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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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작
3. 줄거리
4. 의의·평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월하의 맹서는 일제강점기 1923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극영화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관제 영화로 1,700원을 출자하여 만들어졌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연 작품으로 기승전결의 줄거리를 온전히 필름으로 소화한 극영화이다.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1]에서 기자와 관계자 100여명을 초청해 시사회를 한 후 서울과 경기도를 시작으로 지방을 돌며 무료 상영하면서 저축 사상을 선전했다.

보통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개봉한 의리적 구토를 꼽으나, 이 작품은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 연극에서 열차 장면과 같은 특수한 구간을 영화로 일부 상영한 방식의 연쇄극이라 연극에 가깝다는 이유로 월하의 맹서를 한국 최초의 영화로 꼽는 주장도 있다.


2. 제작[편집]


각본과 감독 윤백남이 제작했고 민중극단의 이월화(정순 역), 권일청(영득 역), 문수일(정순 부 역), 송해천(영득 부 역), 안세민(처남 역), 김응수(노름꾼 역), 나효진, 안광익 등이 출연하였다. 촬영과 편집은 일본사람인 오타 히토시가 맡았다.


3. 줄거리[편집]


영득(권일청)과 정순(이월화)은 약혼한 사이다.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영득은 불량배들에게 휩쓸려 주색에 빠진다. 급기야 가산까지 탕진한 영득은 노름방에서 몰매를 맞고 사경에 이른다. 정순의 정성 어린 간호로 쾌유는 되었으나, 빚 독촉 때문에 삶의 의욕조차 잃어버린 영득에게 정순의 부친이 그 빚을 갚아준다. 푼돈을 모아 저축해 둔 돈이었다. 영득은 비로소 저축의 고마움을 깨닫고 정순에게 참된 삶을 살 것을 맹세한다.


4. 의의·평가[편집]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무성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조선인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이기도 하고 이월화[2]라는 스타가 등장한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를 기점으로 조선은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임화는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초기 영화사를 검토하면서 "체신국의 의뢰로 만든 저축사상 선전영화인 월하의 맹서는 관청의 광고지와 같은 한 선전수단에 불과하여 완전히 독립한 조선 영화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혹평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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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회현동 부근에 위치[2] 이월화가 정말로 조선 최초의 여배우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한국 영화사는 이월화를 조선 최초의 여배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처럼 매우 기구하고 불행하였는데, 친부모가 누군지, 본인의 진짜 성이 뭔지도 모른채 태어나 여배우가 됐지만, 생활고 때문에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 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나이 30에 일찌감치 요절하였다. 여담으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무리 잘 나가는 여배우라도 수입이 별로 없었고, 또 기생이 배우가 되고, 배우가 기생이 되는 일도 매우 흔했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과거에는 연예계를 화류계 취급하며 깔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세월이 흐르면서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많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