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례복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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憶禮福留
생몰년도 미상


1. 개요[편집]


백제의 귀족, 유민.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군이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부여자신, 목소귀자, 곡나진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으로 망명하기 이전 관직은 달솔(達率)이었다.


2. 생애[편집]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강 전투 패배 직후인 663년 음력 9월 24일, 일본의 수군 및 부여자신,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은 저례성[1]에 도착한 후 다음날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665년 음력 8월, 일본 조정의 명으로 백제 유민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와 함께 축자국(筑紫國: 후쿠오카)으로 파견되어 대야성(大野城), 연성(椽城)을 쌓았다고 한다.[2]

671년, 일본 조정으로부터 대산하(大山下)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서는 곡나진수, 목소귀자, 답본춘초와 함께 '병법에 밝았다(閑兵法)'는 주석이 붙어있는 걸 보아 병법이 뛰어났던 걸로 추측된다.


3. 기타[편집]


속일본기 761년 음력 3월 15일 기사에서는 같은 억례(억뢰) 씨인 억뢰자로(憶賴子老)가 등장한다. 억뢰자로는 이시노무라치(石野連)라는 성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9세기 초반 편찬된 일본 씨족지 신찬성씨록에서는 '억뢰복류(憶頼福留)'로 기록되어 있다. 이시노노무라지(石野連)가 그를 시조로 한다고 하며, 억례복류는 백제국인 근속고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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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서남해안으로 추정된다.[2] 또다른 백제 유민인 답본춘초(答㶱春初)에게는 장문국(야마구치 현)으로 파견보내 성을 쌓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