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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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dZjpEcMmcYk)|"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 이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섣불리 포기하려 들지 말고 적어도 시행착오는 겪어보고 결정하라는 얘기다. 물론 후술하고 있듯 이 말 듣고 진짜 무리하게 하다가 사업 실패한 사람을 일컬어 기업가에서 정주영 병이란 말도 나돌 정도니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시도를 해 보든지 하자.]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5]
-정주영 어록 중 유명한 말.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별칭은 '왕회장'[6] .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30년대 쌀 배달부터 시작해 자동차 정비업, 건설업 등을 거치며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인이었으며 1990년대에는 정계에도 진출했지만 낙선한 후 1998년에는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하다 2001년 사망했다.
호는 '아산(峨山)'이다. 북한 강원도 지역에 있는 고향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7] 오늘날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가 있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와 사업 초기[편집]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8] 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슬하 6남 1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의료원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이것을 보고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9]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다만 이 초졸 학력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당시는 초등 의무교육이 없고 보통교육 개념도 희미할 때라[10] 정주영이 초등학생일 때 보통학교 취학률은 채 20%도 안 되던 시절이라[11] 학력 인플레가 심하게 일어난 2000년대 이후는 물론, 그래도 고등학교는 보내려고 했던 20세기 후반과도 괴리가 있다. 즉, 이를 고려하면 정주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준 상위 20% 정도의 교육은 받았던 셈이다. 최소한 비율만 따졌을 때 2022년 기준 고졸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대학 학력과도 비견할 만한 수준이 된다.
그럼에도 정주영의 학력이 자꾸 부각되는 것은 집안이 엄청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고[12] , 다른 많은 재벌가 총수보단 학력이 처졌기 때문으로 보인다.[13] LG의 구인회 회장의 경우 엄밀히 따지면 정주영과 학력이 같지만 그래도 고등보통학교 3학년 중퇴라 고졸로 쳐주는 느낌이고[14] 무엇보다 집안이 이름높은 양반가였다. 또한 롯데 신격호 회장도 고등보통학교까지 다녔고[15] , 한 세대 아래이긴 하지만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연세대학교 출신이다.[16] 특히 라이벌로 자주 비교되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퇴라지만[17] 도일해 와세다대학 정문을 밟아봤는데 이 시대 기준으로는 대학 중퇴도 어마어마한 스펙이다. 당대 조선인 입장에서는 최상위권 스펙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이병철과 재계 1, 2위를 다투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자연히 '초졸 대 대졸'[18] 식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정주영이 초등학교만 졸업한 반면 동생들의 학력은 좋은 편이다. 둘째 동생 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 넷째 동생 정세영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퇴사 후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 중 장폐색증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버지 정봉식은 장남인 정주영이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가족을 잘 부양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가 어린 나이 때부터 일을 쎄게 시켰던 것 같다. 정주영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농사일에 학을 떼 그만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여러 번 있는데, 한 번은 부친이 소를 판 70원을 갖고 가출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19]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가 마침 그곳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는 상기한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주산, 부기(경리업무)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끌려왔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와서 보면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의 현대도 없었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네 번째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다. 허나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20] 서울에 정착했다.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 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고 한다.
1930년대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쌀 배달 점원으로 일하다가 당시 노름에 빠진 외아들[21] 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걍 니가 이 가게 사라고 가게를 매도해 3년 후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이후 현재의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했다. 이 중에는 윤덕영,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차도 있었다. 때문에 후일 아도 서비스에 불이 나 입고 됐던 차들이 모두 타 버렸을 때 정주영이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과 조선총독부에 직접 찾아다니며 차값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빌러다녔다고 한다. 박흥식은 자신을 찾아온 정주영에게 화신백화점이 전소됐다 재건했던 이야기와 사업상의 조언을 해주며 격려를 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박흥식은 오히려 화신백화점의 자동차는 모두 정주영의 공장으로 보내 수리하도록 배려했다.
아도 서비스 화재로 건물과 수리 중인 자동차들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재기에 성공한 정주영은 자리를 동쪽으로 옮겨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작은 공터에서 다시 자동차 정비소를 열게 된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허나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 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줬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둘 다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2.2. 해방 이후 사업 성장[편집]
1984년 1월 4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 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실행력 하난 뛰어났던 셈. 그리고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시기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 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정주영의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전후에 수주했던 고령교 공사였다. 1935년에 처음 개통됐지만 6.25 전쟁 때 폭파돼서 1953년부터 현대건설이 복구에 나섰지만 사실상 말만 복구 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에 가까웠다. 당시 복구 비용은 5,478만 환(현재 약 547억 원)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는 당시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 금액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큰 공사를 한 일이 전무한 데다가 건설 장비도 부족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 사고까지 일어난 데다가 물가도 자꾸 뛰어올라 인부들에게 줄 월급마저 줄어 인부들이 파업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막대한 사채를 쓰고[22][일화] ,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까지 팔아가면서 그 모든 자금을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에 완공시켰으며[23][24] 그렇게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해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이후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도 건설 수주를 따내는데 1960년대 후반 소양강댐을 건설할 당시 박정희와 안면을 튼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정 회장은 훗날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때 댐 설계 변경 과정의 비화를 말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받은 보상금을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했는데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콘크리트 댐 대신 사력식 댐을 주장했고 이게 실제 통과됐다는 것이다. 다만 안경모 당시 건설부 장관은 정주영 회장의 주장은 '한 마디로 거짓말'이라며 현대건설은 사력댐 방식이 결정된 후 입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측 말이 맞는지는 오늘날엔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건설부장관(당시는 국토건설청 청장)의 주장에 관한 근거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다. https://blog.naver.com/parksgil/223416444233
당시 국토건설청 소속 토목기사가 1961.2.27 ~ 1962.3.29 호주에서 수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기술연수와 댐 건설현장 실무훈련을 받았는데 소양강댐과 유사한 크기(높이 116m)의 사력댐인 유컴빈댐(Eucumbene Dam) 수력발전소였고 관련 내용을 1962.5.1에 국토건설청장에게 보고하였고 당시 청장이 국장회의를 소집하여 관련 내용을 공유하였다. 당시에는 일본도 이런 큰 규모의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었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라 국토건설청, 현대 건설을 포함한 업계 모든 관련자들이 이 내용을 모르고 콘크리트댐 건설을 주장했었지만 이 보고를 계기로 국토건설청 내부에서 사력댐 건설이 검토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보고서 내용 중 사력댐 방식의 장점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다.
"설계와 시공만 철저히 된다면 토암댐(사력댐)의 안전도가 결코 콘크리트댐에 뒤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며...
사력댐 구축에는 면밀한 축토관리가 필요할 것이나 그대신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현 국내 실정에 상응하리라고 봄."
