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무(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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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
왕무
王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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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왕무 (王武)
부모
아버지 왕건
어머니 장화왕후[1]
이복형제
왕태, 왕요, 왕소, 왕욱, 왕원, 왕은, 백아, 왕정, 황보연화

경화궁부인
원작 인물
2황자 윤잉[2]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
태조 왕건이 느지막이 얻은 첫아들로 사랑과 신임을 독차지 한다. 곰인형처럼 선량한 외모와 심성을 지녔지만, 무예에 있어선 천하무적.

전쟁터마다 빈번히 무공을 세우고 일찌감치 정윤(황태자)에 책봉 되었다. 아버지 주변의 가신들과도 스스럼없는 사이. 겸손하고 소탈하고 잘 웃는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황제’가 되기엔 강단과 배경에서 역부족이다. 이 사내가 바로 고려의 2대 황제, <혜종>[1]이다.

1. 개요
2. 작중 행적
3. 실제 역사에서



1. 개요[편집]


황제로 키워졌으나, 복(福)이 아닌 업(業)으로 여겼다.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의 등장인물. 모티브는 혜종.
원작은 2황자 윤잉으로 나오며 모티브는 이밀친왕.[3]


2. 작중 행적[편집]


4황자를 곁에 두고 황제의 사랑을 받는 등 원작의 2황자 포지션...이기에는 성격 차이가 좀 심하다(...). 3황자 왕요와 포지션을 나누어 맡은 듯. 극 중 아토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4] 병이 정적들의 좋은 떡밥이기에 안간힘을 써서 숨기고 있는 듯. 타임슬립 전 아토피를 심하게 앓은 어머니가 계셨던 해수가 정윤의 아토피를 남들 몰래 관리해주게 된다.

황위에 오르고 황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8황자[5]를 측근으로 드나 8황자의 계속된 황위 양위 압박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피폐해진다. 게다가 9황자의 사주를 받아 다미원의 궁녀로 들어가 있던 채령이 혜종의 목욕물에 수은을 타 혜종은 장기간에 걸쳐 수은에 중독되게 된다. 자신이 위험할 때 거란이 군사라도 보내주지 않을까 자신의 어린 딸을 거란에 정략결혼 보내려 하나 혜종의 딸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고 4황자는 어머니 황후 유씨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혜종은 4황자에게 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자신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고 4황자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한다.

이후 죽은 줄 알았던 3황자가 살아 돌아와 군사를 끌고 2차 반란을 일으킨다. 이미 심신이 망가져 있던 혜종은 피를 토하며 목욕탕에 빠져[6] 질식하고 만다. 죽은 혜종의 시체를 최지몽이 붙잡고 통곡한다.[7]


3. 실제 역사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혜종(고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실제 역사에서는 모친이 2비 장화왕후 오씨인데 집안이 빈한했다. 금수저인 1비(신혜왕후 류씨)가 후사를 낳지 못한 상황에서 덜컥 태조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황태자가 되었는데, 태조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준 1비(패서지역의 대호족인 정주)가 황태자를 낳길 바랐기 때문에 혜종의 출생을 다소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실제로 1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집안의 딸을 6비로 맞기도 했다.[8]

즉위 2년 만에 원인불명의 죽음을 맞았으며 왕요(정종), 왕소(광종)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의 처제[9]를 정종의 3비로 주고 딸을 광종의 후궁으로 보내 신변안전을 도모했다. 사후 유일한 아들 흥화궁군은 광종에게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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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중 언급만 있을 뿐 등장하지 않는다.[2] 황태자 포지션은 이쪽에서 담당했으나, 작중 행적들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가져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3] 황태자의 설정만 가져왔다.[4] 혜종은 얼굴에 마치 돗자리 무늬처럼 주름살이 많았다는 야사가 있는데, 이것을 아토피에 대입한 듯.[5] 실은 정윤과 3황자 왕요 둘 다 협력을 하다가 어느 한 쪽의 기세가 기울면 유리한 쪽으로 붙으려는 셈이었다.[6] 왕요가 넘어트린다.[7] 최지몽과는 돈독한 친구였다. 후에 광종이 즉위하고 나서도 자신에게 왕은 죽은 혜종 하나뿐이었다며 떠났으니 둘의 사이는 무척이나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8] 고려 시대는 호족 연합체인데 조선시대로 넘어오기 전까지 각 호족들이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 대에 와서야 간신히 지방의 관리를 파견하는 등 호족들의 힘이 막강했다. 이는 혜종을 따르는 호족과 신하 즉 병사가 빈약했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왕요는 장인이 후백제의 대표 호족인 견훤의 사위 박영규요, 어머니가 충청도 일대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충주 유씨 집안의 세력이니 사실상 왕무와 비교하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왕무는 자신을 딸을 왕소에 시집보내고 왕규의 왕요, 왕소 숙청에 반대했다.[9] 청주 호족 김긍률의 딸이자 혜종의 3비인 청주원부인 김씨는 정종의 3비인 청주남원부인 김씨와 자매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