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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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그리스도교의 제5차 보편 공의회.

이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성향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에데사의 이바스를 규탄하였다. 이들의 저작을 '삼장'(Three Chapters)이라고 부른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방의 합성론파의 지지를 얻한 정치적 목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성향으로 알려진 저작들을 규탄하였다.(네스토리우스파는 합성론파의 입장에서도 이단이었다.) 그런데 이 세 명은 이미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사람이었고 게다가 칼케돈 공의회에서 복권되었던 이들이었다. 여기에는 단성론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황제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단성론은 이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제국에는 이미 단성론이 너무 많이 퍼져 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후 테오도라가 단성론 신봉자였다(...). 황제는 삼장 규탄을 통해 단성론을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한편,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공격으로 공동의 적을 만들고자 했던 것.

동방의 주교들은 이에 동의하였으나, 교황 비질리오는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동방과 같은 문제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확고하게 단성론을 반대할 수 있었고, 비질리오 본인 역시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황제는 동고트족이 로마를 포위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피난을 명목으로 교황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온다. 결국 비질리오는 콘스탄티노플에 억류되는 수모를 겪고 결국 삼장 규탄에 동의한다. 하지만 테오도라가 사망하고 이러한 조치에 대한 서방 교회의 반발이 잇따르자 비질리오는 이를 철회해 버린다. 이에 열받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병사를 시켜 교황을 납치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결국은 유화책으로 돌아섰고, 522년에는 삼장 규탄을 일시적으로 철회하기로 한다.[1]

황제는 결국 세계 공의회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553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소집한 이 공의회에는 150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결국 공의회에서 이들 세 명의 저작은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나, 그 본인에 대해서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만 파문당했을 뿐 나머지 두 명은 파문당하지 않았다. 비질리오는 콘스탄티노플에 오긴 했지만, 끝끝내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다만 공의회의 결정들을 승인했을 뿐이었다. 황제는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고, 충분히 논쟁했다고 생각했기에 비질리오를 이집트 사막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비질리오는 온갖 고생을 하다가 2년 후인 555년 세상을 떠났다.

후임 교황으로는 펠라지오 1세가 취임하였다. 펠라지오 1세 역시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옥살이를 했던 사람이지만, 펠라지오 1세 시기에 결국 황제와 교회는 화해를 이룬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밀라노와 아퀼레이아 등 북부 이탈리아의 주교들이 반발하여 로마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심지어 아퀼레이아 교구는 아예 총대주교를 자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698년에 가서야 관계를 회복한다(아퀼레이아 총대주교라는 직함은 오늘날에도 명목상으로 남아있다.).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 신성과 인성을 재확인했다. 신학적으로는 이전 공의회의 결정들을 재확인한 것이 전부이며 새로 제정된 규범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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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이 때 황제와 교황 사이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 그 유명한 벨리사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