을 미치니까. (당시 중개상들은 알렉산드리아와 홍해에 위치한 항구들 사이의 육상운송을 독점하고 중개료를 받고 있었다.) 그 외에 하렘에 출입하며 궁전의 여인들과 거래하던 키라(kira)라는 여상인들이 있는데, 이들도 대부분 유대인등의 비무슬림으로 외국산 사치품들을 거래하면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41] 모레아 재정복도 오스트리아를 자극해서 이기지 못할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42] 상주대사의 파견 이전에도 오스만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스웨덴에 대사를 파견하여 각종 특혜를 약속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압박하게 하는 식으로 국제 역학관계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카를로비츠 조약부터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중재로 체결된 조약이며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전력의 3분의 2를 대프랑스 전선에 배치해야 했다. 7년전쟁 이후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역할을 맡게 된다.[43] 이렇게 된 진짜 원인은 특혜의 남발보다는 유럽의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과 자국 산업의 경쟁력 약화에 있다.[44] 보통 술탄 압뒬아지즈의 즉위 원년인 1861년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45] 이 용병들은 오스만 장교에게 충성하는 한 이슬람으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다.[46] 자유민은 콧수염과 턱수염 모두 기를 수 있었다.[47] 다만 크게는 4개로 나누었으며, 나머지 2개는 작은 하위 부대이다.[48] 돌격하는 자(akın eden)이라는 의미이다.[49] 똑같이 상인들의 힘이 강했던 유럽과의 중요한 차이는 중동에서 상인들은 정부 정책에 관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한 언제든지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사망한 고위관료들의 재산도 국고에 귀속되었다.[50] 불신자들의 화기가 오스만의 화기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화력이 강하다는 불평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오스만 측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51] 그런다고 세입이 늘지는 않았고 오히려 지방분권과 지방세력의 할거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52] 그리고 스페인은 오스만과 전쟁을 벌일때마다 이상하게 운이 없었다. 알제리 원정에서는 격렬한 폭풍으로 수만의 원정군이 손도 쓰지 못하고 증발했고 역시 수만대군이 동원된 제르바 원정에서도 오스만은 폭풍 덕분에 승리를 거저 얻었다. 폭풍과 오스만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대거 노예로 팔렸는데 오스만 노예시장에서 기독교도 노예 가격이 양파와 맞먹을 정도로 폭락했다고 한다.[53] 1700년 기준 프랑스 육군 22만 4천, 해군 11만 8천, 영국 육군 7만 6천, 해군 11만 5천, 네덜란드 육군 9만, 해군 8만 6천[54]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열강들의 간섭[55] 오스만 군사전략가들은 서유럽 화기의 우수한 성능, 높은 화기 보급률, 장교 및 부사관 비율, 체계적인 훈련, 기하학적인 포진, 규율과 질서정연한 일제사격, 선진적인 조병창, 난공불락의 축성기술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원동력인 국가 조직과 제도를 통찰하지는 못했다.[56] 오스만 제국의 국민개병제는 탄지마트 이후인 1846년에 제정된 "제비뽑기법"(Kur'a Kanunu)이 시초였다. 당시에는 19-20세의 모든 청년들을 모아 제비뽑기를 해서 당첨제비를 뽑은 청년들을 5년 복무시키는 법이었는데 군대 가고싶지 않은 사람들은 bedel-i şahsî (몸값)을 내고 면제되거나 대리자를 보낼 수 있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국민개병제는 1차 세계대전시기인 1914년 5월 12일에 제정된 "Mükellefiyet-i Askeriye Kanun-u Muvakkatı"(의무군인에 대한 특별법)이 시초이다. 이때는 18-45세의 모든 성인남성을 대상으로 했으며 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예니체리같이 특별한 경우나 시파히같은 세습군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비정규 모집병이었다. Başıbozuk(바시으보죽), "머리가 망가진" 즉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이들은 전리품과 약탈을 노리고 자원한 대부분 빈민출신이었으며 특히 팔자좀 고쳐보겠다는 발칸출신 기독교인들이나 유목민 출신의 무슬림 빈민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말과 무기, 갑옷까지 자비로 준비해서 참전하는 전문 약탈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무장으로 그냥 무작정 닥돌하는 역할이었고, Başıbozuk이라는 이름도 그때문에 붙은 별칭이다.