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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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XX 찍지마 사건
3. iPad 사용 사건
4. '칸 각본상 예의상 준 것' 발언 논란
5. '아빠 찬스' 17억 아파트 논란
7. 그 외


1. 개요[편집]


유인촌과 관련된 논란을 정리한 문서이다. 유인촌은 정계 입문 전까지는 대외적인 논란을 일으킨 바 없기에 이 문서에 기록된 논란들은 정계 입문 후의 일들만 서술되어 있다.


2. XX 찍지마 사건[편집]


파일:external/ph.mediatoday.co.kr/100470_92983_3221.jpg


이명박 정부 초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재직하던 2008년 10월 24일에 있었던 국정감사 도중 기자들을 향해 "사진 찍지 마! XX, 찍지 마!"라는 반말+삿대질+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했고, 보좌진들이 뜯어 말리며 회의장을 나가면서도 "XX, 성질이 뻗쳐가지고 정말. XX..."라고 또 재차 욕설과 반말, 삿대질을 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1]

일단 당시 상황 전개를 보면 먼저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당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책임 추궁 과정에서[2] '사기극', '삼켜먹어버렸다', '이명박의 졸개' 등의 표현들을 사용하며 유인촌을 자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인촌 장관은 정작 그 발언을 한 이종걸 의원한테 되받아친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느닷없이 반말과 욕설, 삿대질, 주먹질을 해댔기에 큰 논란이 되었다. 즉, 현직 연예인이자 고위 공무원인 공인이, 국민들도 다 보고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제3자의 위치에 있을 뿐인 기자들한테 화풀이로, 그것도 직접적이고 상스러운 욕설까지 같이 써버리는 최악의 대처를 해버린 것으로 알려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단 이종걸의 발언 외에도 차관 신재민이 팔짱을 끼고 답변을 해서 전병헌한테 팔짱 풀라는 지적을 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이 자세가 뭐가 불편하냐고 불평했고[3] 그 외에도 공방들이 오가면서 의원들 간 언성도 높아지는 등 이런저런 논란거리가 많았다.

그렇지만 유인촌의 이 욕설 사건으로 인해 다른 문제들은 다 완벽히 묻혀버렸고, 온라인/오프라인 할 것 없이 "찍지마 XX"만 남아버렸다.

결과적으로 유인촌 장관은 이 일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대차게 욕을 먹었고, 더불어서 유인촌을 데려온 이명박도 싸잡혀서 세트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유머와 합성물의 소재가 되면서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4]

이 사태를 두고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야당들은 '유인촌과 신재민은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 '유인촌의 일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이는 국회와 국민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등으로 유인촌과 신재민을 비판했고, 반면 여당한나라당은 '먼저 이종걸이 사과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행위이다', '이번 사태는 이종걸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등으로 이종걸을 비판했다. 물론 사람들은 이종걸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유인촌의 쌍욕만 지금도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태에서 여론은 거의 야당의 편이었다. 또한 이종걸은 3선 중진이 된 것과는 별개로 저때는 지금과 달리 전국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이틀 후인 10월 26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적절하지 않은 언행이었다며 사과는 했지만 예의없이 뒷짐을 지며 한 데다가 사과의 기초조차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도리어 욕만 더 먹었다. 이 과정에서 흥분된 상태에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 당황했다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는데 이해해 달라면서 또한 당장 사퇴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해당 논란은 1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비판을 받는 상황이라 본인의 연기 활동에 큰 타격을 받게 된 사건이었다. TV보다는 연극계에서 배우 겸 극단 운영에 전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로 영상과 사진 속에서 유인촌을 말리며 화장실 가자고 하는 사람 신재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인데, 2010년[5]청와대의 지명을 받아 유인촌의 뒤를 이어 장관이 될 뻔 했으나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등이 밝혀져서 후보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한 이후에는 이국철 SLS그룹에게 뇌물을 받은 사실까지 들통나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까지 했다.

