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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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출신 호주 변호사
윤수용
尹壽龍 | Bruce Yoon


파일:210527 BruceYoon.png

출생
1959년 4월 2일 (65세)
부산광역시
거주지
Perth Australia
학력
대입검정고시 (통과)
Edith Cowan University (정보처리학 / 학사)
Murdoch University (Bachelor of Divinity / 3년수료)
Charles Darwin University (법학 / LLB과정 졸업)
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법학 / GDLP과정 졸업)
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법학 / Master of Law 과정 졸업)
병역
경찰청 전투경찰 56기 만기전역

현직
호주변호사
서부호주한인회 자문변호사
서부호주경제인협회 자문변호사
경력
경찰청외사형사(김해공항100호실)
주식회사 아소텍 대표이사
Avnet Korea 한국지사 전략기획이사
교원그룹 고문변호사
동부그룹 호주지사 자문변호사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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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2.2. 경찰시절
2.3. 호주유학
2.4. 유학후 사업
2.4.1. 동업
2.4.2. 검사의 횡포
2.4.3. 신학을 하다
2.4.4. M&A
2.4.5. 법대진학까지
3. 종교관
4. 정치관
5. 저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외사형사출신 호주변호사이다. 現 Chan Galic Barristers, Solicitors & Notary Public의 파트너 변호사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1959년 2월 2일, 부산광역시 대청동에서 가난한 목회자의 3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
부산 동래구 소재 부곡중학교 1학년 시절,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기성회비와 학교 준비물등을 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 보내거나 수업시간 준비물 미비로 벌을 세우는 등 학교가는 것이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벌 받으러 갈 정도가 되어 중도에 1학년 1학기때 학업을 포기하고, 대신 어려운 가정을 위하여 신문팔이나 공장을 전전하면 일찌기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으나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면서 대학 진입의 꿈을 키웠다.
한국남성이 사회생활을 무난히 하기 위해선 군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찌감치 전투경찰에 지원하여, 제주도 경찰국소속 해안초소및 제주공항경비대를 거쳐, 경남경찰국 제1기동대창설 요원으로 근무중, 1982년 수경 (육군병장에 해당)으로 36개월 만기전역하였다.


2.2. 경찰시절[편집]


전역후 고리원자력 발전소에 있던 미국의 세계적인 건설업체인 벡텔(Bechtel)사에 영어 특기생으로 채용되었으나 동시에 9급 경찰공무원 합격소식을 접하고 부모님의 권유로 경찰공무원에 투신하게 된다. 경찰 근무중 첫 배명지로 중부경찰서 동광파출소에 배치되었는데 이곳은 윤수용변호사가 태어난 곳이자 어린시절 미아로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던 곳이기도 하였다.
동광파출소는 주변에 여러 매춘업소가 밀집해 있어 어린 정의감으로 포주들을 혼내어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오랜세월 경찰간부들과 유착되어 영업을 해 오던 포주들에게 윤수용은 마치 영화 투캅스에 나오는 신임 경찰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해마다 여름만 되면 각 경찰서에서 바다경찰서로 파견인력을 뽑아 보내기도 하는데, 다른 경찰관들이 꺼리는 곳이지만 윤수용은 자진해서 지원하여 수상구조등의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후 전국 경찰관 영어경진대회에서 1위를 하여 외사경찰에 발탁이 될 수 있었으며, 아무런 빽도 없는 윤수용은 당시 최소 국회의원 연줄이 없으면 근무할 수 없다는 김해공항 100호실에서 근무하면서 공항내 면세점, 안기부, 세관등의 결탁으로 수많은 밀수가 이루어 지고, 국회의원이나 국영기업사장등의 불법외화반출은 막지 못하면서 기껏 애매한 서민들이 학비나 생활비로 외화를 가져가는 것만을 단속할 수 있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호주유학을 결심한다.


