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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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백제 왕족?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王辰爾 | おうしんに, おうじんに

고훈, 아스카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관료로 왕지인(王智仁)이라고도 한다.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이다.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상세[편집]


소가노오미 이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目宿禰)가 명령을 받들어 왕진이(王辰爾)를 보내 선부(船賦)를 세어 기록하였다. 바로 왕진이를 선장(船長)으로 삼고 성을 선사(船史)라 내려 주었으니, 오늘날 선련(船連, 후네노무라지)의 선조이다.

일본서기 권19 긴메이 덴노 14년(553) 7월 4일#

왕진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 553년 기록이다. 여기서 선부는 조운선에 실린 공납 물품을 말한다. 왕진이가 각지에서 운반된 조운 물자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진이가 언제 일본에 건너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553년보다 이전의 가까운 시기라고 추정된다.[1]

왕진이를 보내 조운 업무를 감독하게 한 소가노 이나메는 명문 호족인 소가 가문의 일원이자 왕실의 외척으로 영향력이 컸다. 그는 도래인들을 거느리고 선진 문화를 수용하면서 힘을 쌓아 나갔는데, 왕진이를 국가의 세금을 다루는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게 한 것도 재정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이 고구려에서 올린 표를 대신에게 주었다. 여러 사관들을 불러 모아서 풀이하게 하였는데, 이 때 여러 사관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읽지 못하였으나 선사(船史)의 조상인 왕진이(王辰爾)가 능히 읽고 해석하였다. 이 때문에 천황과 대신들이 모두 찬미하여 “부지런하구나 진이여, 훌륭하구나 진이여, 그대가 만약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읽고 해석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는 궁중에서 근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동서의 여러 사관에게 “너희들이 배운 바는 어찌하여 나아감이 없느냐. 너희들은 비록 많으나 진이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 하였다. 또 고구려가 올린 표에 까마귀 날개에 쓰여진 것이 있었는데 글자도 날개처럼 검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진이가 이에 밥김에 날개를 쪄서 비단으로 날개를 찍어 그 글자를 베껴냈더니 조정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일본서기 권20 비다츠 덴노 원년(572) 5월 15일#

왕진이의 뛰어난 학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동서의 여러 사관’이란 일본 조정에서 사관의 역할을 하고 있던 동문씨(東文氏)와 서문씨(西文氏) 가문을 일컫는다. 둘 모두 왕인을 선조로 하는 도래인 출신 문인 관료 가문이었다. 왕진이는 새로운 세대의 도래인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출사하게 된 것이다.

왕진이는 홀로 일본에 건너간 것이 아니라 일족을 함께 이끌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는 왕진이의 조카인 담진(膽津)과 동생 우(牛)에 대한 기록도 있다. 담진은 569년에 호적을 작성한 공로로 백저사(白猪史)의 성을 받았다. 담진은 지방민을 호적에 편성해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행정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호족을 통해 주민을 간접 지배하던 것을, 왕권을 바탕으로 주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공로를 인정받은 담진은 이후에도 이와 관련된 관직을 지냈다.

동생 우는 574년 진사(津史)라는 성을 받았다. 성을 보아 특히 항구의 출입 업무를 담당한 것 같다. 왕진이 일족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성인 사(史, 후히토)는 문자 기능을 가진 도래계 씨족에게 주어진다. 일족은 나니와(難波)와 아스카(飛鳥)의 수운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수운의 요충지인 가와치국(河内国)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그들의 후손인 백저사광성(白猪史廣成), 진사주치마려(津史主治麻呂)가 견신라사로 신라에 파견된 기록이 있다. 율령제 하의 관료 육성 기관인 대학료(大学寮)에서도 왕진이의 후손들이 다수 교관으로 가르쳤다. 왕진이 가문이 대대로 문필가로서 조정에서 일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국보 중에는 왕진이의 손자인 선왕후(船王後)의 청동 묘지명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왕후는 비다츠 덴노 치세에 태어나 스이코 덴노 때부터 조정에서 일했으며, 조메이 덴노 때에 대인(大仁)[2]의 관위를 받았다. 대인은 수도 인근의 수장층에게 주어졌던 관위라는 점에서 왕후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왕후는 641년 사망해 668년에 부인과 함께 묻혔다.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왕지인(王智仁)의 손자, 나패고(那沛故)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3. 백제 왕족?[편집]


왕진이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후손 진련진도에 의해 790년 간무 덴노의 치세에 알려진다.

