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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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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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투 배경
3. 경과
4. 전투 이후


1. 개요[편집]


1082년 북송, 서하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신종은 서하가 여전히 강한 상대임을 깨닫게 되었다.


2. 전투 배경[편집]


1081년 서하 조정에서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충악[1]이헌 등을 필두로 한 군대가 5개의 진로로 나누어 출병하였으나, 지휘관들 사이에서 단합이 되지 않은 데다가[2] 하필이면 지휘관 중 하나인 이헌이 환관이었다.[3] 게다가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보급 문제였는데, 서하군이 북송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황하의 제방을 터트려서 북송군 대부분이 패사하고 말았다.(오로벌하) 이로 인해 송 신종은 여러 개의 진로로 나누어서 진군하는 대신, 한 방면에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고자 하였고 영락성을 수축하고자 했다. 이에 이헌으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한다.


3. 경과[편집]


이전에 영락성을 건설하였던 충악이 이에 반대하였다. 영락성은 수원 부족 등의 문제가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희[4]는 이를 무시하고 영락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고 신종은 이에 적극 찬동했다.

영락성의 축조는 서하에 큰 위협이 되어 서하가 30만 대군을 파견하여 영락성을 공격하였다. 서희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성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렸다.

서희는 군사도 모르고, 공도 탐내고, 만 명의 병사로 성 아래에 진을 쳤는데, 결국 패잔병이 성 안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성은 서하군에 둘러싸여 수원을 차단당했고, 대부분 병사들이 갈증이 나 사망했다.[5] 서하군은 또 두 개의 부대를 보내 이헌과 심괄의 두 지원군을 가로막았고, 충악은 영락성이 공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망하였다.[6] 그 후, 서하군은 밤에 급히 공격하자 영락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송군은 서희를 포함한 수만 명의 사졸이 전사하고, 230명 이상의 관리들을 잃었다.


4. 전투 이후[편집]


신종은 신하들 앞에서 크게 통곡하였고 서하가 여전히 강한 상대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서하도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신법당 실각 이후 구법당이 집권하자 하황 일대를 토번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1085년 신종은 서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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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세형의 아들. 아버지의 연줄로 청간성을 수비하였으며 1067년 외명산 부락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충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고 종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2] 왕중정은 겨우 몇 리만 진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하의 국경으로 진입했다고 허위보고하였다.[3] 다른 군대가 다 집결했음에도 난주를 수복한 이헌이 오질 않아서 북송군은 갈팡질팡하였다.[4] 서희는 자신을 한신, 제갈량에 비유했다.[5] 성 안의 병사들은 말똥을 갈아서 즙을 내어 마실 정도였다.[6] 충악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