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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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SK004_20071016_120201.jpg
이름
임근재
林根載
출생
1969년 11월 5일 (54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0cm, 72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학력
대신고 - 연세대
소속
선수
LG 치타스 (1992~1994)
포항제철 아톰즈 (1995~1996)
감독
대신고등학교 축구부 (1996~ )
서울 유나이티드 (2007~2008)
서울 유나이티드 (2011)
국가대표
3경기 3골 (대한민국 U-23 / 1991)

1. 개요
2. 선수 경력
2.1. LG 치타스 입단
2.2. 너무나 빨랐던 은퇴
3. 지도자 경력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노상래와 함께 데뷔하자마자 득점왕을 차지한 유이한 선수다.

현재는 (서울설문연세FC)에서 감독을 하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LG 치타스 입단[편집]


임근재는 어린시절 초등학교 1학년부터 태권도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다 5학년 때 축구대회에 참가해서 2득점을 터트린 이후 감독의 권유로 축구로 전향했다. 이후 U16, U19, 올림픽 대표팀까지 거친 엘리트 선수였던 임근재는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올림픽 대표팀에서 연속 골을 터뜨려 프로 팀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91년 올림픽 대표팀이 임근재의 2골을 활약을 앞세워 LG와의 연습경기에서 4:0 대승을 거두자 더욱 주목받았고, 그 후에도 서정원과 함께 올림픽 대표팀의 주포로 활약해 끊임없는 관심을 받았다.

그러던 와중 1992 시즌을 앞둔 드래프트에서 서정원, 김병수, 정광석, 신태용 등 올림픽 대표팀 출신 대어들이 불참을 선언했고, 임근재는 그나마 드래프트에서 믿고 뽑을 만한 유일한 선수였다. 결국 추가 신청을 받아 서정원, 홍명보, 신태용 등이 드래프트에 참여했다. 1991 시즌 꼴찌였던 LG 치타스의 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이 때 서정원도 LG에 입단했는데, 서정원이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임근재는 3순위 지명을 받았다. 2순위는 올림픽대표팀 GK 김봉수.[1]

역대급 스카우트 경쟁을 증명하듯 1992 시즌 신인들의 활약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는데, 신태용은 신인왕을, 홍명보는 리그 MVP를 수상했다. 임근재 역시 1992 시즌에 10골로 득점왕을 차지하여 이름값을 증명했다. 신인이 득점왕을 차지한 첫번째 사례이며, 이 기록은 1995년 전남 드래곤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한 노상래가 2번째로 기록하게 된다.

이 때 당시 임근재는 머리 스타일도 화려하게 여러 차례 바꿔가면서 했고, 이런저런 세리머니도 많이 보여주면서 인기를 끌었다.

프로에서는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임근재였지만, 역대급이었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최종 명단에 드는 데 실패했다.[2]


2.2. 너무나 빨랐던 은퇴[편집]


이후의 임근재는 1993 시즌 3골, 1994 시즌 2골에 그쳐 해가 갈수록 점점 초라해져 갔다. 특히 1994년 임근재를 스카우트해 온 고재욱 감독 대신 조영증 감독이 부임하자 임근재는 감독의 구상에 들지 못했다. 윤상철은 선배로 LG에 있었고 94년에는 최용수까지 들어와 공격진 경쟁이 심화되었고 조영증 감독이 큰 선수들을 선호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외국 이적을 하려다가, 정해성 코치가 포항도 공격진이 좋기 때문에 기회가 많이 날 것이라 설득해[3] 포항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포항의 감독인 허정무가 러프 플레이를 선호했기에 임근재와 맞지 않아서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프로 5년차를 맞이하던 1996 시즌에 너무나 허무하게 은퇴하고 말았다.[4]


3. 지도자 경력[편집]


임근재는 K리그를 은퇴한 이후 연예계에서 매니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승철이 임근재의 고등학교 선배인데 당시 이승철의 매니저 중 하나가 임근재의 후배였기 때문에 그렇게 연결되어서 비공식 매니저 생활을 했다. 이후 공식 매니저로는 수와진의 안상수 매니저를 하게 되었으나 축구계 선배들이 도대체 뭐하냐고 압력이 많았기 때문에 매니저 생활을 관두고 축구계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유소년 지도자로서 생활을 했다. 정조국, 조재진, 구자철, 서정진, 유병수, 주민규 등 많은 골잡이들을 프로로 이끌었다. 특히 구자철은 J2리그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임근재 감독이 제주 유나이티드정해성 감독에게 구자철을 추천하여 제주에 입단할 수 있었다.

K3리그 팀 서울 유나이티드의 창단 감독을 맡기도 했다.


4. 여담[편집]


  • 본인은 축구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을 뛰고 본선을 뛰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연령대 규정이 바뀌어서 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즐거웠던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하는데 몸도 정말 좋았고 맨날 이겼기 때문이고 특히 결승전에서 자신의 결승골로 승리했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 초중고대를 통틀어 경고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뿐이고 그리 길지 않지만 어쨌건 프로생활 와중에도 경고를 2개밖에 받지 않았다. 본인은 1개로 기억하고 있기도 한데 태클 이후 일어나는 과정에서 접촉이 일어나 받은 경고로 고의는 아니었다고 한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매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인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별로 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데 순발력은 나쁘지 않아서 경기흐름을 예측해서 주워먹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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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밖에도 K리그 6개 구단의 피튀기는 스카우트 전쟁이 있었지만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하겠다.[2] 본인의 말로는 연령규정이 달라져서 그렇다고 한다.[3] 즉 잘 주워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4] 임근재의 경우 상당히 외적이고 보여지는 것이나 팬서비스 등에 많이 신경을 쓰고 감성적인 타입으로 보이는데 이런 선수들의 경우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라도 문제가 생기면 허무하게 포기하고, 질기게 버티면서 기회를 노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5] 170의 키는 축구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명 공격수들 중에서도 리오넬 메시나 프랑크 리베리, 알렉시스 산체스 등의 키는 170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신체조건까지 다 안 좋을 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