이 외에도 사력댐 건설을 위한 계획, 조사, 수리모형시험, 각종 재료시험, 설계, 시공 관련해 습득한 자세한 방안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국토건설청 내부 검토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와 일본에는 이런 대규모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어 정부 부처에서 우여곡절 끝에 리스크를 안고 사력댐으로 결정하여 건설되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했고 난색을 표하던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아래의 일화는 대통령의 성화로 대책 없이 해외를 싸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
정주영은 영국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 입장은 거절이었다. 이후 정주영은 1971년 9월에 바클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에게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라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해 추천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바클리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빌려주겠다."고 얘기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25] 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26만 톤짜리 선박 수주 계약을 따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것이다.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 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 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 5만 분지 지도, 그 다음에는 그 조선소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걸 들고 가서 "당신이 배를 사 주면.. 아주 얘기가 구구하고 길죠. (학생들의 작은 웃음소리) 배를 사 주면은 사 줬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영국 정부에서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뭐.. 사들이고 그래서 여기서 조선소를 지어서 네 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사라." 이런 얘기죠. (학생들의 웃음소리) 근데 어떤 사람들은 우릴 보고 엉터리냐 하지만 우리보다 더 형편없었는지 그 사람이 턱 걸려들었습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정주영 회장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중앙대학교 강연에서 얘기한 말.
이후 정주영은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다가 길에 쌓인 자재 더미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돼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차에서 금방 빠져나왔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신속한 구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길에 방치한 자재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름 아닌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안 직원들은 모가지가 날아갈 생각에 벌벌 떨었다고. 하지만 정주영은 되려 물이 참 시원하다고 농담을 던지며 그 직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첫 호선도 정회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 내로라 하는 선장들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서 선뜻 시운전을 안 맡으려고 해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유조선이 건조돼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는데 도크를 부분 완공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해서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26]
서산 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 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 되자 큰 폐유조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 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됐을 때[27] 나 홍수 시 긴급 제방을 만들 때 등으로 응용됐다. 알파 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고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인 알파 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석유 파동으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는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30만 달러를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를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됐고 이 오일머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다. 정주영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됐다. 일이 잘못 됐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 낸 일이 많다. 군사정권의 의뢰를 받은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주영이 그만큼 일을 잘했다는 소리기도 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올림픽 유치 의지는 있었으나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당시 경쟁 도시가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나고야라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28] , 이에 정부 관계자들도 나중에 본인들이 책임을 뒤집어쓸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길 꺼려서 당시 88 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이자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이 유치의 최전선에 서서 싸웠는데 이때 나고야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유치 홍보를 했다. 이에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29] 한국 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30] ,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1987년 정주영은 명예 회장으로 사실상 경영에서 한발 물러난다.
2.3. 5공 청문회와 정계 입문[편집]
1988년 5공 청문회 출연 당시. 이때 정주영 회장은 민주화 이전 독재에 침묵했던 것에 대해 용기가 없어 그랬다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한다. 이때부터 정치 생각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담으로 이때 정주영 회장과 품격있는 토론한 당사자 중 한명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 당시 의원이었다.
이명박의 자서전을 보면 정주영이 사업가 시절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31] 정작 그 기업인들을 무시한다"고 깊이 상심했으며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걸프전 발발로 인한 이라크 건설공사 수금 미수로 물러나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얻은 인기를 발판삼아 정주영이 미워하던 민자당에 입당, 같은 14대 총선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됐다.[32]
실제 정주영은 전두환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80년대 초 한국 경제 동향을 분석하면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로 분류하기도 했다. 정부가 직접적인 명령보다는 당근과 채찍으로 경제를 가이드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1992년 1월 8일, 정주영은 돌연 본인이 정치에 참여하겠다며 정계 입문을 선언한다. 이때 명분 중 하나로 노태우 정부의 정치 자금 행태를 폭로했는데 그는 노태우 정부를 비롯해 박정희, 전두환 역대 정권에 바친 비자금을 공개하면서 레임덕 증상을 보이던 노태우 정권을 곤경에 빠뜨렸다. 당시 노태우 정부에서는 정주영 회장과 정치 자금을 주고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결국 정치 자금을 상납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33] , 별개로 정주영은 1992년 2월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당 총재를 맡았다. 이때 정주영은 "나는 돈이 많다. 남의 돈 받고 정치 안 하고 내 돈으로 하겠다."고 했는데 정권 쟁취 과정을 일종의 응찰 과정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4. 정계 진출 당시 분위기[편집]
정주영이 정계에 입문하자 당시 정가에서는 다소 우려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일평생을 경제에 몸담아 온 인물이 갑자기 뒤늦게 정치에 들겠다는 것이 다소 뜬금없다는 반응과 국회의원이나 시도지사 등 행정 경험도 없는 기업가가 무슨 정치를 하겠느냐며 의문을 짓거나 우려스럽게 보는 반응이 많았다.[34] 일부에서는 현대그룹이 아예 정치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으며 현대의 자본으로 아예 정치에 개입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냐는 반응도 많았다. 공교롭게도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시기가 14대 대선이 있는 해이기도 해서 더 그랬다.
게다가 당시 14대 대선 후보들의 경력을 비교해도, 정주영은 정치 외길에 전문가인 두 명의 주력 후보와는 달리 유일하게 정치 활동이 거의 전무후무해서 사실상 정치 초보에 가까웠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국회의원 경험도 없고 시도지사 등 지자체장 경험도 없어서 경제에는 경력이 많아서 강세이나 정치, 사회, 행정은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게다가 외교 경험도 없어서 외교가에서 정주영에 대해서 매우 우려스러운 입장을 밝혔는데 한미관계, 한일관계,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한중관계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문을 제기할 정도였다. 정주영 본인도 외국의 인사를 만나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외교가 아닌 주로 경제 및 경영상에서 해외 기업의 총수나 재계 인사를 접한 것이 전부일 뿐 외교나 국방, 행정 인사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군 통수권자가 되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도 국방이나 군대에 관해서 아는 게 있느냐는 의문도 나왔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둔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 의문이 갈렸는데 대통령은 기업 총수와는 다르다, 외교나 국방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군 생활을 해 보셨다면 모르지만 군대에 대해서 아시는지, 국방 정책은 어떤 내용을 생각하실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여기에 행정도 중요했는데 이 시기는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 등 광역단체장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갔던 때라 행정 경험이 없는 정주영이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를 누구를 임명할지도 궁금했던 이가 많았다. 기업 총수이기 때문에 임명 권한은 있는 편이지만 주로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 등을 임명한 것이 전부였고 또한 행정 경험이 전무해서 행정이나 지역 사회의 현안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일부에서는 이 때문에 서울시장도 현대계 사람을 앉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훗날 현대건설 사장을 지내다가 정치에 입문해서 민선으로 서울시장이 된 인물이 있긴 하다.
또한 교육상으로도 초졸 이력 때문에 당시 학부모들의 우려도 높았다.