2.3. 호주유학[편집]


1985년 당시 공항100호실에서 외사형사로 근무중, 옆책상에 근무하던 동료 여경과 결혼하여 1986년 부부경찰로 신문, 방송등에 처음 소개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껴,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찾던 중,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1987년 제1회 자비유학시험을 거쳐 호주유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두사람이 동시에 경찰공무원직을 퇴직하고 먼 이국땅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양가집 부모는 물론, 주변 친.인척들이 모두 걱정과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호주 퍼스를 유학지로 선택한 이유는 한국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서 공부만 하겠다는 뜻이었는데 1987년 8월 퍼스에 도착해 보니 이미 상당수의 한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으며, 서부호주한인연합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이때 교제하던 한인들은 지금도 가족처럼 교제를 하고 있으며, 1987년 이후 지금까지 퍼스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퍼스로 돌아오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다.
부인과 함께 경찰관 퇴직후 받은 퇴직금은 고작 500여만원 정도였고, 당시 전세금을 모두 합쳐 호주달러를 바꾸니 약 1만5천불 (당시환율 550원 정도) 정도 되었다. 이 돈으로 자동차구입등 생활기초자금으로 사용하고, 1년 학비 약 8,000불 정도 납입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윤수용변호사는 Full Time으로 일하고 Full Time으로 공부할 수 밖에 없었고, 부인 역시 공장에서 Full Time으로 일하며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면서 공부하였다.


2.4. 유학후 사업[편집]


1990년 아들이 태어나 마지막 학년은 매우 힘든 시기였다. 당시 한인교회에서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등의 봉사활동도 겸하여 하였던 터라 결국 어느 한가지를 포기해야해서 교회의 모든 봉사활동을 접고, 집사직분도 거절하였다. 다행히 1990년말 모든 과목을 통과하여 졸업할 수 있게 되면서 당시 근무하던 호주 회사의 사장이 영주권 스폰을 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거절하였고, 모 한인 사업가도 특별히 영주권을 받도록 해 줄테니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호주에 남으라고 하였지만 자기 힘으로 영주권을 받겠다며 모두 거절하였다. 이때를 회상해 보면 새로 태어난 손주를 윤수용의 부모에서 보여 드리고 싶었고, 그간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학후 당시 처음 소개된 독립기술이민을 신청한 후 첫 직장으로 한국정보산업연구소에 취업하였지만 취업후 동 회사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모여 운영하는 회사임을 깨닫고 서로의 가치관에 충돌을 느껴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여기서 만난 이씨에게 윤수용이 호주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시연해 주자, 이 소프트웨어로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여 유엔아이 컨설팅이라는 동업회사를 창립하게 된다.


2.4.1. 동업[편집]


당시 윤수용이 호주 유학중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일명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으로 Computer Aided Software Engineering (CASE)으로 알려져 있는 기법이었으나 한국내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많은 사람들로 부터 관심을 받았다. 이 소프트웨어를 다듬어 유엔아이의 기적 (미라클), 즉 유니클 (Unicle)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씨는 동업자로서 자기 이름도 저작자로 넣어달라도 부탁을 하여 별 생각없이 그의 이름을 공동저작자로 등록해 주었다. 이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유니클"이라는 책을 만들어 출판하게 되었는데 윤수용은 이때 원고를 본가가 서울에 있던 이씨에게 주면서 서울가는 걸음에 출판사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몇개월뒤 책이 출판되어 나왔는데 저자 이름이 "위ㅇㅇ"이라고 찍혀 있어 어아해 하며 왜 저자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이씨에게 말하자 이씨는 원고를 자기 부인 (위ㅇㅇ)이 출판사에 전달하였는데 출판사가 원고를 전달한 자기 부인이 저자인 줄 잘못하고 실수로 인쇄하였다고 하였다. 윤수용은 그럼 2판 인쇄부터는 제대로 인쇄토록 하고 실수라고 여기고 넘어 갔으나, 이후 이씨는 윤수용의 컴퓨터에서 소스코드를 절취하고 회사자금을 모두 빼 돌리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윤수용은 동업자 이씨에게 더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동업계약을 파기시켰다. 이씨 부부는 당시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일을 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양심을 믿었는데 이들의 행위로 종교인에 대한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2.4.2. 검사의 횡포[편집]


