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투르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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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투르뇌르
Jacques Tourneur
파일:Jacques-Tourneur.jpg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출생
1902년 11월 12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리
사망
1977년 12월 19일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베르주라크
직업
감독
영화 데뷔
1931년, 'All That's Not Worth Love'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미국에서의 활동으로 유명한 프랑스영화감독.


2. 생애[편집]


190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적 감독인 모리스 투르뇌르[1]로서, 어렸던 자크는 세계적 유명 감독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미국을 오가며 고독한 유년기를 보낸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른 시절부터 영화 현장에 노출된 그는, 미국에 거주하던 중 고등학생 신분으로 영화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인 1931년에는 영화감독으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몇 편 영화를 만들다가,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편하도록 '잭 터너'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B급 호러영화를 제작하던 RKO의 프로듀서 발 류튼의 눈에 든 투르뇌르는, 그와 함께 13만 달러의 예산을 들고 호러영화 <캣 피플>을 감독하게 된다. 영화는 제작비 대비 10배가 넘은 수익을 거둬들이며 흥행에 성공했고, 이윽고 류튼과 함께한 다른 2편의 영화도 역시나 흥행에 성공하게 되자, 투르뇌르는 A급 영화의 감독을 할 수 있게 되었다.[2]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딱히 비평적 주목을 받는 일은 없었으며, 1950년에 프리랜서로 전향하게 된 투르뇌르는 각본의 질을 따지지 않고 영화를 찍게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첩보물, 서부극, 누아르, 공포물 등 여러 범주에 걸쳐 있었으며, 장르 영화에 주력한 탓에 비평가들의 시선으로부터는 소외된 채로 남게 되었다.

말년에는 할리우드의 직업 감독으로서 미국과 영국, 스크린과 TV를 오가며 활동하였고, 1966년 TV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한 것을 끝으로, 그는 은퇴한 후 프랑스로 돌아가 요양원에서 생활한다. 1970년대가 되며 점차 비평가들로부터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1977년 세상을 떠났다.


3. 기타[편집]


프로듀서 발 류튼과는 단지 3편의 작품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투르뇌르를 이야기할 때는 류튼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잦다. 이는 모호한 연출 방식과 주제를 선호하던 류튼의 성향이 투르뇌르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기 때문이다. 류튼과의 협업작 가운데서는 주로 <캣 피플>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편이다.

류튼과 함께 작업한 3편이 영화 역사에서 임팩트가 너무 큰 탓에 흔히 호러 감독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상술했듯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감독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59년 <마라톤의 거상>에선 훗날 이탈리아 호러의 거장이 되는 마리오 바바와 협업하기도 했다.

각본을 가리지 않고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50년 <내 왕관 속의 별>의 경우, 감독 자리를 따내기 위해 자신의 임금마저 삭감하는 의지를 보였고, 이따금 각본의 질이 너무 낮다며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본인은 "나는 항상 내가 원한 것을 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60년대 미국의 상업영화 감독들이 카예 뒤 시네마 지의 비평가들에 의해 진지한 예술가들로 재조명받고 있을 때 투르뇌르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였고, 한 세대 가량 뒤인 세르주 다네 등의 비평가들에게로부터 작가 감독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재평가 작업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21세기 들어서 더욱 조명받고 있는 고전 할리우드의 거장 가운데 하나다.


4. 작품 목록[편집]


대표작만 서술하였다.

  • <캣 피플> (1942)
  •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1943)
  • <레오파드 맨> (1943)[3]
  • <패시지 계곡> (1946)
  • <과거로부터> (1947)
  • <내 왕관 속의 별> (1950)
  • <위치타> (1955)
  • <악령의 밤>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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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성영화 초기까지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히치콕의 존경을 받은 감독. 의외로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로 일한 적이 있다.[2] 이후로도 류튼은 마크 롭슨, 로버트 와이즈와 협업하여 호러영화를 제작하나 1946년 <베들럼>이 흥행에 크게 실패하자 사실상 커리어가 끊기게 된다.[3] 이상의 3개 작품이 발 류튼과 협업한 호러영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