2.5. 대선 출마[편집]
1992년 2월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하고 유명 개그맨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여러 노력 끝에 창당 한달만에 14대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이 과반에 미달한 149석에 그치며 정주영의 입지는 높아졌다. 다만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해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다른 재벌의 경계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삼성그룹이 정주영이 당선되면 삼성의 세가 위축될까 봐[35] 김영삼을 밀어줬고 삼성그룹 계열 신문이었던 중앙일보도 대놓고 정주영에게 불리한 기사들을 게재하며 견제했다. 심지어 메이저급 재벌은 아닌 조선일보도 김영삼에 배팅하면서 정주영을 견제하는 기사를 잇따라 내놓았다. 물론 당시 관영 매체나 마찬가지였던 서울신문과 KBS도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주류 언론 중 동아일보는 당시 연이 깊던 김대중을 밀어주는 편이었다. 결국 정주영만 붕뜬 셈.
그리고 마침내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금전 정치의 한계와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양대산맥을 넘지 못하고 낙선하고 만다.[36] 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 명인데 득표 수가 400만 표(정확히는 388만표 정도)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김영삼이 받은 표가 1,000만 표가 조금 안 됐으며 정주영의 낮은 득표율은 예측이 됐기는 했지만 여론 조사가 제각기 달리 나왔던 이유도 있었고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4자 필승론" 같은 생각을 내세운 것도 과학적 여론 조사가 제대로 없어서였다. 여론 조사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의미있는 표본 추출과 세련된 조사 기법 등 상당한 경력을 필요로 한다. 사실 당원이 1,200만명에 이르기는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억지로 불려놓은 숫자[37] 인지라 이들이 표를 제대로 줄 리는 만무했다. 그가 연고가 있는 강원도 중에서도 춘천시, 원주시, 횡성군 단 세 곳에서만 1위를 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모두 양김을 넘지 못했다.
정주영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으로 인해 14대 대선은 유례없는 지역 감정 싸움이 되어 타격을 많이 입었다. 특히 당시 노태우 정권은 총선 당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해 공권력을 동원하며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했고 비자금을 폭로하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해 정주영 선거 운동 조직의 손발을 잘랐다. 울산 같은 대표적인 현대그룹 강세 도시에서조차 현대의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오자 정주영은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분노한 정주영이 컴퓨터 선거 조작이라는 얘기에 혹해 선거 후 김대중을 찾아가 대선 불복 선언이라도 하자고 설득했지만[38] , 증거가 불확실해 김대중은 동참하지 않는다. 또 대선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주영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많은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1차적 원인이긴 했다. 어린 시절 고생을 딛고 자수성가 했다지만 재벌 출신인 그가 얼마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 부호가 붙었던 것이다.[39] 또한 기업 경영에서 성공했다고 무조건 국가 운영도 잘하리란 법은 없었다.
2.6. 대북 사업[편집]
1992년 대선 낙선 이후 정주영과 현대는 정권에 찍혀 정치 보복이라 의심 당할 만한 일을 당하게 된다. 일단 14대 대선이 끝난 후 선거 운동을 도왔던 이들이고 정몽헌, 정몽준 회장과 함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수사를 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었고 직후 정치에 손을 뗐다. 이렇게 대통령 선거 낙선 이후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대북 사업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까지 침체기에 빠져 안타까움을 사게 된다.
이 무렵 현대그룹이 겪은 정치 보복이라 의심받을만한 사례 일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김영삼 정부는 2년 동안 현대의 돈줄을 묶어놨는데 오직 미국계 시티은행만이 현대에 대출을 계속해 주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로 인해 현대는 대출금이 적어서 대우와는 달리 IMF 때 타격이 별로 크지 않았다고 하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화위복,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 세무조사를 대선 1년 전인 1991년 말(1,300억 원 추징. 노한 왕회장이 "그 돈 뜯기느니 출마 한 번 하겠다"라 했다고 함)에 이어 2연타로 먹였다. 2번째 조사 때는 현대 직원들이 더 보여줄 거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 만큼 탈탈 털렸다고. 이런 조치는 정권 내에서도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했으 당시 지지율이 80%에 이를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김영삼 정부 초기의 기세가 기세였던 지라 브레이크는 없었다.
그러다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기업은 2류...정치는 4류" 이른바 베이징 발언으로[40] 반사 이익을 얻게 된다. 세무 조사에 대출 제한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1위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보복에 격분한 정주영은 김대중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정부가 IMF 사태로 휘청이는 와중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에 성공하면서 정주영 역시 재기의 발걸음을 마련하게 된다. 그 결정판이 이른바 소떼 방북이었다. 정주영 회장 김대통령 예방, 방북성과 설명(뉴스데스크).
사실 대북 사업은 정주영이 이전부터 구상해 오던 계획 중 하나긴 했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 회장을 맡는 등 일선에서 물러난 후 본격적으로 대북 사업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게 DJ의 햇볕 정책과도 연동돼 시너지를 일으켜,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일례로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이 소떼 방북 이벤트를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이후 여러 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했다.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후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의 집념에 가까운 적극적인 대북 사업을 두고 정 회장이 북한에 있는 고향이 그리워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저런다고 보는 의견이 많았지만 사실 일생의 대부분을 기업가로 살아온 정주영이 진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저럴 리는 없고 건설경기 퇴조와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에 처한 현대그룹의 돌파구를 대북 사업에서 찾으려 한 사업가적 비전이 더 큰 활동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역사에 IF란 없다지만 정주영이 사망한 이후 지지부진해진 대북 사업을 보면 묘한 부분이다.
2.7. 사망[편집]
120살까지는 살 겁니다. 그때까지 일할 수 있다면 해야지요. 아직 은퇴하기에 나는 너무나 젊습니다.
- 1999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남북이 통일된다면 내 고향 통천으로 돌아가서 남은 삶을 보낼 겁니다.
- 1999년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1999년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 정주영은 말년까지도 건강한 편이었다. 당시 84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90세까지는 현역으로 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2000년 5월에는 건강을 이유로 명예 회장직을 사퇴했다.
허나 그는 말년에 크게 편안하지 못했다. 장성한 자녀들이 불화를 일으킨 탓이다. 이를 현대(기업)판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 당시 언론에도 도배되며 난리가 나자, 정주영은 몸소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식들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 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 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했으나 그 직후 2001년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 부전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때가 향년 85세. 그래도 증손자까지는 봤다.[41]
정주영 사후 현대가는 현대,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사분화됐다. 이는 세 아들 편에 각각 줄을 섰던 여러 가신의 농간이 크게 작용했다. 차남이자 현대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정몽구는 이를 증오해 선대의 가신을 모두 가차없이 쳐냈고 상당한 기간 동안 어떤 가신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일명 무원칙(...) 인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매년 정주영 회장을 기리며 그의 기일에는 생전에 머물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고 이후에는 정몽구 회장의 한남동 자택으로 장소를 옮겨 거기서 제사 지내는 모양.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학원 등에서도 추모식을 연다.