윤수용은 독자적으로 부산 동래구 사직동에서 한국응용언어공학센터라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호주에서 개발했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켜 "초보자를 위하여"라는 뜻의 "For Biggner"의 약자로 포너(Forner)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출시하였고, 당시 서울의 대리점과 독점공급계약을 맺으면서 매월 500만원씩의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일반인들의 한달 평균 급여가 약 8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공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부산 동래경찰서에서 포너가 저작권법을 위반한 물건이라면서 출두명령서가 날아왔고, 법원에서는 저작권법 위반으로 1억의 손해배상및 가처분신청이 제기되어 사실을 알아 보았더니 고소인이 위ㅇㅇ과 이씨 두사람으로 되어 있었고 자신들이 원저작권자라는 증거로 실수로 출판되었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유니클"과 이씨를 공동저작권자로 등록해 줬던 프로그램 등록증이었다. 윤수용은 동래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그간의 사실을 모두 설명해 주자, 경찰은 고소인이 나쁜 사람이라며 무혐의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1억원의 민사소송에 대하여는 부산의 어느 젊은 변호사를 선임하여 사건을 맡겼다.
그러나 당시 변호사나 법원의 판사들은 소스코드가 무슨말인지 조차 몰라 소송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부산검찰청 동부지청에서 이ㅇㅇ검사가 전화를 하여 검사실로 방문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윤수용이 검사실에 방문하자 이전에 동래경찰서에서 무혐의로 일단락 된 것을 이씨 부부가 검찰청에 다시 고소장을 제출한 사건이었다. 이미 동래경찰서에서 조사받았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말하자, 검사실에 있던 수사관이 무혐의로 끝났다고 해도 "조사는 우리가 다시 할 수 있으니 협조해 주시오" 라며 검사실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조사는 하지 않고, 하루종일 검사실 의자에 앉혀두기만 하였다. 저녁시간이 되자 오늘은 늦었으니 조사를 못하고 내일 아침 일찍 검사실로 조사 받으러 다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도 검사실에 하루종일 앉혀 두고 조사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약 1주일을 괴롭힌 다음 검사실의 수사관이 "윤수용씨, 뭘 그렇게 힘들게 사냐? 그냥 소프트웨어만 포기하고 새로 개발하면 되지 않냐?"하며 회유를 하기 시작하였다. 민사소송까지 걸려 있던 터라 절대로 이씨부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수사관은 "그럼 조사를 더 받아야지. 저기 앉아 있어요"라며 윤수용을 아무일도 못하게 붙잡아 두고 이런식으로 방해를 하였다. 검사실의 횡포에 참지못하고 윤수용은 이씨부부를 부산지방검찰청에 저작권법위반및 절도등의 혐의 맞고소를 하였다. 그러자 부산지검에서 고소인조사를 하겠다고 윤수용을 불렀는데 이번에서 고소인인 윤수용에게 "동업을 하다 동업자를 고소하는 놈이 어디있냐?", "지저분한 놈"하면서 고소인인 윤수용을 오히려 억박지르며 당장 고소를 취하하든지 동업자와 합의를 보라고 하였다. "이미 동부지검에 이씨부부가 고소한 사건이 조사중이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자 내일 동업자 이씨를 함께 부를테니 합의를 보라고 하였다. 다음날 이씨가 부산지검에 나타나자 검사실의 수사관이 이씨와 함께 호통을 치면서 한때 동업까지 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합의할 시간을 줄테니 당장 고소를 취하하라며 둘만의 시간을 주었다. 이씨는 피식 웃으며 자기 와이프가 모두 진행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서로 고소를 취하자고 합의서를 작성하여 싸인하였다. 그리고 윤수용이 고소한 부산지검의 사건은 즉시 종결되었고, 동부지검의 사건취하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부지검은 이씨부부가 고소를 취하한 적이 없다며 계속해서 조사하면서 윤수용을 괴롭혔다. 이씨와 합의한 합의서를 제출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참을 수 없던 윤수용은 동부지검에 이씨부부를 무고죄로 고소하기에 이르자 이ㅇㅇ검사는 더이상 이 사건을 끌 수 없어 윤수용을 불러 이씨와 함께 서울에 가서 프로그램 저작권 등록관청에 가서 의견서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프로그램 저작권 등록기관에 가서 몇시간을 기다렸지만 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동부지검 검사실에 가서 이씨가 나타나지 않아 의견서를 못받았다고 하자 "사건을 해결하고 싶으면 이씨를 억지로라도 데려가야지 혼자만 갔다왔다"며 오히려 윤수용에게 호통을 쳤다. 그런 와중에 이ㅇㅇ 검사와 수사관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고성을 지르는 말싸움이 일어 났고 그 광명은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나중에 이ㅇㅇ검사는 윤수용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부산대학의 컴퓨터공학과 교수에게 윤수용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맞는지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윤수용은 해당교수에게 확인서를 받기 위하여 모든 소스코드를 제공하여야 했고, 결국 해당교수는 윤수용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맞다는 확인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 확인서로 윤수용을 무혐의처분할 수 밖에 없게되었고, 그 결과 이씨부부는 무고죄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이씨 부인 위ㅇㅇ은 검사실 안쪽 방에서 펑펑소리를 내어 울었다. 좀 있다 이ㅇㅇ 검사가 나와서 "윤수용씨, 그동안 이씨부부로 고생은 했지만 당신죄는 혐의가 벗어났으니 무고죄고소한 부분은 취하해 주는게 어떻겠느냐?"며 회유를 하였다. 윤수용은 "이 사람들의 악행은 참을 수가 없으니 내 손으로 취하 해 줄 수 없다"고 하며 검사실을 나가려고 하자 수사관이 문을 딱 걸어 잠그고는 하는 말이 "당신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당신을 다른 건으로 조사할 수 있으니, 취하하기 전에는 돌려보내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고소취하를 해 주지 않을 수 없었고 검사실 수사관이 윤수용을 대리하여 작성한 고소취하서에 지장을 찍어주자 그제서야 검사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나중에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어 헛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부지검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지만 이ㅇㅇ검사나 수사관이 그일로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민사법정에 설명하자 민사법정의 판사들도 서로 합의하에 소송을 종료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고 윤수용의 변호사는 윤수용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대로 합의종결에 동의하였다.
약 1년여 시달려 온 탓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변호사의 그러한 행동에 이의제기할 여력조차 없어 이 사건은 그대로 윤수용의 가슴속에 평생 한으로 남아 있다.


