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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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29년 4월 23일에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에서 경력을 계속하였으며 정치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3년 11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방중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최소 1996년부터는 김일성정치대학 학장으로 김정일 우상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1997년 4월 1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88호에 따라 상장으로 진급하였다. 1998년에 김정일 대의원 추대 캠페인을 진행하였으며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0년까지는 하페즈 알아사드 조문을 위해 시리아 대사관을 방문하는 등 행보를 보였으나 동정보도가 끊겼다.

이후 은퇴하여 김일성정치대학 연구사로 재직하던 중 2010년 1월 19일에 사망하였다. 1월 20일,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화환을 보내주었다. 당중앙위원회와 인민무력부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위대한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선군혁명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짤막하게 추모했다. 그러다가 8년이 지난 2018년 9월 21일에 애국렬사릉에 조선인민군 장령 직함으로 묻혔다. 북한에서 평가가 좋은 인물인 경우에 죽고 나서 제깍제깍 묻어주지만 8년 넘게 지나서 묻어준 것은 말년에 뭔가 사고를 쳐서 은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망 보도 때도 군인 출신임에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것만 언급했지 군사칭호는 언급하지 않은 것을 봐서 군적을 박탈당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망 보도 자체가 나왔다는 점에서 큰 잘못을 저질렀다기 보단 김정일의 총애에서 멀어진 것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조선중앙통신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여러 전투들에서 용감히 싸운 옥봉린동지는 오랜 기간 인민군대 정치일군으로 사업하였으며 김일성정치대학에서 혁명적수령관이 확고히 선 유능한 정치일군들을 키워내는데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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