2015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를 했는데 기념식에서는 사실상 장남인 차남 정몽구가 가족 대표 인사를 했다.
3. 가족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공식적인 자식만 무려 8남 3녀. 척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11남매 전부 본처 소생일 리가 없다. 장남 정몽필은 본처인 변중석 여사가 시집와 보니 이미 태어나 있었다. 젊었을 시절에 만났던 여배우들에게서 나온 사생아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있기는 분명히 있었고 여배우들이 정주영에게 돈으로 매수를 당해서 만났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어차피 정주영 세대에는 돈과 권세가 좀 있다 싶으면 첩을 두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그걸로 큰 흠을 잡히지는 않았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주영 사망 이후 일주일도 안 돼서 모친(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친자 확인 소송을 냈고 DNA 검사와 상속 절차 및 기타 잡다한 과정을 밟고 유산을 싹 챙겨 돌아갔다.
농담으로 정주영이 모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둘째는 자기 자식 숫자가 얼마인지 모른다고 한다. 원 출처는 1997년에 방영했던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의 정주영 인터뷰 내용이다. 원래의 방송에서는 정주영이 자기 재산 액수를 굳이 세어보지 않으며 아들들이 많아서 자손(아들과 손자)이 몇 명인지 모른다는 뉘앙스의 인터뷰였는데 이게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블랙 코미디에 가깝게 바뀐 것이다.
아내인 변중석 여사는 조용한 내조로 유명했다. 정주영과 같은 통천군 출신으로 변 여사 동네에 살던 정주영 숙부의 선으로 결혼한 후 정주영 따라 서울에 와 분단 이후 안타깝게도 북에 있던 친가와 헤어져 정주영과 함께 고생해가며 평생을 해로했다. 생전 큰 욕심없이 검소한 생활을 하며[42] "재봉틀 하나와 아끼던 장독대가 내 재산의 전부"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편이 사준 자동차는 집에 놔두고 도매시장에 나가 채소나 잡화를 사서 용달차에 실은 후 그 차를 타고 왔으며 집에서는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변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며느리들에게는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고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43]
평소 보살 소리 들을 정도로 성격이 온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변중석이 남편인 정주영에게 큰 소리를 친 적이 한 번 있다고 한다. 그건 바로 장남 정몽필의 사고사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당시 정주영은 정몽필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도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업무를 모두 마치고서야 귀가했다. 집에서 소식을 듣고 통곡 중인 변중석 여사는 집에 들어오는 정주영을 보자마자 '사업 하느라 애들 다 죽인다.'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44] 첫째 정몽필을 집안의 진정한 장남으로 여겼던 것이다. 변중석 여사는 차남 몽구, 3남 몽근, 장녀 경희, 4남 몽우, 5남 몽헌 다섯을 낳았으며 6남 몽준부터 7남 몽윤, 8남 몽일은 모두 외부에서 데리고 온 자식으로 생모가 각자 다르지만 태어나자마자 모두 호적에 올려 줬고 첩의 자식으로서 설움을 받지 않게 키웠다고 한다.
중견 배우 김 모 탤런트로 딸의 친자 확인 소송을 했다는 이야기가 70-80대 노인들의 증언으로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주영의 딸을 낳고 친자 확인 소송을 벌인 사람은 중견 배우 김 씨가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잠깐 배우 활동을 했던 60대 할머니였다. 결국 중견 배우 김 씨는 헛지목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용자와 같이 기업을 일으키고 시련을 버텨내고 성공했으며 멋지게 세상을 살다가 간 풍운아이자 대인배인데도 이러한 보기 민망한 주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편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정주영 회장의 여러 아들은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 회장을 제외하고 군 복무를 전부 수행했다. 평소 정주영 회장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서 아들 모두 군 복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일반인처럼 육군 병장 만기 제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정몽준 전 의원이나 정몽윤 회장은 학군사관(ROTC)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정주영 아들들의 군 복무 수행과 혼외자 논란 때문에 16대 대선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캠프와 주요 대권 주자 중 하나로 손꼽히던 정몽준 캠프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졌던 사례가 있다. 이회창 캠프 측에서 먼저 "정몽준 후보는 고 정주영 회장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다."라고 인신공격을 시작하자 정몽준 캠프 측에서 '정몽준 후보의 형제들은 다 군대 복무를 무사히 끝마칠 만큼 건강해서 굳이 밖에서 자식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 체중 미달로 군대에도 못 간 이회창 후보네 집안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라고 받아쳐버린 것이다. 사실관계로 따지자면 정몽준이 혼외 자녀인 것은 정설이지만 후보 본인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로 인신공격을 가한 것이 이회창 캠프 측인데다 당시 이회창 후보 자녀의 병역 논란과 정주영 일가의 높은 병역 이행율이 국민 감정에 끼친 영향도 있었기 때문에 이회창 캠프 측이 망신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많았던 편이다.
4. 어록[편집]
정주영은 살아생전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대체로 성실과 도전, 노력 등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스스로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나쁜 운이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45]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머리는 쓰라고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46]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것은 없다.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해서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패배주의이다.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그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나는 재벌이란 표현이 싫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하다.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나는 결정에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는 한 내 권한을 양보도 안 하는 대신 다른 이에게 책임 전가도 안한다.
농업은 세계의 산업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든 절대로 소홀히 해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는 우리 인간의 필수 자산이다.
우리가 먹는 식량만큼은 어쨌든 우리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장엄한 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자초한 것이었다.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위대한 사회는 평등 의식 위에 세워진다.
10배로 일하는 사람이 10배는 피곤해야 맞는 이치인데 피곤해하고 권태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이들인 것을 보면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열심히 절약하고 모으면 우선 큰 부자는 못 되어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다.
돈만을 목적으로 한 고리대금이라든지, 은행 이자만 타 먹으면서 재산을 불린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악성 자본주의이다.
지식은 쟁탈해서 분배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은 쟁탈할 수 있다.
운이란 때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좋은 때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놀아도 마당으로 호박이 혼자 굴러들어와 주는 것은 아니며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때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쓰며 나쁜 때는 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 수습하면서 비켜가기 때문에 나쁜 운이 크게 작용을 못한다. 반대로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손이 늦어 붙잡지 못해 좋은 때를 나쁜 때로 만들고 나쁜 때는 운 탓만 하며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항상 불운의 연속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젊을 때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그 날 할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에 마음이 설레어 늦도록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 날이 왔을 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즐겁고 힘차게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다.
여유가 없으면 창의가 죽는다. 나는 경험으로 그걸 체득한 사람이다.
폭 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 준다.
5. 저서[편집]
-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 삼성출판사. 1986.
