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충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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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원인
3. 경과
4. 의의 및 결과
5. 기타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거란족장 이진충과 그의 처남인 손만영이 당나라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이라서 ‘영주의 난’이라고도 한다.


2. 원인[편집]


고종 사후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돌궐과 토번 등 주변국에 시달리게 된 이래로, 당은 이민족들을 강제로 징집하게 되었다. 이민족들에게 시달리던 이래 당의 기미지배 체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요서 지역의 영주(營州)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일대의 여러 종족들을 관할 통제했다. 이곳에는 본래 거란족이 살고 있었으나 당나라의 사민정책에 의해 이주한 고구려· 말갈인 등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때 영주를 관할하던 인물은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였다. 조문홰는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이민족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매겨 착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문홰에 대한 원성이 가득했다.

696년에 접어들면서 수년 째 거듭된 가뭄으로 영주 거주민들은 모두 혹독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도독 조문홰의 수탈과 혹형은 지속되고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이진충 휘하의 젊은 거란 장수 한 사람이 조문홰를 찾아가 백성을 구휼할 것을 요청하다가 오히려 혹형을 받아 반죽음 상태로 내쳐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당나라에 의해 국가가 와해되면서 강제로 이주되어 영주까지 흘러오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모두 당나라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3. 경과[편집]


696년 5월 12일, 송막 도독이자, 거란족 연맹 수장인 이진충, 귀성주 자사 손만영[1]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성을 함락시킨 뒤 조문홰를 참살하고, 그 뒤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는다. 이후 군사가 수만으로 불어났다. 5월 25일, 측천무후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이다조[2] 등 28명의 장수들을 위시한 1차 진압군을 영주로 파견했고, 양왕 무삼사[3]를 유관도안무대사, 요숙을 부사로 삼았다. 그러나 당군은 서협석곡의 황장곡에서 거란족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4][5], 장군 조인사[6], 마인절, 장현우가 포로로 잡히고 이들에게 거짓 첩문을 쓰게 함으로써 연비석과 종회창이 이끄는 후속부대가 전멸당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과정은 이렇다. 무주군이 출정하자 이진충, 손만영은 영주 포로를 풀어주며 포로들에게 하소연했다. 이진충은 자신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나, 도독인 조문홰가 가혹하게 통치하여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킨 것이고 관군이 오면 자신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투항했다고 했다. 무주군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진충은 거란의 부락 중 노약자들을 내보내고 약한 소, 양 등은 밖으로 내버려두고 무주군이 약탈하도록 내버려두는 등 무주군의 기강을 해이해지게 하였다. 이를 들은 조인사는 거란이 곧 패할 거라 생각하여 조인사는 빠른 진군을 결심하고 거란을 맹렬히 추격했고, 서협석곡의 황장곡에서 거란군이 무주군을 전멸시키고 선봉이었던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을 사로잡는다.[7] 이후 이들로 하여금 거짓 첩문을 쓰게 함으로써 총관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도 신속히 행군하다가 거란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다.

이 때 거란족에게 죽임을 당한 무주 군사들의 시체가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하니, 사실상 전멸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들은 무삼사는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9월, 당은 범죄자와 노비들 중에 용력 있는 자들을 군에 충원하고 건안왕 무유의를 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진자앙[8]을 그 참모로 삼아 2차 공세에 나섰다. 당군의 공세를 버틸 수 없었던 손만영은 단주로 가서 그곳을 습격했으나, 장구절에게 대패한다. 돌궐의 묵철가한은 당의 황자와 자신의 공주를 결혼시켜주면 거란을 토벌해주겠다고 제의한다. 측천무후는 이를 거절한다. 토벌은 명분일 뿐 거란에 영향력을 갖겠다는 것이라 혼인동맹을 안 줘도 어차피 알아서 칠 것이며, 이 사신을 보내는 순간에도 당을 노략질중이었으므로. 하지만 교섭은 계속 이어간다.

10월, 거란의 이진충이 병으로 사망하고 손만영이 연맹을 이끌게 되자, 이진충의 아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돌궐로 가서 구원을 청했다.

