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릉 전투

덤프버전 :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결과



1. 개요[편집]


기원전 575년 진(晉)나라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언릉(지금의 허난성 언릉현)에서 맞붙은 전투. 진나라군이 승리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이끄는 초나라군은 필 전투에서 진(晉)나라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정나라를 복속시켰다. 이후 초나라는 송나라, 노나라를 복속시키는 등 기세를 떨쳤고, 진나라는 초나라군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 대신,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무신(巫臣)이라는 자를 오나라에 보내 오나라의 국력을 키워 초나라를 견제하게 했다.

기원전 586년, 허나라의 군주 허영공이 초나라에 정나라를 중상모략했다. 이에 정도공이 아우인 공자 곤을 보내 항의했는데, 초나라 측에서 공자 곤을 가두자 정도공은 분노하여 진(晉)나라를 섬겼다. 이에 초공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정나라를 치자, 진나라는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등과 연합하여 초나라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기원전 582년 2월 초공왕이 정나라에게 은혜를 베풀자, 진경공은 이를 의심하여 가을에 정성공이 알현할 때 난서를 시켜 억류해 버렸다. 그러다 정나라에서 공자 수를 군주로 추대하자, 진(晉)나라는 정성공을 풀어주고 정군 수를 죽였다.

이후에도 진나라군과 초나라군은 몇 차례 더 교전하다가 기원전 579년 송나라 대부 화원의 주선으로 진나라의 사섭과 초나라의 공자 허언이 송나라의 서문 밖에서 미병 회맹을 열었다. 두 사람은 양국이 전쟁을 중지하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기원전 575년 봄, 초공왕이 공자 성전을 보내 정나라에 여음을 돌려주는 대가로 화해하자고 청했다. 이에 정나라는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진여공은 정나라의 배반 소식에 진노하여 4군을 출동시켰다. 진여공 본인이 전군을 통솔했는데, 중군은 난서가 지휘하고 사섭이 보좌하였으며, 상군은 극기가 지휘하고 순언이 보좌하였다. 그리고 하군은 한궐이 지휘하고 순앵이 보좌하였다. 또한 신군은 극주가 지휘하고 극지가 보좌했다. 여기에 위나라, 제나라,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정성공은 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초공왕은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자반, 자중, 자혁에게 3군 통솔권을 맡기고, 친정에 나섰다. 이후 두 나라 군대는 언릉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3. 경과[편집]


기원전 575년 음력 6월, 진나라 군대와 초나라 군대가 언릉에서 만났다. 사섭은 초나라 군대가 강성한 걸 보고 교전을 피하자고 권했다. 그러자 신군 보좌를 맡던 극지가 강경하게 힐책했다.

"지난 날 진(秦)나라와의 한원 전투에서, 혜공이 돌아오지 못했고, 적나라와의 전투에서 선진이 전사했으며, 필 전투에서는 순림보 원수가 패해 도망쳤소. 이는 모두 진(晉)나라의 치욕이었습니다. 이 일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가 초군을 피하는 것은 치욕을 더하는 것이오!"


사섭이 반론했다.

우리 선군들이 여러 번 전쟁을 벌인 건 이유가 있소. 진(秦)나라, 적나라, 제나라, 초나라는 모두 강대국이어서, 그들이 힘을 다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위험했습니다. 이제 진(秦)나라, 적나라, 제나라 세 강국은 굴복하였고, 오직 초나라만 있을 뿐이오. 나라 안팎 모두 우환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외적이 모두 없어지면 내부에 우환이 생길 수밖에 없소. 초나라를 잠시 내버려둬서 (국인들이) 바깥을 경계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섭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초나라군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위나라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진(晉)나라군을 쳐부수기로 했다. 그들은 아침 안개를 이용해 진나라군에 바짝 다가갔다. 초공왕은 중군의 병력이 약한 걸 확인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진나라군이 사력을 다해 저항해서, 좀처럼 군진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중군 지휘관 난서는 초나라군의 예봉을 피해 굳건히 지키기로 했는데, 때마침 연합군이 도착하면서 병력이 우세해지자, 즉각 출격하여 초나라군을 공격했다. 초나라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패퇴했고, 초공왕의 아들 웅벌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아침, 초공왕은 아들 웅벌이 적의 수거에 갇혀 있는 걸 보고 울화가 치솟았다. 그는 즉시 병거에 올라타 아들이 갇혀 있는 수거 쪽으로 달려갔다. 이에 진나라 장수 위기가 초공왕을 향해 화살을 쐈다. 화살은 초공왕의 왼쪽 눈알에 박혔다. 초공왕은 병거를 돌려 달아나면서 왼쪽 눈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그 바람에 왼쪽 눈동자가 화살과 함께 빠져나왔다. 초공왕이 눈동자가 꽂혀 있는 화살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지자, 소졸이 황급히 화살을 집어 올려 초공왕에게 바치며 아뢰었다.

"용안을 어찌 함부로 버리십니까?"