- 성공시대: 포니는 달린다(츠루 신스케 편역) - 국제문화출판공사. 1989.
-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제삼기획. 1991(초판)/2009(재판).
- 새로운 시작에의 열망 - 울산대학 출판부. 1997.
-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 솔출판사. 1998.
6. 수상 경력[편집]
- 동탑산업훈장 (1970, 1978)
- 대영제국 훈장 코멘더장 (1977)
- 세네갈공화국 공로훈장 (1979)
- 국민훈장 동백장 (1981)
- 미국 골든플레이트장 / 자이레 국가훈장 (1982)
- 중국 경성훈장 (1983)
- 룩셈부르크 월계관장 (1985)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8)
- IOC 올림픽훈장 / 노르웨이 왕실 공로훈장 (1998)
- 요르단 후세인왕 평화상 (2000)
- 만해상 평화상 (2001)
- DMZ 평화상 (2008)
7. 경쟁자[편집]
8. 소속 정당[편집]
9. 선거 이력[편집]
10. 대중 매체[편집]
10.1. 드라마[편집]
- 야망의 25시(MBC) (극중 조웅) - 최불암
- 다큐드라마 기업인(MBC) - 1987년 초에 고석만 PD가 연출해서 실제 정주영 본인을 출연시킨 드라마였으나 여러 문제로 방영이 취소됐다.
- 욕망의 문(KBS2) (극중 박승주[54] ) - 정한용
- 제4공화국(MBC) - 이종만
- 야망의 세월(KBS2) (극중 장 회장) - 이영후
- 영웅시대(MBC) (극중 천태산) - 백성현(아역), 차인표(청년), 최불암(장노년)
- 제5공화국(MBC) - 박종관
- 재벌집 막내아들(JTBC) - (극중 주영일) - 이병준[55]
10.2. 영화[편집]
- 국제시장 - 남진복 분. 젊은 시절의 정주영[56] 으로 나온다. 1950년대 부산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어린 덕수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거야'라는 명언을 말하며 조선소를 만드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를 한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어린 달구가 '왜? 자동차도 국산으로 만든다고 카제?'라며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리곤 트럭에 탑승하고는 어디론가 가는데 트럭의 뒷부분에 현대건설의 한문로고가 적혀있다.
10.3. 기타[편집]
- 다큐멘터리 성공시대(MBC) - 이영후
- 특집 다큐멘터리 "아산 정주영" (HBS)
- 격동 50년, 한국경제 오디세이 - 김용식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SBS) - 1998 회장님의 빅 이벤트 - 이봐, 해봤어? (71회)
10.4. 애니메이션[편집]
- 헬로 카봇 - 카봇 마이스터는 정주영 회장을 오마주한 캐릭터이다. 모든 카봇 중 가장 연장자이며 현대 포니로 변신하고 "카봇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법", "해 봤어? 해 보지도 않고 왜 안 된다는 거야?"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등.
11. 인간성 및 일화[편집]
-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무척 급했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교할 때 신발을 신는 시간이 아까워 발에 걸친 채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삯이 없었다. 망설였지만 배가 있는데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아 돈도 없이 타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돈이 없는 것을 안 사공에게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배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일화에 따라서는 뱃사공이 따귀를 때리고 '후회되지?'라고 묻자 정주영은 '예. 후회되네요. 따귀로 배삯을 치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탈 걸 그랬어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 농부가 되기 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를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귀향하기 전에 서울 구경이나 하자며 창경원을 갔다. 입장료가 아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나는 시골에서 호랑이 많이 봤어.[57] 너 혼자 다녀와." 이랬다고. 심통이 난 정주영은 "아버지가 안 가면 저도 안 가요!"라고 버티면서 결국 부자(父子)는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경원 동물원 구경을 했다.
- 쌀가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했다. 합숙소에서 인부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빈대가 들끓었다. 빈대를 피하고자 긴 탁자를 가져다 놓고 그위에서 잠을 자는데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피를 빨았다.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 물을 떠다 탁자 다리를 담그고 잠을 청했다. 그랬더니 빈대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점프하는 수법으로 피를 빨려고 들었다. 빈대에게서 끈기를 배웠다. 이 때문에 그룹 임원 중 일처리가 미숙하거나 근성 없는 업무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에라이 빈대만도 못한 녀석아!"라고 구박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독립 이전에 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소인 '아도서비스'를 운영할 때였다. 한 직공의 사소한 실수로 공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정주영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었다.[58]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탄식했지만 곧 맘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야 괜찮아! 어차피 건물이 낡아서 헐어버리려고 했으니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 차리고 그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라며 직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 그렇게 알거지가 되고도 재기하게 된 계기도 정주영답다고 할 수 있었다. 정비소에 불이 나고 수리하던 트럭과 택시들이 불탔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러이러 하게 돼서 차가 타 버렸으니 내가 갚겠다. 대신 당장에 갚지는 못하니 다른 수리할 차가 있으면 보내달라.'라고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당연히 당시 차를 소유한 이들은 그 당시의 부호였고 정주영을 죽이네 마네 했지만 경성 내에서 자동차 정비 전문 기술을 가진 곳은 정주영을 포함해 몇 안 될 때였고 그런 기술을 가진 정주영을 족쳐봤자 망가진 차는 못 돌려받을 테니 일단 시간을 줬다. 그리고 정주영은 바로 사채업자 오윤근을 찾아가 다시 정비소를 만들겠다고 돈을 빌려 신설동에 정비소를 새로 차렸다고 한다.
- 포드와 합작해 자동차를 만드려던 때의 일이다. 한국에 온 포드 측 사람들과 포드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가 고장이 났다. 포드 측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차니 자신들이 고치겠다고 했으나 고장난 원인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주영이 공구 등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고쳤다고 한다. 포드 측은 깜짝 놀랐고 정주영은 자신이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포드 차도 고쳤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대가 포드와 합작에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 현대에서 시멘트를 생산할 때 직원들이 정주영 회장의 별명인 호랑이를 상표로 정했다. 그래서 현대 시멘트(現 한일현대시멘트)가 호랑이표 시멘트로 불리며 시멘트 포장지에 호랑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박정희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목이 잘릴 위기를 구해준 적이 있다. 1972년 여름에 대통령 하계 휴가를 앞두고 평소 이용하던 진해 별장을 개수하라고 지시를 내리자 박종규는 아예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로 근사한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이를 보고 "별장을 고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박종규 너는 항상 이런 식이더라! 난 돌아간다!" 라며 불호령을 내렸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지금은 이 곳밖에 숙소가 없으니 오늘 밤만 주무시지요" 라고 설득해 박정희는 못 이긴 척 새 별장에서 묵었다. 그 사이 대통령 측근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이 별장을 지은 정주영이 대통령의 호감을 받으니 그를 끌어들여 박정희를 설득시키기로 하고 이에 정주영은 다음 날 아침 박정희를 독대해 말하길 "각하, 제가 진해 별장을 새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각하가 쓰시는 건물이라 제 사재를 들인 겁니다만 돈도 얼마 안들었으니 그냥 쓰시지요?" 라고 건의를 하자 박정희가 기분을 풀어 박종규도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만든 이 석조주택이 지금의 청해대 본관이다.