2023년 경 유인촌이 윤석열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되었는데,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은 욕설을 한 적이 없고, 소위 말하는 "찍지마 씨발"은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15년 전 '욕설 논란' 재소환…사과했던 유인촌 "욕한 적은 없다" / JTBC 뉴스룸

관련된 해명은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의 질의시간에 원본 오디오를 들어볼 수 있다.# 해당 영상의 1:00부터 당시 현장의 오디오가 음성 모자이크 처리 없이 담긴 것을 들어볼 수 있다.

3. iPad 사용 사건[편집]


본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거나 크게 잘못한 건 아니지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전파인증 규제 완화에 기여했다.규제 완화의 계기는 바로 유인촌이 쓰던 iPad다.

국내에 아이패드가 출시되기 이전인 2010년 4월 26일, 방송에 직접 나와 전자책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아이패드를 쓰는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외산단말기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파인증을 반드시 받아야 했으며 아이패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파인증이란 게 단순히 30만 원이 넘는 비용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내부 회로도까지 직접 제출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게 일반인 선에서 가능할리가 없다. 물론 전자책 유통회사에서 연구목적으로 반입한 것 중 화면이 큰 아이패드를 임시로 사용한 것이며, 유인촌이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30만 원에 내부 회로도 제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으니 그 자체를 큰 문제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아이패드가 국내에 비정식으로 수입된 물량 있던 상태에서 뒤늦게 전파인증 규제를 들먹여 추가 수입이 차단된 상태였다 보니, 국민들은 비용과 절차 문제로 못 쓰는 걸 정치인인 장관은 태연히 방송에 나와 쓰는 모습이 박탈감을 불러와 국민 여론에 굉장히 안 좋게 작용했다.

이 여파로 결국 중앙전파관리소에 박용만, 구준엽[6]과 함께 아이패드 사용을 이유로 신고 당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

결국 정부는 '1인당 1기기는 전파인증 없이 반입 가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고 현재도 여전히 잘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인촌은 전자제품 애호가들에게는 '전자제품 계의 문익점'이라는 칭호 및 #및 유익점이라는 별명을 받았다.#


4. '칸 각본상 예의상 준 것' 발언 논란[편집]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영화)영화진흥위원회의 거장 영화 감독의 제작을 지원하는 2회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에 심사대상으로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조희문 심사위원이 '시'의 각본이 '시나리오가 각본의 포맷이 아니라 소설 같은 형식이라서'라는 이유를 대며 "0점"을 줘서 탈락했다. 문학적이라서가 아니라 형식 탓에 무려 0점을 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0점 받은 각본으로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러자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유인촌은 기자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각본상은 작품상이나 연기상에 비해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라며 "(칸 영화제가) 이창동 감독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준 것 같다"라는 망언을 남겼다.#1, #2 당시 문화관광부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명 했지만#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동석한 기자 7명 중 4명이 들었다며 확인사살했다. #1, #2




5. '아빠 찬스' 17억 아파트 논란[편집]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인터넷 등기소 등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종합하면, 유인촌의 장남(연극배우)은 31살이던 2015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한 아파트(전용면적 84㎡)를 7억5500만원에, 차남 유현식(회사원)도 31살이던 2019년 같은 아파트(전용면적 113㎡)를 17억6000만원에 대출 없이 매입했다. 장남은 매매 후 아파트를 임대놨고, 차남은 실거주 중이다.

유인촌은 국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후보자로부터 금원을 증여받아 취득했다”고 밝혔다. 다만 증여세 납부 내역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대해선 “(두 아들의) 개인정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5000만원까지 비과세된다. 유인촌의 자녀들이 5000만원 이상의 현금을 증여받아 아파트를 매입했다면, 공제 한도를 제외한 금액에 대해선 증여세를 납부해야 한다. 한겨레에 따르면 유인촌의 자녀의 재산이 공개된 가장 최신 자료인 2011년 관보에서 당시 유인촌 장남과 차남의 재산은 각각 1억여원, 4천여만원 정도였다.