초공왕은 화살을 받아 전통에 넣고 돌아갔다. 진군은 초나라 왕이 중상을 입은 걸 보고 기세가 살아나 초왕을 추격했지만, 공자 자반이 죽을 힘을 다해 막아준 덕분에 초공왕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초공왕은 명궁으로 이름난 양유기를 불러 자기 전통에서 화살 두 대를 뽑아 주며 분부했다.

"과인의 눈알을 쏜 적장은 녹포를 입고 구레나룻 수염이 많이 난 놈이다. 장군은 과인의 원수를 갚아주오!"


양유기는 즉시 병거를 몰고 달려가다가 위기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외쳤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임금을 상하시게 했느냐?"


그는 위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화살을 쏴 목을 꿰뚫었다. 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난서가 급히 달려와 위기의 시체를 수습했다. 이후 양유기는 초공왕에게 돌아와 남은 화살 한 대를 바치며 적장을 사살했음을 알렸고, 초공왕은 크게 기뻐해 친히 입고 있던 금포와 낭아전 100대를 양유기에게 하사했다.

그 후 초공왕은 다음날 다시 싸우기로 하고, 군리에게 부상자를 시찰하고 보병과 전차병을 보충하며, 갑옷과 무기를 수리하라고 했다. 그는 다음날 닭이 울 때 밥을 먹고 적을 향해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진군 측에서도 다음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고, 포로로 잡혀 있던 초병 하나가 탈출해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초공왕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중군장 자반을 불렀다.

그러나 자반은 초공왕의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뒤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이때 부하 장수인 곡양수가 군중에서 술을 구한 뒤 권하자, 자반은 "지금은 전시이니 음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곡양수는 술이 아니라 물이니 어서 마시라고 권했고, 자반은 못 이기는 척 마셨다. 그는 한 번 술을 마시면 완전히 취할 때까지 마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술을 입에 대자 정신없이 마셨고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대취했다. 초공왕은 자반이 대취하여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탄식했다.

"하늘이 초나라를 패하게 하는구나! 과인은 여기서 패망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그날 밤, 초공왕은 전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진나라군은 다음날 아침 초나라의 군진이 텅빈 걸 확인하고 그곳으로 가서 초나라 군사들이 남기고 간 곡식으로 밥을 해 먹으며 3일간 편안하게 지냈다. 이리하여 언릉 전투는 진(晉)나라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4. 결과[편집]


진나라군은 비록 언릉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한편 초공왕은 자반이 술에 취해서 왕명을 따르지 못한 것에 괴로워할 것 같아서 사자를 보내 자기 뜻을 전하게 했다.

"이번 전투는 과인이 직접 참전했으니, 중군 장수에게는 잘못이 없소. 패전의 책임은 과인에게 있소."


좌군 장수 자중은 평소 자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이 자반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사람을 보내 책임을 물었다.

"이전에 군사를 잃은 자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들어서 잘 알 것이오. 그런데 장군은 어찌하여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으시오?"


자반이 답했다.

"비록 선례가 없다 하더라도 영윤께서는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했을 것이오. 내가 어찌 영윤의 말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소? 왕의 군사를 잃고도 감히 죽을 생각을 안할 수 있겠소?"


결국 자반은 하지에서 자결하였다. 초공왕이 급히 만류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후 초공왕은 언릉 전투의 실패를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고, 기원전 560년 숨을 거두기 전에 언릉 전투의 책임을 지고 싶으니 악시를 쓰라고 명했다. 그러나 대부들은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여기고 '공(共)'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한편 승리한 진나라도 사섭의 예언대로 혼란에 빠진다. 원래 교만했던 진여공은 승전을 거두고 돌아와서 여러 대부를 죽이고 자신의 총신들로 대체하려 했다. 서동은 부친 서극이 극씨에 의해 추방당했고 이양오는 극기에게 땅을 빼앗겼고 장어교는 극주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 셋은 모두 진여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난서 또한 극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언릉에서 초나라를 물리쳐 원망중이었다. 난서는 극지가 초나라와 짜고 일부러 다른 제후국이 오기 전에 서둘러 공격하여 군주를 위험에 빠뜨리고 주나라에서 일하던 손주(진도공)를 옹립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모함한다. 또 난서는 손주에게 사람을 보내 극지가 주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만나보라 한다. 진여공은 극지가 손주를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극지를 원망하게 되었다. 또 진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극지가 돼지를 잡았는데 진여공의 총신 장맹이 이를 가로채자 활로 쏴 죽였다. 마침내 진여공이 변란을 일으키려 하자 서동이 삼극(극기, 극지, 극주)을 먼저 죽여야 한다 말했고 이에 진여공은 극씨를 멸족했다. 서동과 장어교는 난서와 순언도 죽여야 한다 말했으나 진여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서동을 경으로 임명했다. 얼마 뒤 진여공이 장려씨의 집으로 놀러갔을때 난서와 순언이 군사를 일으켜 진여공과 서동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 주나라 도성에 살던 공손 주를 모셔오니, 그가 바로 진도공이다. 진도공은 다행히 현명한 군주였고 진나라는 그의 통치 하에 패권을 재장악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1:53:18에 나무위키 언릉 전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