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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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趙染
(? ~ 314)

서진전조의 인물. 자는 문한(文瀚). 옹주 경조군 신풍현 출신. 명나라 시기 야사집인 《속삼국연의》는 조통의 아들이라 하지만 본적부터 다르고 근거도 없다.


2. 생애[편집]


영가 5년(311년) 7월, 남양왕 사마모의 아문장을 지내던 조염은 명을 받고 포판(蒲阪)을 수비하였다. 조염은 사마모에게 빙익(馮翊)태수 자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심히 원망하며 무리를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한나라의 소무제 유총은 조염을 평서장군으로 삼고 신풍(新豐)을 지키게 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8월, 소무제 유총은 조염과 안서장군 유아(劉雅)에게 20,000명의 기병을 주어 장안을 공격케 하고, 하내왕 유찬과 시안왕 유요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그 뒤를 받치게 하였다. 조염의 군대는 동관(潼關)에서 사마모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패사시킨 후 하규(下邽)까지 진격하자, 양주독호 북궁순이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장안에서 나와 조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모는 다시 장수 순우정(淳于定)을 보내 조염을 공격해보았지만, 또 패하여 창고의 군량은 소진되었고 병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조염이 마침내 장안성을 포위하니, 사마모는 군사좨주 위보(韋補)의 조언에 따라 장안성을 들어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장안성을 접수한 조염은 투항한 사마모를 후방에 있는 하내왕 유찬에게 넘겼는데, 유찬은 군중에서 사마모를 곧바로 처형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유찬이 사마모를 살해했다는 소식 듣고 안정(安定)으로 도망쳤던 빙익태수 삭침(索綝)과 안이호군 국윤 등이 안정태수 가필과 진 황실 부흥을 모의하고, 군대 50,000명을 일으켜 장안으로 향하였다. 당시 한나라에 아직 투항하지 않던 옹주(雍州)자사 국특(麴特), 신평(新平)태수 축회(竺恢), 부풍(扶風)태수 양종(梁綜) 등도 가필이 거병했다는 소식에 덩달아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니 그 무리가 도합 100,000명에 달하였다. 신풍에 주둔하고 있던 하내왕 유찬은 유아와 조염을 파견해 신평의 축회부터 공격하게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때 삭침이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고, 조염과 유아는 삭침과 100여 차례 싸웠으나 끝내 패퇴하였다.

가평 3년(313년) 4월, 중산왕 유요가 평서장군 조염, 사예교위 교지명과 함께 장안성으로 진공하자, 진나라의 옹주자사 국윤도 장안에서 나와 황백성(黃白城)에 주둔하여 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에 유요는 군대를 포판에 주둔시키고 국윤의 진군과 더불어 여러 번 전투를 벌였다.

가평 3년(313년) 10월, 국윤은 유요, 조염과 수 차례 격돌하였으나 번번이 격파당해 황백성에서 간신히 농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제 사마업이 삭침을 정동대장군 삼아 군사를 보내 황백성을 구원케 하니, 그 틈을 노린 유요가 조염에게 기병 5,000명을 주어 장안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조염이 밤에 기병대를 이끌고 장안을 급습하여 장안의 외성(外城)을 점거하자, 민제 사마업은 사안루(射雁樓)로 피신하였다. 조염은 해가 뜰 때까지 장안성의 용미(龍尾)와 여러 군영들을 불태워 없애고, 1,000여 명을 죽인 뒤, 소요원(逍遙園)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이후 아성(阿城)의 장수 국감(麴鑒)이 5,000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을 구원한다는 소식에, 조염은 철수하여 유요의 군영으로 복귀했다. 국감은 조염을 추격했다가 영무(零武)에서 마중나온 유요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가평 3년(313년) 11월, 국윤의 기습으로 인해 교지명이 전사하고, 유요와 조염은 대패하여 수도 평양(平陽)으로 돌아갔다.

가평 4년(314년) 6월, 중산왕 유요가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은 신풍에 주둔하여 다시 장안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태위 삭침이 나와서 먼저 조염을 치니, 조염은 이전의 국윤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던 것을 생각하며 삭침을 가벼이 여겼다. 그때 장사 노휘(魯徽)가 간했다.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싸우기 마련인데 하물며 국가면 어떻겠습니까."

조염이 코웃음치며 답했다.

"삭침과 같은 소인배가 어찌 내 검과 말굽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이른 아침에 정예 기병 수백 기만 이끌고 삭침의 군대와 싸우러 가면서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아침밥은 삭침을 사로잡은 후에 먹겠다!"

이후 성문을 열고 나와, 신풍성 서쪽에서 삭침과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삭침에게 패하고 망신을 당한 조염은 몹시 후회하며

"내가 노휘의 말을 듣지 않아 패하고 말았으니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는가!"

라 하고는 부끄러움에 노휘를 붙잡아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 이윽고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 노휘가 조염에게 말했다.

"장군은 너그럽지 못하고 우직하여 간언을 무시했다가 패한 것일진대, 간언을 올린 충량한 이마저 주살한다면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세상으로 대하시렵니까. 원소가 전에 그렇게 하였고, 이제 장군이 그 뒤를 좇고 있으니 패망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사마님(당시 중산왕 유요의 직책)을 다시 뵈올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나, 만약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나는 마땅히 황천으로 가서 전풍에게 호소하여 장군이 침상에서 편히 죽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을 향해 소리치길

"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죽겠다!"

라 하였다.[1]

노휘를 처형한 조염은 장수 은개(殷凱)와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장안으로 진격하였고, 도중에 빙익에서 요격하러 나온 국윤의 군대도 격파하였다. 국윤이 일단 군사를 거두어 물러났다가 밤에 은개의 진영을 야습하여 은개를 죽이니, 유요는 잠시 장안 공략을 멈추고 하내(河內)로 방향을 틀어 하내군의 회현(懷縣)을 포위하였다. 회현을 지키던 하내태수 곽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식이 떨어져 하내군을 포기하고, 신정(新鄭)으로 달아나 형양태수 이구에게 의탁하였다. 유요는 주인 잃은 하내를 손쉽게 장악한 후, 다시 포판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조염을 보내 장안 공략을 재개하게 하였다.

가평 4년(314년) 가을, 조염이 북지군(北地郡)을 공격하자, 국윤은 청백성(青白城)으로 들어가 농성하면서 조염의 진군을 막았다. 성을 한창 공격하던 조염은 어느 날 밤에 노기를 가득 띄운 노휘의 혼령이 쏜 화살에 맞는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조염은 전투를 지휘하던 중 적군 중노병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니, 한나라 군대는 청백성 공성을 중지하고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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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대사마·중산왕 유요의 진영이 조염의 진영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훗날 노휘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요는 "조염은 작은 웅덩이와도 같아 한 자의 잉어조차 품지 못했구나."라 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