[57] 오스만의 비정규병들은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일상적으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참고로 무슬림이고 기독교인이고 가리지 않았다. 포로학살도 자주 저질렀는데 유럽의 전쟁에서 항복한 군대는 명예롭게 보내주거나 포로로 잡더라도 죽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비정규병들은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을 학살한 후 재물을 갈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58] 다만 동시기 유럽의 무역량이 몇 십배 이상 증가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였다.[59] 근대국가보다는 고대 로마와 비슷한 체제였다.[60] GDP 4% 미만[61] 440톤, 500톤[62] 노동소득도 비슷하게 차이가 났다.[63] 그런데 이런 오스만의 1인당 세입도 동시대 중국과 인도에 비하면 2-3배가량 높았다. 근세 서구와 비서구의 격차는 상상 이상으로 막대하다.[64] 같은 유럽 내에서도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는 엄청났다. 동유럽 최강국 러시아는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오스만보다 1인당 세입이 적었고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해야 할 수준이었다. 러시아의 1인당 세입이 오스만을 넘어서는 것은 서구화가 진행된 18세기 후반의 일이다.[65]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와 후기의 복식이 크게 다른 것을 생각하면 된다.[66] 위에 언급된 단어들은 현대 터키어에서도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şalvar는 남동부지방의 전통 바지, hırka는 스웨터, yelek은 조끼, cübbe 혹은 cüppe는 졸업가운 혹은 이맘들이 입는 긴 옷 식으로 지칭하는 대상은 같거나 약간 다르지만 현재도 쓰이고있는 단어이다.[67] 휘렘 술탄 문서의 초상화 참조.[68] 물론 이는 이스탄불 등 대도시들에만 한정되었던 이야기로, 시골이나 보수적인 지방에서는 여전히 굳건하게 옛 전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69] 따라서 수도도 루멜리(루멜리아)에 하나(에디르네), 아나돌루(아나톨리아)에 하나(부르사). 이렇게 두 군데 두어야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수도가 두 군데 있어서는 효율적인 통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70] 장군 중의 장군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지만,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루멜리 에얄레트를 창설할 때에 에디르네 함락을 주도한 지휘관에게 베일레르베이라는 칭호가 하사된 이래로 지방 총독을 뜻하는 말로 바뀌기 사작한다.[71] 다만 카디가 모두 카자를 통치한 것은 아니고, 베일레르베이나 산작베이의 측근으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72] 이런 경우는 주로 국경 방어를 위한 경우였다.[73] 가령 그리스와 보스니아, 다뉴브 강 하류 일대를 제외한 남동유럽 거의 대부분을 관할하는 루멜리아 에얄레트가 대표적인 예. 루멜리아 에얄레트를 통치하는 베일레르베이는 모든 베일레르베이 가운데 가장 윗자리로 여겨졌으며, 때로는 재상 이하 고관들의 중앙 회의 기구인 디반(Divan)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74] 연간 수입의 1/40을 매년 1회 납부[75] 이런 16-17세기 유럽 전반에서 종교개혁 이후로 각종 정치 제도와 사회 통제 시스템이 종파 불문하고 신학적 이론, 종파적 조직과 함께 성장하면서 동시에 부작용으로 훗날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지독하게 까일 배타성, 억압성도 늘어난 이 과정을 학계에선 '교파화 (confessionalization/konfessionalisierung) 과정'이라 한다[76] 16세기 후반 세르비아에서 터진 반란을 진압할때 세르비아 나라의 수호성인인 성 사바 시체를 태운 사건이다[77] ظل الله في العالم, 아바스 왕조 시절부터 이슬람 정치신학자들이 논의해온 전제 세속군주의 권위를 설명하는 이론, 약간 좀 많이 비약하자면 이슬람판 왕권신수설에서 나오는 지배자에 대한 칭호 겸 비유 중 하나이다[78] 17세기를 기점으로 오스만의 종교적 배타성과 타종교 박해는 점점 더 심해졌다.[79] 이를테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이혼, 이슬람의 이자대출[80] 이 칙령이 담긴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보스니아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81] 메흐메트 4세만 해도 카자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칭했다.[82] 사실 왕가고 일반 농민이고간에 여러 민족의 피가 마구 섞였기 때문에 '터키인' 을 혈통이나 민족상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긴하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같은 경우도 고민하다가 혈통이 아니라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에서 살아가면 터키인' 이라고 말했다.