2.4.3. 신학을 하다[편집]



1994년 약 1년에 걸친 검사의 횡포와 소송의 피로감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을 때 호주 영주권이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그사이 딸이 태어나 딸의 영주권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호주 이민국에 통보하여 딸의 영주권도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해 10월경 딸의 영주권이 나오자 마자 두말없이 짐을 정리하여 호주로 정식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사이 호주 퍼스는 한인연합교회가 분열되어 교회가 수개로 갈라져 있었고, 유학당시 알던 교민분들이 서로 자기 교회로 출석해 줄것을 요청하여 그냥 어느 교회에도 소속되지 않고 호주교회에 출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되자 각 교회의 교민분들이 모두 윤수용이 다른 교회로 간 것으로 생각하고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호주에 도착하자 마자 노스브릿지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프로그래머로 어렵지 않게 취직하여 호주이민생활을 시작하였지만, 한국에서 못다한 신학공부에 미련이 남아 호주의 침례교 신학과 연계된 머독대학의 신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니깐 침례교소속의 신학생으로서 머독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98년 신학대학을 졸업할 무렵 침례교 목사후보생으로 지원을 하였고, 목사후보자 인터뷰가 윤수용의 전 가족을 대상으로 하루종일 실시되었다. 침례교의 평가목사 약 8명이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윤수용및 그 가족들을 번갈아 가며 인터뷰를 하면서 윤수용의 전 일생을 점검하던 중 한 목사가 "아버지는 한국에서 장로교 목사인데 왜 침례교 신학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침례와 세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윤수용은 "침례나 세례나 모두 상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였고, 그 이후 목사후보 평가결과서는 "침례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향후 6개월간 침례교 교리과목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목사후보를 받아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실망하여 조건적 목사후보를 수락할지 고민하다가 때마침 한국의 모 지인이 미국의 아브넷그룹과 합병 협상을 한다며 협상대표로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여 1998년 말 급히 신학을 모두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이후 가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불러들여 또 다시 한국에서 살게되었다.


