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유대-로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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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유대-로마 전쟁
라틴어: Secundum Bellum Iudaicum
그리스어: Δεύτερος Ιουδαϊκός Πόλεμος
ha-galuyot מרד התפוצות :히브리어
영어: Second Jewish–Roman War

시기
115년 ~ 117년
장소
키레나이카, 이집트,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열심당원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트라야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마르키우스 투르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시우스 퀴에투스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루쿠아스[1]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율리아누스†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파푸스†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아르테미오
병력
불명
불명
피해
유대인에 의한 키프로스 섬과 키레나이카 주민 대학살[2]
미상
결과
로마 제국의 승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유다이아 속주 복귀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이후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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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15~117년, 키레나이카, 이집트, 키프로스 섬,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2대 황제인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이 파르티아 원정에 전념하는 틈을 타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반란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루시우스 퀴에투스 장군의 그리스식 이름을 따 키토스 전쟁(Kitos War)으로도 일컬어진다.

2. 배경[편집]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수많은 유대인들이 지중해 세계 각지로 이주했다(디아스포라). 그들은 상업이 활발한 도시에서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알렉산드리아,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섬 등지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또한 동방에서 로마 제국과 대치하는 강력한 국가인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몰려 살았다. 그러나 비유대인들은 유대인을 매우 경계하여 완전히 배제하길 희망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이끈 티투스에게 유대인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그들을 도시에서 추방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3]

반유대주의가 심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유•무형의 박해를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로마는 전쟁 이후 유대교를 신봉하는 걸 용인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이른바 '유대인 세금'을 새로 도입했다. 이로 인해 다른 종족보다 고율의 세금을 내느라 고통받은 유대인들은 자연히 로마 당국에 강한 불만을 품고 메시아가 강림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주고 세상을 정화할 날이 오길 갈망했다. 전쟁 후에도 살아남아 지하에서 암약하는 열심당원들은 동포의 이같은 불만을 부추기며 재기를 꾀했다.

이렇듯 유대인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던 113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를 로마의 동의없이 바꾼 파르티아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병력을 일으켰다.(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사실 트라야누스는 오래 전부터 파르티아를 정벌할 마음을 품고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 플리니우스와 주고받은 서한에 따르면, 그는 비티니아 지방 행정장관에게 군대가 행군할 때 필요한 보급품을 미리 마련하고 추가 비용을 속주민들이 부담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식량과 무기 외에도 각 속주마다 차출되는 보조병 등도 포함되었으니, 그 비용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르티아가 옹립한 아르메니아 왕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병합한 뒤, 둘로 나눠서 1군은 코카서스 일대와 흑해 동부 연안을 공략하고, 2군은 루시우스 퀴에투스 장군을 필두로 파르티아를 직공해 티그리스 강 유역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페르시아 만까지 공략했다.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았으며,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여기에 나바테아인이 세운 나바테아 왕국을 굴복시켜 아라비아 속주로 편입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바빌론성지순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10년만 젊었다면 인도까지 갔을텐데!"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이같은 대규모 원정은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했다. 파르티아의 군소 영주들은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며 로마군을 후방에서 괴롭혔고, 과중한 과세로 고통받은 속주민들은 각지에서 봉기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태를 일으킨 이들은 바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가뜩이나 다른 민족보다 고율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더 많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에 질렸고, 지중해 동방을 지키던 로마군이 대부분 파르티아로 파견된 이 상황이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15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 경과[편집]


처음 반란이 일어난 지역은 북아프리카의 키레나이카였다. 루쿠아스(또는 안드레아스)가 이끄는 유대 반란군은 헤카테, 유피테르, 아폴로,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시스 신전을 포함한 수많은 사원과 공중 목욕탕 등 공공건물을 모조리 파괴했다.[4]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안드레아스를 유대의 왕으로 옹립했으며 인육을 먹는 등 잔학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5세기 경의 기독교 역사가인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유대 반란군이 키레나이카 주민들을 너무 많이 죽이는 바람에 인구가 급감해서 새 황제로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했다고 한다.

루쿠아스는 여세를 몰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갔다. 이집트 총독 마르쿠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싸울 엄두를 못내고 달아난 덕분에 무혈 입성한 반란군은 이집트 신전과 폼페이우스의 무덤을 파괴했다. 키프로스 섬에서도 아르테미오라는 인물이 유대 반란군을 이끌고 섬을 장악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무려 240,000명에 달하는 그리스인이 피살당했다고 한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의 퇴로가 한때 끊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으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친 로마파 인사인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새로운 샤한샤로 옹립했다. 이후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메소포타미아로 파견해 유대 반란을 진압하여 퇴로를 열게 하고, 마르키우스 루푸스를 이집트로 파견해 루쿠아스의 유대인 일당을 무찌르도록 했다. 퀴에투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유대 반란군을 손쉽게 소탕했지만, 루푸스는 반란군의 수가 워낙 많아서 117년까지 고전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끝내 승기를 잡자, 유대 반란의 수괴인 루쿠아스는 유대로 도피했다.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투르보는 그를 추격하는 한편, 반란의 핵심 지도자였던 율리아누스와 파푸스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을 정벌한 뒤, 퀴에투스는 유대의 로마군을 이끌고, 율리아누스와 파푸스 휘하의 반란군이 집결한 뤼다를 포위 공격했다. 그곳에 갇힌 유대인들은 결사 항전했지만,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항복했다. 율리아누스와 파푸스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집단 처형되었다. 퀴에투스는 여세를 몰아 키프로스 섬으로 소규모의 로마군을 보내 진압했다. 아르테미오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그가 이끌던 유대 반란군은 모조리 학살당했다고 한다. 퀴에투스는 유대인들이 키프로스 섬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북아프리카의 키레네를 탈환한 뒤 파괴된 신전의 재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유대인 자녀들을 그리스인 방식으로 키우도록 강요했다.


4. 이후[편집]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은 2년여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한 후유증이 막심했기에 파르티아 원정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다. 트라야누스는 깊은 실망과 좌절에 빠진 채 로마로 귀환하던 중 117년 8월 9일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의 작은 섬인 셀레누스에서 병사했다. 이후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메소포타미아 속주가 파르티아에 도로 넘어가는 걸 허용했고,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축출된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오스로에네의 군주로 삼았다. 오스로에네는 한 세기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국가로서 불안정한 독립을 유지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전원 유다이아 속주로 추방시켰다. 그는 헬라(그리스) 문화의 신봉자로, 그리스인들과 수시로 마찰을 벌이며 다신교 세계속에서 유일신교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극히 혐오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를 금지하고, 중범자들에게만 할례를 실시하게 하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130년, 하드리아누스는 폐허로 남아있었던 예루살렘의 터에 신도시인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고 유피테르 신전을 도시 중앙에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5] 그는 유대인의 성전 역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대인들은 신도시에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지는 것 자체를 혐오했다. 그리하여 132년, 바르 코크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 또는 안드레아스[2] 디오 카시우스는 키프로스 섬 240,000명, 키레나이카 220,000명으로 총합 460,000명이 유대 반란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만큼 죽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키레나이카에 주민을 이주시켜야 했던 것으로 보아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3] 특히 그리스계 주민들이 많이 살았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높았는데, 그리스인들은 상업 부분에서 유대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토스 전쟁 와중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주도한 유대인 학살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4] 이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티투스 휘하의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추정된다.[5] 2014년 예루살렘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헌정된 제10 프리텐시스 군단 비문과 129/130년에 주조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기념 주화가 발견되면서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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