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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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應圭
(1131 ~ 1175)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자는 빈왕(賓王). 초명은 유원규(庾元規)로 유필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무송현 사람으로 성품이 밝고 슬기로웠으며 풍채가 아름다워 당시 옥인(玉人)이라 일컬어졌고, 글을 잘 지었지만 두 번이나 과거에 낙방되었으며, 내시로 들어갔다가 빠르게 승진해 참관이 되었다. 지론이 바르고 곧았으며 맡은 일을 과감하게 처리했으며, 마치 숙성한 것 같아 동료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남경의 수령으로 나아가 투명하고 대쪽 같은 정치로 사람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병이 들었는데도 나물국만 마시자 어떤 아전이 몰래 꿩 한 마리를 가져다 놓았고, 아내는 남편이 평생 동안 남이 보낸 것을 받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깨끗한 덕행에 누를 끼치겠냐고 하자 아전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후 합문지후에 올랐다가 고공원외랑으로 옮겼다.

1170년에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그 명성을 들은 명종이 내시로 불러들이면서 공부낭중에 임명되어 명종의 즉위를 금나라로부터 인준받기 위해 표문을 가지고 금나라로 파견되어 의종이 병을 앓아 치료할 수 없어서 동생이 즉위했다고 하자 금나라에서는 왕위를 찬탈했다며 인준하려 하지 않았다. 유응규는 조서를 받기 전까지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금나라에서는 유응규의 충성에 감탄해 조서를 내리고 예우를 했다.

돌아와서는 그 공으로 군기감 겸 태자중사인이 되고 금사를 하사바았으며, 재상들이 유응규의 자손들을 기용해 후대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명종이 이를 따랐으며, 금의 사신들은 항상 유응규의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 궁궐에 불이 나자 경녕전에 있는 선왕들의 어진과 중서성에 있는 국인을 보호했다.

1173년에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자 이의방윤인첨에 대해 김보당의 모의를 안 것을 의심해 잡아들이게 하고, 한 군졸이 윤인첨에 이어서 자신을 잡으려 하자 미천한 군졸이 재상과 낭관을 욕보이냐고 꾸짖고, 장군들을 찾아가 윤인첨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설득해 윤인첨이 풀려날 수 있도록 했으며, 전중감으로 옮겼다.

1174년에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고 명종의 명으로 공부시랑으로 임명되어 여러 성들을 설득하러 갔다. 그 와중에 이의방이 죽자 군중이 소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해 그들을 위로하러 갔는데, 군중에서는 문신이 승병을 부추겨 변을 일으킨 것이라 의심해 윤인첨을 죽이려 하자 유응규는 정중부에게 이를 알리면서 정중부가 그들을 타일러서 오해를 풀어 멈추게 했다.

1175년 사정유와 함께 조위총에게 가서 그를 설득했고, 돌아가는 도중에 사정유가 병이 나서 어딘가에서 묵으려 하자 유응규는 위험하다고 급히 가야 한다면서 개경에 도착했으며, 조위총이 군사를 보내 추격했다가 붙잡지 못했다. 같은 해 9월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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