11월, 돌궐의 묵철가한은 당과 교섭해 당에 복속된 하서 일대의 돌궐인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거란의 송막 지역을 공격했다. 돌궐이 거란의 후방을 습격해 이진충과 손만영의 가족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거란족들을 포로로 잡아 손만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손만영은 잔여 세력을 수습해 기주를 함락하고[9] 영주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손만영은 이씨를 지지하는 명분을 내세운다.

무엇 때문에 우리 여릉왕을 폐했는가?

묵철가한은 같은 시기에 당의 승주도 노략질하는 양면 무력시위를 보인다.

손만영이 이끄는 군대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동도호부가 있는 신성을 공략하고자 했다. 이전 포로로 잡은 허흠적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허흠적은 도호부사 배현규에게 미친 도적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니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하였고 이에 분노한 손만영은 허흠적을 죽인 뒤 안동도호부를 공략하나, 그곳을 지키던 도호부사 배현규, 요동주도독 고구수의 저항에 막혔다.

697년 2월, 당은(앞서 건안왕 무유의는 청변도행군대총관이라 새로 이름 붙이고) 왕효걸과 소굉휘 및 안동도호부의 군사들까지 모집해 3차 공세를 시작한다. 안동도호 배현규는 모집하지 않았는데, 즉 이 무렵 안동도호부가 이미 거란 또는 고구려부흥운동에 의해 붕괴했거나, 신성이 포위 중임을 의미한다.[10] 손만영은 당의 진압군을 동협석곡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키고[11] 뒤이어 유주를 습격한다.

이후 무의종, 사타충의, 누사덕이 이끄는 4차 토벌대를 보냈으나, 실패한다. 무의종은 조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낙무정이 이끄는 거란군과 싸우지 않고 조주를 버리고 상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주는 거란군에 의해 도륙당하였다.[12] 그러나 누사덕, 양현기, 장구절이 군을 수습하고 맞서 싸웠다.

돌궐의 습격을 대비해 유성 서북쪽 400리에 성을 지으면서, 당의 단주를 포위공격하는데 후방의 해족들이 배반하여 잠시 철군한다.

6월, 우려대로 돌궐이 거란의 후방을 습격해 후방에 있던 거란인 가족들을 모두 사로 잡자, 손만영과 하북성 전방에 나와 있던 거란인 군대가 동요하고 결국 와해되고 만다. 당도 이에 맞춰 4차 공세를 보내고, 장구절의 군대에 의해 손만영이 패한 뒤, 신병도행군의 무의종과 그 소속 양현기[13]에 의해 결국 하아소가 사로잡히고, 이해고낙무정은 항복했으며[14], 총수인 손만영은 도주 중에 노수 동쪽 인근에서 가노에게 피살당하여[15] 남은 무리들은 돌궐에 투항하고, 난이 종결된다.

700년 이해고, 낙무정이 이진충의 잔당들을 토벌하고[16], 장안으로 개선한다.[17][18]


4. 의의 및 결과[편집]


이진충의 난은 거란족이 자신들의 힘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으며[19][20] 당의 통제력을 약화시켜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 · 말갈족들이 당의 영토에서 탈출해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영주 지역에 붙들려있던 대다수의 고구려 유민들과 고구려계 말갈인들의 집단 탈주가 일어났다. 이들은 요동까지 도주하여 크게 두 무리로 갈라졌으며, 속말말갈계 대다수와 소수의 고구려인들은 만주에 발해국을 건국했으나, 대다수의 고구려인 도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옛 고구려의 3경중 두 곳인 한성(패서) 및 평양성 인근으로 귀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패서지역의 새로운 구심점이 된 송악의 왕건이 고려왕조를 건국 할 때 대부분 흡수되었다.

또한 무씨 일족들이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앞서 말하였듯 무삼사는 서협석곡의 황장곡에서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이 몽땅 포로로 잡히고 그 후속 부대인 연비석과 종회창의 부대가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소식을 듣고 장안으로 도망치고 말았고, 무의종은 조주에서 거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상주로 도주하고 말았다.


