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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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고선후(平臯宣侯)
張恂 | 장순

시호
선(宣)
작위
평고현후(平臯縣侯)

장(張)
이름
순(恂)

홍양(洪讓)
부친
장탁(張卓)
출신
상곡군(上谷郡) 저양현(沮陽縣)
생몰
348년 ~ 416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북위의 양리로 자는 홍양(洪讓). 상곡군(上谷郡) 저양현(沮陽縣) 출신. 장곤(張袞)의 아우이다.


2. 생애[편집]


348년에 장탁(張卓)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장곤과 함께 탁발규에게 귀순하여 참군이 되었다. 이때 장순은 탁발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운(金運)이 통제력을 잃은 뒤 유씨(劉氏)석씨(石氏)가 분분하고 모용씨(慕容氏)가 산동(山東)에서 제왕의 존호를 참칭하고 부씨(苻氏)요씨(姚氏)가 진농(秦隴)에서 제위를 훔쳐서 결국 삼령(三靈)의 제사가 없어지고 천하에는 임금이 없어졌습니다. 대왕께서는 북방에 터를 세우신 뒤 밝은 도리를 중시하고 성덕을 널리 쌓으시며 북방에서 남쪽을 향해 정벌을 펼치시고 연조(燕趙)에 교화를 퍼트리셨습니다. 지금 중원의 유민들은 군왕을 바라보며 윤택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의당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업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탁발규는 장순의 재능을 매우 중시하여 두텁게 예우하였다.

황시(皇始) 연간[1], 장순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임명되고 내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뒤에 해목(奚牧)이 진천(晉川)을 공략할 때 종군하여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임명되고 평고현자(平臯縣子)에 봉해졌다.

장순은 뒤에 광평태수(廣平太守)로 전출되어 유민들을 불러모아 농업과 양잠을 권했으며, 여기에 귀부한 유민들이 1,000호에 달했다. 상산태수(常山太守)로 전출된 뒤에는 학교를 세우고 선비들을 우대하여 민심을 얻었다. 오호십육국시대라는 난세에서 지방의 정사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드물었는데, 장순은 청렴결백하게 관직을 맡았고 아랫사람들을 너그럽고 자애롭게 대우하여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409년 명원제가 즉위한 뒤 명주 300필을 받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다.

장순은 416년에 죽었다. 장순은 청렴하고 검소한데다 재산을 불린 적이 없었으며, 장순이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명원제는 장순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순을 정로장군(征虜將軍), 병주자사(幷州刺史), 평고현후(平臯縣侯)로 추증하고 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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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96년 ~ 3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