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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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趙位寵
(? ~ 1176)
고려의 문신. 조위총의 난의 주도자.
비록 나라의 절반을 뒤흔들 만큼 큰 반란을 일으켰던 데다가 금나라에 땅을 바치려고 시도하기까지 하는 등 부정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경대승을 제외한 무신정권 권력자들이 반역 열전에 기록된 반면 조위총은 당당히 제신 열전에 기재되었다. 다른 무신정권 권력자들과 달리 반(反) 무신정권을 표방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에 대한 평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2. 생애[편집]
사서에는 그의 가계도 관련 기록에 대해 잃어버렸다고 나와 있으며[1] 의종 말에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가 되었다가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의종을 시해하고 명종을 왕으로 옹립하자 1174년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 제거를 명분삼아 동, 북 양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현담윤이 성주인 연주성(延州城)을 제외한 절령 이북의 40여 성들이 호응했다. 조위총은 금나라의 힘을 빌리고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따르는 서경 일대 40여 성을 들어 귀순하겠다고 청했지만 금나라[2] 에서는 고려와의 외교 관계 악화를 염려해 조위총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경에서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토벌군을 보내자 조위총은 군사를 보내어 여러 차례 맞서 싸우게 했다. 중간에 갑오정변으로 정균에 의해 이의방이 피살되자 윤인첨이 공격을 보류했다가 다시 공격해 서경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감행했다. 명종이 유응규, 사정유(史正儒) 등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조위총은 항복하겠다고 했다가 변심하고 정예 기병을 보내 동선역까지 추격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개경의 군사들이 연주(漣州)를 여러 달 포위해 연주에서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냈지만 개경 군사들의 기습으로 1,500여 명이 죽고 250여 명이 사로 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조위총은 이의방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례도 치루지 않는 죄에 대해 말하면서 발상을 하고 희릉에 장사지냈다. 서경이 여러 달 동안 포위당해 식량이 떨어지면서 시체를 먹는 지경까지 이르자 때때로 나와서 싸움을 걸었는데 윤인첨이 응하지 않았으며 결국 서경이 함락당하자 사로 잡혀 참수된다. 승전을 알리기 위해 조위총의 목은 병마부사 채상정에 의해 개경의 조정으로 보내졌으며, 저자에서 효수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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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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