2.4.4. M&A[편집]


한국에서 아브넷그룹과 합병협상은 매우 재미있었다. 다국적 기업 아브넷의 협상대표단들은 영국, 미국, 홍콩등의 변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협상을 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미국, 영국, 홍콩등으로 잦은 해외 여행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호주의 생활과 그곳 현지 생활을 비교 평가할 기회가 있었다. 결론은 역시 호주 생활이 제일 낫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인이 운영하는 반도체 기업은 한국, 미국, 홍콩에 있었는데 이들 회사를 모두 아브넷에 좋은 가격에 넘길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는 IMF가 시작된 시국이라 한국의 지인은 아브넷과 합병시키는 것이 좋은 기회였고 아브넷 이기회에 한국에 싼 가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가 맞아 떨어졌다.
아브넷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합병후 현지 업체에 고용된 직원들이 대부분 1-2년 내에 모두 퇴직함으로 합병회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위험요소를 해소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모토롤러 한국지사장으로 있던 분을 합병후 아브넷 한국지사의 초대사장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이 분과 함께 미국의 아브넷 본사에 들어가서 인사를 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기업과의 합병이 무난하게 진행되어, 합병후 윤수용은 모토롤러 전 한국지사장을 초대사장으로 윤수용은 초대전략기회이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선릉역에 위치에 있었는데 합병후 직원들의 실적을 취합하여 보고하고 새로운 시장 개척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를 주관하거나 주요 고객사의 사장들을 만나는게 주 업무였는데 이때 회사를 매각한 지인이 윤수용에게 합병을 성공적으로 이끈 댓가로 3억원을 주겠다고 제안하였고, 그 돈을 하고 싶은 사업 자금으로 마음껏 사용하라고 하였다. 약간의 고민끝에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2000년초 주식회사 아소텍이라는 법인을 설립하여 마포구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2.4.5. 법대진학까지[편집]


윤수용이 과거 동업자 이씨와 검사의 횡포로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소프트웨어 사업을 이제는 독자적으로 마음껏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우선 소프트웨어를 윈도우즈 기반으로 변경하여 프로그램 이름을 히브리어의 하인이라는 뜻을 가진 에베드(Ebed)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벤처기업으로 신청하여 어렵지 않게 벤처기업 승인을 받았다.
사업은 승승장구하는 듯 하였지만, 매출은 신통치 못했다. 사용자들이 윈도우즈기반의 소프트웨어 개발도구를 사용하는 데 익숙치 못하였고, 프로그램 기능적으로는 훌륭하였지만 디자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윤수용의 직원 4명이 모두 영업및 관리사원으로만 뛰고 있었고, 개발은 윤수용 혼자서 감당하다 보니 프로그램의 질적 발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과거 포너의 목포지역 대리점이었던 모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목포에서 메카트로닉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서울로 진출하고 싶다고 하여, 윤수용은 목포회사의 직원들을 활용하고, 목포회사 사장은 윤수용의 회사를 서울 진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서로 회사를 합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합병도 얼마 못가 목포회사의 배신으로 깨어졌고 결국 회사 직원들은 모두 퇴직하게 되었다. 이때의 직원들은 아직도 윤수용과 인연을 맺어가고 있다.
윤수용은 이대로 한국의 생활을 접고 호주로 가기 아쉬워 대전에 있는 미생물배양기 제조회사와 손을 잡고 미생물배양기 제조및 수출업에 뛰어 들었다. 이때 이란 정부와 협력할 기회가 생겨 기술자 1명을 데리고 이란 테헤란에서 상주하게 되었다. 한편, 가족들은 먼저 호주로 이주하여 살도록 조치를 해 두었다. 이란 정부가 지불한 계약금은 가족들이 생활하는 주택의 모기지를 갚는데 모두 사용하였다.
이란에 도착하여 상주하게 되자 호주 계좌로 이체하기로 한 중도금을 지불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어 테헤란 주재 한국 대사관에 이란정부의 계약위반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문의를 하였더니 이란은 북한과 같은 폐쇄된 사회이기 때문에 소송을 해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 있다고 하여, 이란 정부의 대리인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그때까지도 중도금이 지불되지 않아 미련없이 철수하였다. 호주로 온 직 후 이라크에서 한국인 선교사 김선일이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윤수용의 가족들은 호주로 돌아오길 잘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다시 호주로 돌아 온 윤수용은 여러 회사에 지원서류를 내었지만 한곳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력서상 너무 경력이 너무 변화 무쌍하였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3. 종교관[편집]