5. 기타[편집]


무주 황실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백성들은 무삼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했다는 말을 듣고 아무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측천이 여릉왕 이현이라는 이름으로 군사를 모으니 오히려 민중들이 이현에게 호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현이 태자가 됨으로써[21], 705년 장간지가 정변을 일으켜 무측천이 물러나고 이현이 중종으로 복위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북송 시기 거란족이 날뛸 수 있었던 것은 무측천 시대 일어났던 영주 반란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83회 후반부터 이 내용을 다뤘다.


6. 참고 자료[편집]


  • 경성대학교 교양수업 e러닝 <발해문화와역사> 강의 내용
  • 네이버 지식백과 이진충의 난 [李盡忠-亂]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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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찍이 당의 사신으로 간 이래 인질로 잡혀 있었고, 그 덕에 당의 허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2] 여기서 이다조가 이끄는 군대는 다른 장수들에 비해 거란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한다.[3]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이 무삼사의 밑에서 활약한다.[4] 거란군의 기만전술에 휘말렸다.[5] 게다가 무주군은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6] 양당서에는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자치통감에는 포로가 되었다고 나왔다.[7]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장현우와 마인절만이 포로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치통감에는 조인사도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 등유주대가의 작가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9] 자사 육보적이 거란군에게 도륙당했다.[10] 공교롭게도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에 관련 기록이 남았다. 고자(고구려) 묘지명에 따르면 고자는 아버지 고질과 함께 거란족 반란의 진압군으로 참전했으나 요동의 마미성(麻米城)에서 고립돼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한다. 당시 요동 일대가 심각한 상황이었음이 얼핏 보인다.[11] 왕효걸이 거란군과 맞서 싸웠으나, 후방의 소굉휘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도주하여 어이없이 패하고, 왕효걸은 자결. 훗날 이 상황을 장열이 무측천에게 자세히 보고한다.[12] 양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문서와 자치통감에는 이 사실이 자세히 나와 있다.[13] 돌궐 제2제국의 쿠틀룩을 방어한 그 양현기 맞다.[14] 하아소와 양봉절, 마행위는 처형당했으나, 이해고와 낙무정은 당에서 활동한다. 이해고와 낙무정은 본래 처형당할 위기에 있었으나, 당대 명재상 적인걸이 이들의 재주를 아껴 당의 신하로 삼을 것을 간청해 이해고와 낙무정이 사면되었다.[15] 죽기 전 당으로 돌아가나 돌궐로 가나 신라로 가나 죽을 것이라고 한탄한다.[16] 그 이전 걸사비우를 참살했으나, 천문령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이해고는 별다른 추궁을 받지는 않았다.[17] 무측천은 이 공이 적인걸의 공이라 하였고, 적인걸은 이후 사망. 이해고는 무씨 성을 하사받는다.[18] 또한 이 과정에서 이해고는 이해락을 자신의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이해락은 요동 일대의 말갈을 토벌한다.[19] 원래 거란족은 수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모을 수 있는 군사가 고작 3천 명에 불과한 약소민족이었으나, 수나라가 들어서고 나서 중원 왕조들의 지원을 받아 점차 세력이 강해지다가 당나라 때에 들어서는 마침내 중원 왕조에 반기를 들고 정면으로 맞설 만큼, 세력이 커졌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 이인화의 소설 초원의 향기 1권에서는 거란족들을 가리켜 "불과 얼마 전까지 저것들은 쪼그만 해족들한테도 벌벌 기었어. 그런데 당나라 지원을 등에 업고 자기들이 몽땅 제껴버린다고 설치고들 있으니, 우리들 심정이 X 같지 않겠냐?"라고 비아냥거리는 내용이 나온다.[20] 그나마 이후 손만영 휘하의 거란이 무너진 채 부족 단위 형태로 전락하며 끝이 나는 듯 싶었으나 도리어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다시 세력을 일으켜 나라를 건국, 마침내 대조영이 세운 발해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본격적인 국가로의 발돋움을 시작하게 된다.[21] 이는 적인걸의 간언도 한 몫 했다. 무측천은 무승사와 무삼사를 태자로 삼으려 하나, 적인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뒤 무승사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