- 미포조선소를 건설할 때 어느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59] 지프를 타고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시찰을 하다 운전 미숙으로 차가 바다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이때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준 경비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경비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도와 주고 그 회사에 현대 계열사의 경비를 모두 맡겼다고 한다.[60] 이 경비원의 말에 따르면 "빗속에서 분명히 쌍라이트가 보이길래 곧 차가 나타나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방파제 바위 근처에서 불빛이 사라지길래 이상하게 여겨 순찰을 나갔더니 누군가 바닷속에 빠져 있었다"라고 한다. 정주영의 증언으로는 바다에 빠진 지프차 유리창을 깨고 간신히 빠져나와 물 밖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경비원이 "거기 누구요?"라고 부르자 "야! 지금 사람이 빠져 죽는데 누군지는 알아서 뭐해! 빨리 밧줄 가져와!!"라고 소리 질렀더니 자기인 줄 알더라고 한다. 간신히 바다에서 구조돼 나온 정주영에게 직원들이 몰려와서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진 정주영은 괜시리 화가 났지만 자기 실수로 물에 빠졌던 지라 직원들에게 뭐라 하기 그래서 "물 속이 참 시원하더군" 이라는 농담으로 넘기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 1985년 당시 K-1전차를 제작할 때 전차 몸체에 균열이 발생하자 납품 일자를 지키기 위해 미제 강철판을 구해와서 보강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당연히 현대 미국지사는 난리가 났고 미국 본토를 싹싹 뒤져 결국 고강도 강철판을 구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것을 배편으로 실어 보내자면 무려 1개월이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정주영은 "그럼 아예 B-747기에 실어서 보내라고 해!"라며 지시했고 결국 간신히 K-1 전차의 납기는 지킬 수 있었다.
- 1970년대 석유 파동므로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무렵 중동으로부터 수주가 왔는데 굳이 거기까지 돈을 벌려는 사업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정주영은 바로 중동으로 출국해 현지를 살펴본 후 이렇게 보고(?)했다. "각하, 절호의 기회입니다. 중동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쉬는 날이 없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낮에는 더우니 자고 밤에 공사하면 되고 벽돌을 만들려면 모래가 필요한데 지천에 널린게 모래이며 유조선을 동원해 갈 때는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 땐 석유를 싣고 오면 됩니다."
- 모 계열사를 방문해 발표를 할 때였다. 발표자가 한 시간 분량을 준비해 긴장하고 있는데 정주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10분 만에 끝내." 발표자는 패닉에 빠져 어쩔줄을 몰랐고 그걸 지켜보던 정주영은 바로 일어나 나가버렸다. 결국 발표자 및 부서의 책임자들은 모두 회사에서 짤렸다.
- 정주영과 관련된 책은 수도 없이 많아서 대충 인터넷 서점에서 뒤져도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 중 만화가 이현세의 기획으로 정주영의 전기를 만화로 제작했다. 1992년 선거용으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만화판을 이현세 프로덕션에서 만들어 무료로 배포를 했던 적이 있는데 이후 1998년에 정주영 자신이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새로 펴내자 그 내용을 기존 만화판에 증보해 새로 펴낸 것이다. 정주영이 일궈낸 성과들과 정주영의 인생을 대충이나마 알고 싶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현세 사단답게 세세한 자료 조사와 세밀한 작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어떤 관상가는 정주영 회장의 관상이 용의 상이고 하관 또한 넓직하기 때문에 복이 노년까지 이어져서 현대그룹을 일궈냈다는 평을 했다. 실제로도 왕회장의 이목구비를 동양의 용 그림, 특히 곤룡포 흉배에 수놓여진 용과 꼼꼼히 비교해 보면 매우 흡사하다.
-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을 읽거나 해외에서 날아온 문서를 검토하는 등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이건 쌀가게에 근무할 때 전차 삯이 부족해 꼭두새벽에 일찍 출근한 것에서 시작된 것. 위에 서술된 미포조선소 건설현장 순시 중 바닷물에 추락한 날도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났다고 한다. 꼭두새벽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찍 자야 했는데 밤 9시에 시작하는 지상파 TV 메인 뉴스를 10분 정도만 짤막하게 보고 잠자리에 누웠다고 한다. 그는 "10분 정도면 웬만한 그날 뉴스는 다 나왔으니 뒤에 나오는 내용은 안 봐도 돼"라고 말하며 TV를 껐다.
- 재벌이었지만 소탈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을 고수해 현대 오너가의 아침은 매일 오전 6시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나온 메뉴는 미역국이었는데 그 미역국은 왕회장의 부인 변 여사를 비롯한 현대가 며느리들이 새벽부터 준비한 것이다.
- 소탈함은 그의 일생 곳곳에도 드러나고 지금도 남아있다. 집무실 소파는 너무 오래돼서 시트가 많이 해졌고 청운동 저택은 페인트 칠이 떨어져도 새로 칠을 안해서 그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도둑들이 정주영의 자택을 노리고 들어와 한탕 벌어먹으려고 몰래 침입했는데 재벌집인데도 털어갈 물건이 없었다며 불평불만을 하고 조용히 떠나가기도. 게다가, 그들과 변중석 여사가 마주쳤는데 도둑들이 돈 되는 걸 내놓으라고 하자 건네 준 게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정몽준의 아내를 위해 준비한 예물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현대그룹 사옥 특유의 아치형 디자인도 정주영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이렇게 지은 계동 사옥이 삼성 본관 건설비의 3분의 1밖에 안 들어서 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 앞서 서술한 아침 식사 습관이 있는 것처럼 유독 아침 식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본인이 농부의 아들이었고 상당한 체력과 노동력을 요하는 건설사를 운영했던 경영자였기에 하루종일 일을 하려면 아침을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배경 때문에 범현대가 기업들의 구내 식당은 아침 식사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다른 기업에 비해 식대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먹어야 일을 한다"는 창업주의 유지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61]
- 위의 '아침형 인간'과는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일이지만 의외로 평소에 수면은 충실히 취했다고 한다. 밤에 짧게 자고 대신 낮에 중간중간 쪽잠을 자주 자는 형태였다고. 정주영이 '나는 평소 7~8시간 이상은 잠을 자야 하는 사람이야. 만약 4시간씩 자고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다면 사기꾼이야.'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62] 최불암의 증언(신동아), 조갑제 칼럼.