윤수용은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때 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해아래 있는 것은 헛되고 또 헛되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떠 올렸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에 자신을 위한 것은 모두 욕심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천국에 보물에 쌓아두라는 말씀 때문에 세상의 재물을 쌓아두지 못했다.
윤수용의 이러한 신앙관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한 집사님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하셨다. 올바른 신앙은 자신과 가족을 먼저 돌보고 그 이후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은 예수의 사랑을 본 받는 것이고 예수의 사랑은 바로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 주는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나가다 구걸하는 거지를 보고 호주머니에서 5000원짜리를 찾아 주고 나면 더욱 더 괴로워하였다. 5000원이 아니라 10000원을 줄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책감이 더 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민을 하다가 20대초반에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처음가 본 곳이 통일교였다. 이곳의 청년들은 윤수용과 같은 고민없이 그냥 문선명선생의 가르침대로 번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두번째로 가본 곳이 몰몬교였다. 몰몬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모두 한국어가 유창하여 윤수용에게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몰몬교의 창시자 요셉스미스가 여러종파를 두고 어느 종파에 소속되어야 할 지 번민가운데 기도하자 천사가 나타나서 "너희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말라"라며 황금동판을 주었는데 그게 바로 몰몬경이 되었고 이 몰몬경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몰몬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매우 신선한 가르침이었지만 이내 몰몬교의 일부다체제나 12장로에 의한 교회 운영등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된다는 느낌이 들어 몰몬교를 빠져나왔다.
여호와의 증인은 유학후 한국에서 첫 직장을 잡은 것이 공교롭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이들과 함께 교제하며 여러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본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반듯하고 종교적 신념이 있는 분들로 보였지만 회사내의 이들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탐욕속에 권리다툼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인간이었고 이들도 여자관계, 돈관계등 다른 타락한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1995년 호주의 침례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Murdoch University의 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한국에서 이미 신학공부를 하던중 유학을 하였기 때문에 중단한 신학공부를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8년 목사후보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장로교 목사인데 왜 침례교 신학을 했느냐?" 또는 "침례와 세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종파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다" "침례와 세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등의 대답을 하자 침례교 못하가 되기에 교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며 6개월간 침례교 교리를 공부하는 조건으로 침례교 목사후보를 받아주겠다고 하여, 크게 실망하고 조건부 목사후보를 수락하지 않고 1999년 한국으로 돌아 가게 되었다. 이때 윤수용은 인간으로서 이땅에 태어났다면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는 결론을 내리고 신앙적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윤수용은 자기 자녀들이나 주변인들에게 필요없이 믿음을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4. 정치관[편집]


한때 경찰공무원으로 주기적으로 정신교육을 받던 때에는 대한민국의 좌파는 빨갱이 집단으로 다른사람들이 이들의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박정희는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훌륭한 위인으로 믿었고, 김대중은 북한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빨갱이로 믿었다. 후일 김대중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때 어떻게 빨갱이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 수 있는 지 의아해 했고 조금식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김대중씨가 대통령 재직시 북한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는 뉴스를 듣고 역시 위험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한국의 보수는 옳고, 진보는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나쁜 세력으로 보던 시각은 호주에서 살면서 호주 정부가 국민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하여 구석구석 정책을 펴는 것을 보면서 정부는 국민에게 군림하고 의무만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관리는 국민들을 위하여 일하는 공복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한국에서 자라면서 경험했던 것들, 경찰공무원으로 경험했던 수많은 부정부패와 비리들, 사회곳곳에서 갑질하던 보수세력들을 보면서 조금씩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모두 같은 높이의 의자를 국민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평등이라고 믿었지만 당시 한국에서 보지 못한 호주의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지금은 한국도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을 운영), 나이나 인종, 성별등을 근거로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등을 보면서,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높은 의자를 키가 큰 사람에게는 낮은 의자를 나누어 주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었다. 전직 대통령 자살을 했다니. . .이후 윤수용의 정치관은 180도로 변해갔다. BBK사건을 보면 분명히 이명박씨가 실소유주라는 증거가 곳곳에 있음에도 검찰수사발표에서 그러한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 버렸다. 과거 윤수용이 부산 동부지검에서 한 검사에게 시달리면서 검찰의 생리를 가까이에서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사건을 모의, 은폐하거나 적반하장으로 되치기 하는 수법은 역사적으로 보수세력의 전형적 수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후보로 부산의 초원복국집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선거전략을 펴자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 졌을때 "아, 이제 김영삼 후보는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보수세력은 오히려 불법도청을 트집잡아 여론을 진보 후보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되돌렸다.
이러한 되치기 사건은 역사적으로 곳곳에서 그 사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깨어 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세력들이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정치를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5. 저서[편집]


1.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유니클
2. EBED -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램
3. 하나님을 조종하는 리모콘
4. 내가 경험한 한국과 호주
5. 앞서가는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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