[83] 본명은 클로드알렉상드르 드본발(Claude-Alexandre de Bonneval).[84] 본명은 루트비히 카를 프리드리히 데트로이트(Ludwig Karl Friedrich Detroit).[85] 본명은 콘스탄티 보젱츠키(Konstanty Borzęcki).[86] 동유럽에 거주하는 라틴족의 갈래. 말하자면 현대 루마니아 민족의 역사적인 명칭이라 봐도 되긴 한데, 사실 서로마 멸망 이후 수천년 동안 그 일대에 살던 라틴족들이 슬라브, 오스만 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경우도 많고, 게다가 블라흐란 단어 자체가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3개 지방 중 왈라키아 중심적인 말이며, 또 발칸 반도 현지에서는 무식한 촌부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단어로 사용 된 흔적도 있어 적어도 현지인, 학자들은 사용할 때 주의를 하는 표현으로 보인다.[87] 오늘날 이라크.[88]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89] 이집트는 BC 31 ~ AD 641에서 말기 사산제국의 점령을 제외하면 650년 내외, 레반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병탄 시점인 BC 63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630년대 후반까지 거의 정확하게 700년에서 마찬가지로 사산을 빼면 600여년 후반 정도.[90] 참고로 생뚱맞은 대목이지만 이 스미르나 대화재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미국의 대하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레키가 호주에서 작업 걸던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로 언급 된다.[91] 중동 지역은 남동유럽과 아나톨리아보다 척박하고 미개발되어 있었다.[92] 물론 다시 터키 귀국이 허용되었다.[93] 비록 무슬림을 핵심적인 지배 계층으로 추구하긴 했지만, 동시대에 비슷하게 세계적인 보편제국(monarchia universal)을 추구했음에도 종교적 통일 이룬답시고 나라 안에 경제적, 기술적으로 핵심 계층을 이루었던 무슬림, 유대인들을 일괄 싸그리 추방해버리고 개신교도들을 탄압하여 반발한 개신교 귀족과 시민들의 반란이 일어난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과 비교해 보자.[94] 문자적으로는 '압드 알하미드'이나, 구어체상에서는 축약된 형태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95]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본래 몽골의 침입을 피해 그의 아버지대에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임시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룸셀주크와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베이국을 세웠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96]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 결국 넷째인 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97] 1차 재위[98] 1차 재위[99] 2차 재위[100] 2차 재위[101] 괄호 안의 부분에서 '엄격제' 에 해당하는 부분은 'Yavuz'인데,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는 듯하다.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102] 1차 재위[103] 2차 재위[104]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 정부는 오스만 가문(Osmanoğlu)을 터키에서 추방하여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케말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36년뒤인 1974년에 해제되었으나 실제 오스만 구 황가의 터키 귀국은 2004년에 와서야 이뤄졌다.[105] 11월 1일에 술탄에서 폐위당했지만 칼리파는 17일이 지나서야 터키 의회가 사촌인 압뒬메지트를 후임자로 선출했다.[106]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참고)[107] 2004년에서야 터키 국적을 회복한다. 간혹 최후의 오스만이라고 일컬어 진다. 계승자들이 제국 붕괴 이후 태어났기 때문.[108] 2에서 튀르크족은 셀주크+오스만이다.[109] 이후 확장팩에서 인도나 중국,일본 등 아시아 일부도 나오기는 하는데, 오스만은 인도와 교류를 조금 했을 뿐이지 식민지배를 한 적이 없으며 동아시아와는 거의 무관했다.[110] 북마크의 마지막 연도[111] 동방 위기, 크림 전쟁, 발칸 반도의 민족 국가 독립 등 오스만에게 불리한 역사적 이벤트 역시 연달아 이어진다. 일부는 바닐라에는 없고, 게임 플레이 개선 모드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112] 주문화와 수용문화의 POP들만이 인구가 생산하는 요소를 모두 온전히 제공한다. 오스만은 영토도 넒고 정식 주도 많지만, 투르크인은 아나톨리아에만 한정된다.[113] 1편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