- 물론 이상의 내용은 정주영 회장 본인의 자서전에 기초한 관계로 자화자찬인 내용이 많다. 이제 와서 위 일화들의 사실성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므로 균형감을 위해 몇 가지 일화의 '어두운 면'도 약간 소개하기로 한다.
- 지프를 타고 조선소를 시찰하던 도중 바다에 빠진 일화는 그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쓰인다. 오너가 차를 몰고 다니다 바다에 빠질 정도로 시설이 열악한 조선소에서, 타고 다닐 차도 없는 일반 노동자 중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이 없었을까? 정주영의 입수 사건은 1974년에 발생했고 1973년에 34명, 1974년에 25명의 작업공이 공사 중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조선뿐만 아니라 현대 계열사 전반의 기록적인 공기 단축에는 이렇듯 현장 작업자들의 희생이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 정주영이 중동 건설 사업에 진출하면서 정부에 했다는 말도 실상은, 더운 낮에 천막 치고 자면 된다고 했지만 현실은 3교대 시스템으로 24시간 작업을 돌렸다고 한다. 각종 자서전과 다큐멘터리에서의 묘사는 근로자들이 오너의 열정에 감화돼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으로 묘사되지만 현실은 정주영을 포함해 당시 한국 기업인 대부분의 인식에 노동자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그 외의 인간적 편의는 그다지 고려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물론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된다는 소극적 옹호론도 있긴 하나 그것이 정당한 비판조차 가로막는 변명거리가 돼선 안 될 것이다. 그 시절에도 챙기는 기업을 찾아 보면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양면을 다 볼 필요가 있다.
- 정주영 특유의 말투로 이거 봐!가 있는데 정주영은 누군가를 부를 때 이거 봐 XXX하면서 이름이나 직책을 부르면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근데 공교롭게도 같은 실향민 출신인 송해 역시도 상대를 부를 때 사석에서 '이거 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걸 보면 북한 지역에서 노인들이 사람을 부르는 말투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2. 여담[편집]
왕회장이라 불릴 정도로 갑부임에도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사실 검소함을 조금 넘어 약간 구두쇠 기질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구멍난 양말 기워서 신고 다니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이었다.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 시절에 나무 장작 값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끼(저녁)만 더운 밥을 해먹었고 다음 날 아침밥은 전날에 지었던 찬밥을 그냥 먹었다고 한다. 출근할 때는 전차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평생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배도 안 부른데 뭐하러 그 연기 뻑뻑 피워서 돈을 쓰느냐?"였다고.(...) 최불암도 정주영의 자택에 초청받아 갔을 때, 재벌집인데도 욕실 타일이 낡아서 깨져 있는데 그대로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63]
다만 건강에 관해서는 절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산의료원이라는 거대 병원 설립도 있지만 민간 요법으로 산삼도 즐겨 먹었는데 1980년 강원도 인제에서 600년은 넘은 130cm의 천연 산삼이 나왔다는 말에 단숨에 달려와 거금 7,800만 원[64] 을 내고 그 산삼을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다고 한다.# 이런거 보면 본인이 생각하기에 돈 쓰기 아까운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아끼고 돈 써도 되겠다 싶은 영역엔 펑펑 쓰는 스타일이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듯.[65]
사업을 시작하기 전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현재의 사법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지만 두 번 다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고향 통천의 첫사랑 영향이 큰데 동네 이장집 딸이었던 정주영의 첫사랑 집안엔 당시 동아일보를 배달시켰는데 여기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흙'[66] 을 보고 자신도 등장인물처럼 변호사가 돼 억울함을 겪는 사람을 돕고 싶어했다고 한다. 거기에 농부보단 변호사가 역시 이장 집안에 어필해 첫사랑과 결혼하기엔 더 있어보였을 테고. 허나 결국 결혼하지 못했고[67] , 나름 사업에 물꼬가 틔인 광복 이후 6.25 이전에 한 번 찾아가 봤지만 이미 결혼한 그녀를 보고 절망했다고 한다.
한때 한국 기업계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받은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현대그룹 명예 회장직을 퇴임하며 지급받은 것인데 현대건설을 비롯해 현대자동차,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총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을 지급했고 이 중 현대건설에서 157억 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21년 후 자신의 아들인 정몽구에 의해 깨지게 된다. 정몽구 회장은 2021년 3월 현대자동차그룹의 등기 이사직에서 퇴직하면서 현대차그룹에서만 527억 3,800만 원을 지급 받았다. 하술한 것처럼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현대가의 경우에는 받을 것은 받겠다는 것이 정착돼 있는 듯하다.
현대건설의 경우 정주영 전 명예 회장이 창립 연도인 4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한 것을 근거로, 퇴임 직전 3개월 평균 월 급여에 연간 상여금을 12로 나눈 금액을 더한 후 총 근속 연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하고 대표이사의 경우 근속 연수에 4배를 곱해 준다. 따라서 정주영 회장이 1947년 5월 창립부터 53년간 대표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평균 월급(상여금 포함) 7,400만 원에 가산 근속 연수 212년(53x4)을 곱한 157억 원의 퇴직금을 지급 받았다.
사실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저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퇴직금의 지급은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자금 사정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퇴직금은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억 원을 지원받은 현대건설의 입장에서는 더욱 부담되는 일이었고 현대건설에서는 내심 퇴직금 수령을 SKIP해 주시길 바랐으나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왕자의 난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MH를 지원하기 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됐으나 현대건설이 부도 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였고 회사채와 기타 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 전환과 유상 증자에 투입해 현대건설 주식으로 변했다. 이 주식은 정주영 회장의 사망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고 감자됐다. 결국 돌고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대선 출마를 겸해서 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호사가들은 정 회장의 대선 출마는 완전 실패였다며 그의 자서전 제목을 따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PR을 겸해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무료 배포되기도 했다. 당시 뉴스에까지 나왔을 정도다.
