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드 팡티에브르

덤프버전 :

파일:Banniel_Breizh_1.0.svg.png
브르타뉴 공작


[ 펼치기 · 접기 ]
브르타뉴 왕조
노미노에
에리스포
살로몬
파스케텐
브르타뉴 왕조
낭트 왕조
알란 1세
구르마엘롱
알란 2세
드로고
낭트 왕조
렌 왕조
호엘 1세
게레흐
코난 1세
조프루아 1세
렌 왕조
에오젠
알란 3세
코난 2세
하와이즈
코르누아유 왕조
호엘 2세
코르누아유 왕조
펜티에브르 왕조
알란 4세
코난 3세
베르타
코난 4세
펜티에브르 왕조
플랑타주네 왕조
투아르 왕조
콩스탕스
아르튀르 1세
알릭스
플랑타주네 왕조
투아르 왕조
드뢰 왕조
조프루아 2세

피에르 1세
드뢰 왕조
장 1세
장 2세
아르튀르 2세
장 3세
펜티에브르 왕조
몽포르 왕조

장 4세
장 5세
장 6세
블루아 왕조
샤를 1세
몽포르 왕조
프랑수아 1세
피에르 2세
아르튀르 3세
프랑수아 2세
몽포르 왕조




발루아 왕조
발루아 왕조
샤를 2세
루이
발루아 왕조

클로드
프랑수아 4세
앙리

프랑수아 3세



파일:잔 드 팡티에브르.jpg
이름
잔 드 팡티에브르(Jeanne de Penthièvre)
출생
1324년
브르타뉴 공국
사망
1384년 9월 10일
브르타뉴 공국 갱강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1341년 4월 30일 ~ 1365년 4월 12일
아버지
기 7세 드 리모주
어머니
아보구르의 잔
남편
샤를 드 블루아
자녀
마르그리트, 마리, 장 1세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24년간 남편 샤를 드 블루아와 함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렀지만 오레 전투에서 남편이 패사한 뒤 브르타뉴 공작위를 포기했다.


2. 생애[편집]


1324년경 리모주 자작 기 7세 드 리모주와 아보구르 영주 앙리 4세 다보구르의 딸인 잔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삼촌이자 브르타뉴 공작인 장 3세 드 브르타뉴는 세번 결혼헀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는 이복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유산 상속을 놓고 자신과 오랫동안 갈등을 벌인 것에 반감을 품고 있어서, 그녀를 일찍부터 공작위 후계자로 점찍고 고급 교육을 시켜줬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1341년 4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장 3세가 후계자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사망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기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킨 뒤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 ~ 10월 16일, 샤를 드 블루아는 샹토소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격파했다. 이후 장 드 몽포르는 낭트로 피신했지만, 뒤이은 낭트 공방전에서 시민들이 더 이상 그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고 항복을 강요하자 11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에게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이 엔봉 공방전에서 샤를을 막아내고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의 잔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했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잔 드 팡티에브르 및 샤를 드 블루아 부부와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는 장 드 몽포르와 아들 장 4세 드 몽포르간의 내전이 장장 24년간 이어졌다. 1347년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된 뒤 런던으로 보내진 샤를 드 블루아는 9년 후에야 50만 에퀴의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오래도록 지속된 내전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장 4세 드 몽포르와 브르타뉴를 분할하는 것으로 종식하기를 희망했지만, 아내 잔은 남편의 의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될 때까지 전쟁을 끝까지 이어가려 했다.

1364년 9월 29일, 장 4세 드 몽포르가 이끄는 몽포르 가문-잉글랜드 연합군이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블루아 가문-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오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몽포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1372년까지 보상금을 지급하며, 잔이 팡티에브르와 아보구르 등지의 영주로서 장 4세 드 몽포르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아도 되며, 장 4세에게 남성 후손이 없으면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성 상속인이 공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제1차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만 여자는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1379년 장 4세가 프랑스군의 공세에 밀려 잉글랜드로 추방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브르타뉴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앙주 공작이자 자신의 동생인 루이 1세를 브르타뉴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잔은 이 조치로 인해 자신과 아들의 권리가 침해된 것에 분노해, 자치권 유지를 희망한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다. 1381년 5월 2일, 잔 드 팡티에브르는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게랑드 조약을 프랑스 왕실과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384년 9월 10일에 갱강에서 사망했고, 갱강의 코르들리에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편집]


  • 샤를 드 블루아(1319 ~ 1364): 마옌 남작, 기즈 영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
    • 장 1세 드 샤티옹(1340 ~ 1404): 팡티에브르 백작, 리모주 자작, 아보구르 남작, 아베네스 영주.
    • 마리 드 블루아(1345 ~ 1404): 기즈 여백작, 마옌 여남작.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부인.
    • 마르그리트 드 블루아(? ~ 1354년 이후): 앙굴렘 백작 샤를 드 라 세르다의 부인.

[각주]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4-28 21:03:01에 나무위키 잔 드 팡티에브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