백제왕인정(百濟王仁貞), 백제왕원신(百濟王元信), 백제왕충신(百濟王忠信), 진련진도(津連眞道) 등이 표를 올려, “저희들은 본계가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중략) 귀수왕은 공경하게 사신의 뜻을 받들고 종족 중에서 택하여 그 손자인 진손왕(辰孫王) 일명 지종왕(智宗王)을 보내어 사신을 따라 입조하게 하였습니다. 천황은 가상히 여겨 특별히 총애를 더하고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에서 비로소 서적이 전해지고 유풍이 크게 열렸으니, 문교의 일어남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닌토쿠 덴노는 진손왕의 장자인 태아랑왕(太阿郞王)을 근시로 삼았습니다. 태아랑왕의 아들은 해양군(亥陽君)이며, 해양군의 아들은 오정군(午定君)인데 오정군은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맏아들은 미사(味沙), 가운데는 진이(辰爾), 막내 아들은 마려(麻呂)입니다. 이들로부터 3성이 처음 나누어졌는데, 각각 맡은 직책을 따라 성씨를 이름했습니다. 갈정(葛井)·선(船)·진련(津連)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연성(連姓)을 고쳐 조신(朝臣)의 성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사는 곳의 이름을 따서 관야조신(菅野朝臣)이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속일본기 권40 간무 덴노 엔랴쿠 9년(790) 7월 17일#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왕진이는 백제의 왕족이다. 그러나 이것은 왕진이 가문이 먼저 도래한 왕인 가문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 《고사기》,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왕인이 귀수왕 때에 도래했다는 점, 황태자의 스승이 되어 유학과 서적을 전파했다는 점이 모두 일치한다. 진손왕을 왕인으로 대체하면 같은 이야기가 된다. 왕진이의 후손들은 기존의 도래계 관료 집단인 왕인 후손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왕인 전승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백제왕씨[3]들을 대동한 것은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명의만 빌린 것이다. 간무 덴노는 백제계 도래인들을 높이 대우했다. 특히 백제왕씨들에게는 역을 면제하라는 칙까지 내릴 정도였다. 왕진이의 후손들도 이러한 특별 대우를 기대하고 시조에 대한 전승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더욱 고귀한 가문임을 내세우려고 계보를 바꾸는 사례는 나라 시대 말과 헤이안 시대에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왕인의 후손들은 아예 자신들이 전한 고제의 후손이며, 선조가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계보를 주장했다.


4. 참고 문헌[편집]


  • 서보경(2012), 大學寮의 형성과 변화를 통해 본 韓國系移民, 한국연구재단 연구과제 결과보고서(2012S1A5B5A07037627)
  • 나행주(2015), 일본고대국가와 백제계 도래인 - 특히, 백제계 문필(史姓)씨족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 -, 한일관계사연구 제52권
  • 서보경(2016), ‘同祖’계보의 변화를 통해 본 왕인, 왕진이계 씨족, 한일관계사연구 제53권
  • 박재용(2017), 고대 일본의 소가씨와 백제계 씨족, 한국고대사연구 제86호
  • 연민수(2018), 왕진이 일족의 문서행정과 시조전승, 동북아역사논총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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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53년 6월에는 일본이 백제에 박사들을 교대시켜 주고 서적과 약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다. 백제는 요청을 받아들여 554년 2월에 오경박사와 승려 등을 보냈다.[2] 쇼토쿠 태자의 정책 중 하나로 605년부터 648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12계 관위 제도 중 3번째의 관위.[3] 백제왕씨의 시조 부여선광은 의자왕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