2006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을 선정한 것이며 리스트에 포함된 한국인은 정주영, 강철환, 백남준 총 3명이다. 또한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목록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다.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 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K리그와 민속 씨름 출범 당시에는 현대 호랑이 축구단[69] 과 현대 코끼리 씨름단[70] 을 창단할 정도로 스포츠단 운영에 관심이 많았다. 축구와 씨름 외에도 농구와 배구에도 관심이 많아 현대 남자 농구단과 현대 여자 농구단, 현대 여자 배구단에 엄청난 투자를 단행했다. 고려대 2학년생이던 이충희를 정주영이 직접 점찍고 현대 농구단으로 스카우트한 것은 농구계에서 이미 유명한 일화다. 다만 야구에 대한 참여는 다소 늦었는데[71] 인생 말년이던 1996년에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할 때 창단식에 찾아와 대형 기념구에 직접 싸인하기도 했다.[72]
무엇보다 정주영은 수많은 스포츠 종목 중에서도 씨름을 매우 좋아했는데 과거 현대건설 신입 사원 연수 때는 직접 샅바를 잡고 모래판에서 씨름 경기를 뛰기도 했고 이만기가 초대 천하장사로 등극했던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 대회 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장충체육관 VIP석을 지키며 모든 경기를 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이만기가 경남대를 졸업하자 정주영이 직접 나서서 이만기를 영입했고 현대 코끼리 씨름단의 원년 멤버가 된다. 또 현대스리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현대중공업 부서별 축구대회의 첫 대회 때는 등번호 1번을 달고 직접 경기를 뛸 정도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정주영의 이 같은 스포츠 사랑은 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는데 차남 정몽구는 대한양궁협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그 임무를 아들에게 넘겨줬고 육남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거쳐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에까지 오를 정도로 세계 축구계의 거인으로 자리잡게 됐다. 또 오남 정몽헌과 칠남 정몽윤은 현대가에서 드물게 소문난 야빠였는데 정몽헌은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로서 명문 구단의 기틀을 닦았고 정몽윤은 한때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직계는 아니지만 정주영의 조카인 정몽규는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와 최불암의 팬이어서 드라마에 농부 역으로 출연할 뻔한 적도 있으나 현대그룹 임원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최불암을 정치계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이런 인연인지 최불암은 극 중 정주영 역할도 꽤 했는데 훗날 동사의 드라마 거부열전 - 정주영 편, 영웅시대에서 정주영을 모델로 한 2부의 노년 천태산 역을 맡기도 했다. 또 당시 방송에서 정주영의 흉내를 잘하기로 유명했던 개그맨 최병서도 마음에 들어해서 만날 때마다 용돈을 줬다고 한다.
노동조합을 싫어해 "노조 만들면 죄다 빨갱이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이는 사망 당시 몇몇 신문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다만 정확한 증인이 없으니 카더라성일지도.. 애초에 빨갱이 수장 비슷한 분[73] 도 흔쾌히 만나신 분이다.(...) 다만 오늘날 강성노조하면 떠오르는 현대중공업 노조가 탄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정주영은 당시 기업가 중에서는 노조 결성 운동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강하게 탄압해 억누르는 데 실패한 축에 속한다.[74] 더 정확히 말하면 80말~90초의 노동운동 관련 자료나 유인물에서 제일 많이 까이는 건 대우그룹의 김우중이고 삼성의 이병철은 무노조 경영 원칙 때문에 도리어 의외로 덜 까인데 비해[75] 정주영은 일단 까임의 우선순위 자체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상기한 청문회 영상을 봐도 노동자 문제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 한편, 방북 당시 연회에서 정주영이 부른 노래가 아이러니하게도 노조에서 많이 부르는 아침이슬이었다.[76]
김종인의 회고록 노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전두환 정부에서 노조를 허가하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산별 노조로 할 것인가 직장별 노조로 할 것인가 격론이 오갔다고 한다. 그 중에 한 회장이 "왜 내 사람들을 국가가 좌지우지하며 묶으려고 하냐"고 독일식 산별노조를 지지하던 김종인을 비판했다고 하는데 누가 봐도 정주영이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서술했다. 김종인은 정주영과 결국 직장별 노조를 허가해 준 남덕우에 대해 대단히 혹평하고 있다.
통천군 출신 동향 박용학 전 대농 창업주와 친했다.
이장규가 저술한 노태우 정부 경제에 관한 책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에는 정주영이 정치를 하게 결심하게 된 계기가 나오는데 꽤 재미있다. 노태우 정부는 초기에만 해도 돈을 받지 않으려고 꽤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 없이는 도저히 정치적 현안을 풀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 거리낌 없이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받으면 기업의 주요 현안이나 불만 사항을 해결해주던 전두환과 다르게 노태우는 돈만 받고 기업들의 애로사항 해결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노태우 정부가 부동산을 잡기 위해 업무용 부동산 이외의 부동산을 매각하라고 하자 정주영의 불만은 폭발해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정주영 회장이 사석에서 노태우 정부의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고 할 정도. 그리고 본인이 재벌 해체 공약을 내세운건 함정.
재계에는 이른바 '정주영병(鄭周永病]])'이란 용어가 있다. 정주영의 방식, 특히 '안 되면 되게 하라.', '임자, 해봤어?'가 상징하는 정주영 특유의 모험주의, 군대식 조직 문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려는 방식이 진짜 성공의 방식이라고 착각하고 무리하게 경영을 하다가 실패하는 유형을 말한다.(...)
1995년 기준 포브스 선정 세계 9위 부자였다. 참고로 당시 1위는 빌 게이츠, 2위는 워렌 버핏이였다.
2023년, 일론 머스크가 정주영의 일대기와 관련된 트위터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12.1. MB와의 관계[편집]
정주영 회장은 과거 현대에서 일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시사저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내가 서울대 출신의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77]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 씨가 소양강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 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 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양강 댐을 만들 때 이명박 씨는 간부도 아니었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설계에서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출신들이 했다. 모두 이씨의 (회사) 선배다.
현대건설이 65년에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 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생긴 지가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건설 초반기에 맡았던 공사에 그 분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드라마상으로는 조선소 건설이나 자동차 등등 다 그 분이 한 것처럼 나오니까 사내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많이 생겼다.[78]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걸 좋게 보지만 같은 동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때 저 밑에서 서류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다 한 걸로 나오고 그건 좋은데 중동 건설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나오니 그때 이명박 씨는 참가할 자격도 못 됐다. 서울대 (회사) 선배들이 다 한 건데 서로 말은 못해도 회사 내에서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그 분이 떠날 분위기를 자초한 거다.
이를 종합해 보면 정주영 입장에서 이명박은 능력이 있어서 좀 눈에 들어오는 부하 직원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유난히 특별 대우를 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당시 이명박 감시하고 아니면 짜르라는 식으로 압박했는데 정주영이 지켜줬다는 식의 설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2007년 당시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가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에 관한 뒷소문들을 조사해 미 국무부에 전달한 문서가 폭로된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압박에 굴복해 이명박을 내쫓기라도 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있는데 당시 새파란 신입 사원에 불과했을 이명박을 대통령, 그것도 독재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가 어떻게 알아보고 심지어 편지까지 보내 경고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는 가정을 하고 보면 이명박은 1960년대 한일협정 체결 당시 고려대에서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적이 있는데 박정희가 이것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명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운동권 전력으로 취업길이 막막해지자 청와대에 직접 탄원서를 넣었는데 그 패기를 높게 산 박정희가 비서진을 보내 현대건설 합격을 통보했다고 한다.[79] 따라서 이때 잘 지켜 보라는 메시지를 덧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정주영이 그와 같은 사정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단순히 잘 지켜보라는 말 한 마디만 보고 의미를 오해했을 확률도 사실 생각하기 어렵다. 뭐 어찌됐든 소문의 영역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