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경 수비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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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가사


1. 개요[편집]


조선국경수비대의 노래(朝鮮國境守備隊の歌)[1]1929년(쇼와 4년)에 조선국경수비대가 작사하고, 이치카와 테츠조(市川鉄蔵)가 작곡한 구 일본군 육군의 군가다. 이름 그대로 한국(당시에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 배치된 조선군(일본제국) 예하 조선국경수비대에서 불렸던 음악이다. 일본 군가 중에서는 드물게 식민지 조선을 소재로 했다.


2. 가사[편집]


千古の鎭護 白頭の

東に流るる 豆滿江

西を隔つる 鴨綠江

蜿蜒遥か 三百里

國境守備の名譽負ふ

武夫ここに 數千人

천고의 진호 백두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

서쪽 가로지르는 압록강

구불구불 아득한 삼백 리[2]

국경 수비의 명예를 진

무부(武夫) 여기에 수천 명

長白おろし 荒むとき

氷雪四方を閉ぢこめて

今宵も零下 三十度

太刀佩く肌は 裂くるとも

銃とる双手は 落つるとも

同胞まもる 血は燃ゆる

장백산 산바람 거칠어질 때

빙설은 사방을 가득 매우고

오늘 밤도 영하 30도

큰 칼 찬 살갗이 터질지라도

총을 잡은 두 손이 떨어져도

동포를 수호하는 피는 끓는다

高梁高く繁るとき

野山も里も水涸れて

日每百度の炎熱に

照る日は頭を焦すとも

惡疫は骨身を溶かすとも

報國の士気 彌振ふ

수숫대가 높이 우거질 때

산야도 마을도 물이 가물어

날마다 100도[3]

염열

갠 날은 머리를 태울지라도

악역은 뼈와 살을 녹일지라도[4]

보국의 사기를 널리 떨친다

平安の草 青い春

咸鏡の月 冴ゆる秋

雄々し古今の勇者が

結びし夢の 跡訪えば

姿も変へぬ 山河の

我を教ふる 声すなり

평안도의 풀이 푸르른 봄

함경도의 달이 맑은 가을

씩씩한 고금의 용자

꾸다 만 꿈의 흔적 찾으면[5]

모습도 변치 않는 산하의

나를 일깨우는 목소리로다

野は縹渺の屯營に

朝畏む 勅諭

夕に磨く 劍太刀

故鄕遠く出で立ちて

生死 苦楽を誓ひたる

思ひ出深き團欒かな

들판이 광활한 주둔지에

아침에는 황공하신 칙유

저녁에 닦는[6]

큰 칼

고향을 멀리 떠나와서

생사 고락을 맹세하였던

추억은 깊고도 단란하구나

不逞仇なす輩の

來らば來れ 試しみん

日頃鍛へし 我が腕

家守る妻子も諸共に

などか後れん日本魂

武装して起つ健氣さよ

불령한 원수놈의 무리들

올 테면 오라 붙어 보자

평소에 단련시킨 나의 솜씨

집 지키는 처자도 함께[7]

어찌 뒤지랴 일본의 혼

무장해서 일어나는 건장한 기운

戰雲極東を掩ふとき

常に正義の矛執りて

遂げん男子の本懷を

海山隔つ父母の

老いて壮なる激勵に

感激の心 高鳴るよ

전운이 극동을 엄습할 때

언제나 정의의 창을 집고

이루리라 남자의 숙원을

산 넘고 바다 건너 계신 부모의

연로하신 장한 격려에

감격하는 마음은 고동치도다

積る辛苦の効果ありて

御稜威 輝く日の御旗

鷄林遍く翻る

誇れ我が友眉揚げて

勵め我が友永へに

國境守備の勳功を

쌓아온 고초의 효과 있어

폐하의 위세 높은 태양의 깃발

계림에 두루 나부끼도다

자랑하라 나의 벗아 눈썹 올리고

힘써라 나의 벗아 영원히

국경 수비의 공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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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여서 '조선 국경 수비의 노래(朝鮮國境守備の歌)'라고도 불린다.[2] 우리 리수로는 3천리에 해당[3] 화씨 100℃(섭씨 약 38℃)다. 위의 가사 '零下 三十度'도 화씨긴 한데 섭씨(-34.4℃)와 비슷하다.[4]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천연두, 결핵, 이질, 장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다. 물론 일본에서도 조선보다는 약간 사정이 나았을 뿐 습기가 많은 여름 기후 탓에 전염병은 자주 돌았다.[5] 위치상 삼국의 무사들, 특히 고구려의 무사들을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에 대한 일본 제국의 문화적 전유의 예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6] '연마하는'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7]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평균 결혼 연령이 지금보다 낮았기 때문에, 일본군 중에서도 결혼식을 올린 뒤 아내를 집에 두고 입대한 장병들이 많이 있었다. 후사를 남기기 위해 일부러 입대 전에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