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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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朱超石
(382년 ~ 418년)

동진 말기의 장수로 주령석의 아우이다.


2. 생애[편집]


패군(沛郡) 패현(沛縣) 출신으로, 집안이 대대로 장수를 지냈다. 주초석은 형인 주령석과 마찬가지로 과감했고 민첩하며 말을 잘 탔으며, 편지를 잘 썼다. 환겸이 위장군이 되자 주초석은 참군으로 환겸을 따랐고, 뒤에 하무기가 보국장군과 우장군을 역임할 때도 참군으로 하무기를 따랐다.

410년, 유유남연 정벌에 집중하는 사이 노순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초석은 하무기의 휘하에서 노순의 침공을 막았다가 하무기가 전사하자, 서도복에게 사로잡혀 서도복의 참군이 되었다. 서도복이 석두(石頭)에 이를 때, 주초석은 같은 배를 탄 사람을 설득하여 배를 돌려 유유에게 귀순했고, 유유는 매우 기뻐하여 주초석을 서주 주부로 삼았다. 주초석은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환겸의 시신을 직접 거두어 장례를 지냈으며, 거기부 참군, 상서도관랑(尙書都官郞)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중병참군(中兵參軍), 영삭장군, 패군태수로 보임되었다.

412년, 유유가 유의를 토벌할 때 주초석은 유유의 명으로 보병과 기병을 거느려 강릉(江陵)으로 출병했다가 그 직전에 유의가 토벌되어서 귀환했다. 415년,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주초석은 관군장군(冠軍將軍) 단도제와 함께 보병을 이끌어 대부(大薄)로 출병했다. 한편 사마휴지와 함께 거병한 노종지(魯宗之)는 주초석이 다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군대를 이끌어 역공하였으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릉이 평정되었다. 주초석은 단도제와 함께 양양으로 출병하여 신야태수가 되고 노종지를 남양까지 추격하다가 귀환했다.

416년, 유유가 후진 정벌을 감행할 때 주초석은 선봉이 되어 황하에 입성했다. 한편 북위에서는 명원제 탁발사가 요흥의 사위였기에 황문랑(黃門郞) 아청(鵞青), 기주자사 안평공(安平公) 을전권(乙旃眷), 양주자사 탁발도생(托跋道生), 청주자사 아박간(阿薄干)과 보병과 기병 10만을 하북(河北)으로 파견하여 주둔시켰고 항상 수천 명의 기병이 황하를 따라 동진군의 진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주초석은 호번, 유영조(劉榮祖) 등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다시 북위군에게 포위되자 하루 종일 분전하여 북위군을 물리쳤다. 유유가 다시 진무장군(振武將軍) 서의지(徐猗之)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월기성(越騎城)으로 향하게 했을 때 후진군이 서의지를 포위하자, 주초석은 서의지의 구원에 나섰으나 그 직전에 후진군이 퇴각했다. 동진군이 포판(蒲坂)을 함락한 뒤 주초석은 하동태수로 임명되어 포판을 수비했다. 후진군이 주초석의 병력이 적다고 판단하여 다시 포판을 공격하자, 주초석은 패전하여 달아났고 며칠 만에 동진군을 따라잡았다.

이후 유목지가 건강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유가 장안(長安)에서 건강으로 돌아갈 때 주초석은 황하를 따라서 팽성으로 돌아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고 흥평현오등후(興平縣五等侯)에 봉해졌다. 이때 유유는 유의진을 장안 수비에 남겼고 왕진악심전자에게 주초석을 보좌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왕진악과 심전자의 갈등이 폭발하여 왕진악을 싫어하던 심전자가 왕진악을 죽이고 심전자를 왕진악의 친척 왕수가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고 북하혁련발발이 관중 침공을 시작하여 관중이 혼란에 빠지자, 유유는 주초석에게 하락(河洛)을 위로하도록 명했다. 포판에 이르러 때마침 주령석이 장안에서 조공루(曹公壘)로 달아나자, 주초석은 황하를 건너 주령석과 합류했으며, 북하와 전투를 벌였으나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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