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웅(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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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반란 지도자 · 할거정권 군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全師雄
(? ~ 966년)

후촉의 장수.


2. 생애[편집]


후촉에서 문주자사(文州刺史)를 지낸 장수로 위엄과 덕망이 있어서 후촉의 병사들이 전사웅을 따랐다. 965년 후촉이 북송에게 멸망한 뒤 왕전빈의 군율이 흐트러지자 후촉 출신 군사들의 군란이 벌어졌다. 전사웅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개봉부로 향하려다가 면주(綿州)에서 반란이 벌어지자, 후촉 출신 군사들에게 협박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강곡(江曲)의 민가에 숨겼다. 뒤에 후촉 출신 군사들이 전사웅을 발견하고 그를 추대하였다.

왕전빈이 도감 미광서(米光緖)를 보내 반군을 초무하도록 명했으나, 미광서는 전사웅의 삼족을 모두 주멸하고 전사웅의 딸을 첩으로 삼고 전사웅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전사웅은 이 소식을 듣고 결국 송나라에 귀순할 뜻이 없어져서 군대를 이끌고 면주를 공격했으나 횡해지휘사(橫海指揮使) 유복과 용첩지휘사(龍捷指揮使) 전소빈에게 막혀서 패배했다.

전사웅은 다시 팽주(彭州)를 공격하여 자사 왕계도(王繼濤)를 몰아내고 도감 이덕영(李德榮)을 살해한 뒤 팽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전사웅의 봉기에 성도부(成都府)의 10개 현이 모두 군대를 일으켜 전사웅에게 호응하자, 전사웅은 흥촉대왕(興蜀大王)을 자칭하고 막부를 열었으며, 관원을 두고 절도사 20명을 임명한 뒤 관구현(灌口縣), 도강현(導江縣), 비현(郫縣), 신번현(新繁縣), 청성현(靑城縣) 등을 나눠 점령하도록 명하였다.

최언진은 장만우, 고언휘, 전흠조와 함께 전사웅의 봉기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전사웅에게 패배하여 고언휘가 전사하고 전흠조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왕전빈이 다시 장정한과 장후(張煦)를 파견하여 전사웅을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성도부로 퇴각하였다. 전사웅은 이때를 기회로 삼아 면주(綿州)와 한주(漢州)로 군대를 각각 파견하여 잔도를 차단하였으며, 강을 따라 성채를 설치하며 성도를 공격한다고 공언했다. 이때부터 공주(邛州), 촉주(蜀州), 미주(眉州), 아주(雅州), 동천주(東川州), 과주(果州), 수주(遂州), 유주(渝州), 합주(合州), 자주(資州), 간주(簡州), 창주(昌州), 보주(普州), 가주(嘉州), 융주(戎州), 영주(榮州), 능주(陵州)가 모두 전사웅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유정양조빈이 신번에서 전사웅의 무리를 물리치고 1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사웅이 비현으로 퇴각하자, 왕전빈과 왕인섬이 다시 전사웅을 공격해 물리치면서 전사웅은 관구채(灌口砦)로 다시 퇴각하였다. 이로 인해 전사웅의 기세는 점점 약해졌고 전사웅의 잔당은 다른 주현으로 달아났다. 전사웅이 자사로 임명했던 능주지휘사(陵州指揮使) 원유(元裕)는 왕인섬에게 사로잡혀 성도에서 책형을 받았다. 그리고 전사웅은 금당(金堂)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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