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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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정신영의 독일 유학에 앞서. 왼쪽부터 김영주, 정상영, 정주영, 정신영, 정인영, 정순영.

1. 개요
2. 가계도


1. 개요[편집]


鄭信永(1931~1962.04.14)

동아일보 기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고 1956년 3월 동아일보 국회 출입기자로 일했다. 기자 생활 당시 주목할만한 일로는 한국전쟁 당시 다들 피난 가는데 혼자 동아일보 사옥에 남아 '서울의 외국기관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1950년 6월 27일 호외로 발행한 저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발행 뒤 피난했다.[1]

정주영의 권유로 1957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1958년 한국일보 독일 통신원이 되어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 관람기와 아일랜드 기행문을 쓰며 대학생과 기자 생활을 병행한다. 1961년 7월에는 동아일보 유럽 통신원으로 복직해 외국생활기와 각종 해외소식을 연재한다. 1961년 8월 25일 61 베를린 위기를 취재해 동/서베를린으로의 분열을 생생히 전해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1962년 장폐색증으로 함부르크 대학병원에서 수술 중 사망한다. 같은 해 10월에 논문 <저축과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로 되어 있어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에서 언론인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정신영기금'이라는 기금이 있는데 여기의 '신영'이 바로 정신영 기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57년 관훈클럽 30번째 회원으로 위촉이 된 것이 인연이 되어 1977년 정주영이 1억을 후원해 기금이 만들어졌다.

정신영 사망 당시 정주영 회장이 열흘이나 출근도 못하고 울었다고 한다.[2] 이후 자서전에 "좋아 한다는것도, 기대가 크다는 것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도, 동생에게 단 한번도 말하고 표현하지 못한게 평생 후회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자신과 달리 서울대 나와 기자까지 되었던 그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게다가 그 유학은 자기가 가라고 떠밀어서 간거라...


2. 가계도[편집]


전체 가계도의 경우 범현대가 참조.

  • 정신영鄭信永 1931-1962.04.14 동아일보 기자 = 장정자 1935
    • 1녀 정일경 1960 = 임광수 1959
    • 1남 정몽혁 1961 = 이문희 현대SNS 대표
      • 1녀 정현이 1988
      • 1남 정두선 1989
      • 2남 정우선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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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내용은 둘째 정인영(기업인)에 대한 내용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참고 [2] 변중석 여사도 훗날 시동생들과 같이 살던 시절을 회고하며 착하고 머리 좋던 시동생 정신영, 기자가 됐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허망하게 떠났다고 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