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난도 실레스 레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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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제31대 대통령
에르난도 실레스 레예스
Hernando Siles Reyes


파일:Hernando Siles Reyes.png

출생
1882년 8월 5일
볼리비아 수크레(Sucre)
사망
1942년 11월 23일 (향년 60세)
페루 리마
국적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재임 기간
제31대 대통령
1926년 1월 10일 - 1930년 5월 28일
약력
교육부 장관,(1922)[1],
전쟁부 장관,(1922-1923)[2],
볼리비아 제31대 대통령,(1926-1930),

1. 개요
2. 생애
2.1. 집권 이전
2.2. 집권 기간
2.3. 실각과 그 후
3. 기타



1. 개요[편집]


볼리비아의 제31대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2.1. 집권 이전[편집]


1900년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1905년부터 민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1914년 공화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12일 쿠데타로 호세 구티에레스 게라 대통령을 실각시키며 정권을 잡았다.[3] 1921년 1월 28일부로 바티스타 사베드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회공화당이 분리되어 나왔고 실레스도 당적을 옮겼다. 사베드라 정부에서 실레스는 교육부 장관과 전쟁 및 식민지부 장관 직을 역임했다. 1925년 5월 실레스는 차기 대선 후보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실레스는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사베드라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약속하고 부통령엔 사베드라 대통령의 동생인 압돈 사베드라(Abdón Saavedra)를 임명하는 "약속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되었다. 실레스는 우선 잠자코 문서에 서명했다. 1925년 12월 1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실레스는 97.3%의 투표율을 얻으며 공화당의 다니엘 살라망카 후보를 꺾고 승리했다.


2.2. 집권 기간[편집]


대통령이 되자마자 바티스타 사베드라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 우선 사베드라 대통령을 유럽 대사로 임명시키고 1925년 독립 100주년 행사 때 참석해준 유럽 국가들에 외교 사절단으로 압돈 사베드라 부통령을 파견시키고선 두 사람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1926년 12월 29일 국민당을 창당하며 당적을 새롭게 옮겼다.

1927년 남미 순방 중이던 미국 금융 사절단을 초청하였고 사절단장인 에드윈 케머러는 당시 매우 심각했던 볼리비아 외채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4] 1928년 7월 11일 일반은행법을 통해 볼리비아 중앙 은행을 설립하였고 세금 규정이나 통화 관련 법률도 개정했다.

1927년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순찰대와 현지 가이드가 볼리비아군에 체포되고 파라과이군의 아돌포 로하스 실바(Adolfo Rojas Silva) 중위가 사망하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하스 실바 중위의 죽음에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 1928년 1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회담이 결렬되었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바이아네그라 지역의 북서쪽에 위치한 볼리비아군의 뱅가디아 요새(Fortin Vanguardia)를 공격했다. 파라과이군은 21명의 볼리비아 군인을 포로로 잡고 시설을 불태웠다.

같은 해 12월 14일, 볼리비아군은 보복으로 파라과이의 보케론 요새(Fortin Boquerón)를 점령했고, 15명의 파라과이군을 죽였다. 다음날엔 바이아네그라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약간의 사상자와 피해를 입혔다. 1929년 9월 12일, 워싱턴 DC에서 미주 기구의 압력으로 양국은 원상복귀를 합의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 양국은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양국은 무기 산업이 열악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막대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야 했다. 이러한 준비는 1932년 9월 전쟁 발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3월 3일, 볼리비아의 첫 라디오 방송이 수도에서 방송되었다. 1933년엔 Radio Illimani라는 볼리비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개관했다.[5] 이는 차코 전쟁으로 볼리비아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1929년 5월 14일, 총선 기간 동안 포토시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실탄을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한스 쿤트 장군은 80발의 실탄을 발포했다고 공식 보고를 올렸다.


2.3. 실각과 그 후[편집]


에르난도 실레스의 대통령 임기는 1930년 1월 10일부로 종료될 예정이었는데 측근들은 임기 연장을 추진했고 같은 해 8월 6일까지 연장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실레스와 그 측근들의 최종 목표는 재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볼리비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제로 제한되었기에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선 우선 대통령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1930년 5월 28일부로 사임했다.

이후 1달 동안 대통령 없이 장관들의 연립 정부 형태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문제는 아직 추방된 압돈 사베드라 부통령이 사임하지 않은 상태라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이 맞는 상황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실레스 추종파는 복귀 작업을 계속 진행했고 결국 국민들의 지지를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

1930년 6월 22일, 라파스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유혈진압을 시행하여 2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6월 24일 오루로(Oruro) 시에 주둔한 포병 연대의 봉기를 시작하여 군이 두개의 파벌로 나눠져 내전을 벌였다. 결국 6월 28일 한스 쿤트 장관의 추방으로 쿠데타는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레스 전 대통령의 자택이 공격받으며 대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결국 새로 들어선 카를로스 블랑코 갈린도 정부는 실레스를 칠레로 추방했다. 아후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칠레 주재 볼리비아 대사와 194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페루 주재 볼리비아 대사직을 역임했고 리마에서 사망했다.


3. 기타[편집]


큰 아들인 에르난 실레스와 둘째 아들 루이스 아돌포 실레스 역시 볼리비아의 부통령과 대통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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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 5달 간 역임[2] 후임이 한스 쿤트 장군이다.[3] 4개월 간은 대통령 없이 과두체제로 국정이 운영되었다.[4] 당시 볼리비아는 모든 경제 수입의 50%가 외채 상환에 사용될 정도였다.[5] 지금의 Radio Red Patria Nueva 방송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