임종성 의원은 “증여 사실을 인정하면서 납세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증여 과정의 불투명성을 자인하는 꼴”이라며 “인사청문회를 통해 증여 내역과 납세 과정을 꼼꼼히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6. 이명박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부인 논란[편집]



"백서에 이름 104번"…유인촌 "왜 구속 안 시켰나?" / SBS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내며 산하 공공기관장 사퇴를 압박하는 등 '문화계 좌파 인사 찍어내기'를 주도한 의혹을 받는 유인촌 윤석열 정부 문체부 장관 후보자가 이명박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을 전면 부인하였는데, 2008년 좌파 예술인 차별 내용을 담은 문건이 작성된 사실이 공개됐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계 시민단체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8월 작성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는 좌파·우파 예술인의 행태를 분석하고 좌파 예술인의 정부 지원금을 차단, 이를 우파 예술인에게 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으며, 2010년 11월,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좌파 문화예술단체 제어 및 관리방안' 문건에는 "골수 좌파 예술인, 연예인들은 정치적 목적이 뚜렷하고 전략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포용이 사실상 불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대응"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좌파 순화 퇴출방안' 문건에는 "사이버 폭로전을 전개해 부도덕 행적을 인터넷 상에 폭로, 불신, 지탄 여론 조성으로 퇴출 유도", 단순동조자 우파로 흡수를 위해 "회원들을 활용, 집단 대응 등 강력 경고로 활동 반경 축소 및 우파로 흡인, 자사 이미지 실추 지적 이메일 발송, 광고모델 교체 압박"하도록 제시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해결 연대모임 '블랙리스트 이후' 정윤희 디렉터는 “연예인 이미지 실추 유도 심리전이나 광고모델 교체 등 그간 정부의 진상조사를 통해 문건에 따른 예술인 블랙리스트 존재가 명백히 증명됐다"고 지적했으며, 블랙리스트 소송을 대리했던 강신하 변호사도 "당시 유 후보자의 문체부는 문건에 따라 기관장 교체하고 직원들 좌천시키는 일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유인촌 문체부장관 후보자는 이동관 방통위 위원장으로부터 개인 교습 받은 것 같다"며 "서면답변서를 보니 그 뻔뻔함이 극에 달한다. 이명박 정부에는 블랙리스트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7. 그 외[편집]


  • 위의 찍지마 사건 및 아이패드 사건 외에도 문체부장관, 문화특보 재직 동안 막말 내지는 반말, 망언 말고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더 있다. 2009년 한예종 협동과정 서사창작과의 폐지에 반대하는 피켓을 든 학부모에게 세뇌라는 막말을 했으며, 이에 앞서 1인 시위하던 학생에게는 자전거 타고 지나가면서 "얼른 가 공부해라. 엉? 뭐하러 고생하고 있니?" 등의 비아냥 거리는 발언을 했다. 게다가 국립오페라단 폐지에 반대하는 단원들의 시위 현장에서는 단원들에게 "나랑 얘기하기 싫어?"라고 반말을 했다. 그 외에도 2008년 7월 "촛불 때문에 관광객 줄었다" 발언과 2009년 11월 17일 '대동아전쟁' 발언,[7] 2011년 7월 22일 을미사변 '경복궁 담장'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 2010년 문체관방위 때는 같은 배우 출신인 최종원 민주당 의원과 설전을 벌여 논란이 일었다.

  • 일명 ‘회피연아’라고 불리는 사건에서는 2010년, 김연아의 귀국장에서 당시 문체부 장관이었던 유인촌이 축하 꽃다발을 걸어주며 어깨에 손을 대고 포옹하려다 김연아가 곧바로 뒤로 물러서며 거부하는 듯한 제스처를 찍은 동영상을 네티즌들이 캡쳐해 올려 비난한 바가 있다. 아시아 및 한국에는 유교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남녀간의 포옹이 연인이나 가족이 아닌 이상 일반화되어있지 않은데다가 포옹이 친구나 잘 아는 사이에 친근한 인사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서양권에서도 여성이 특별히 먼저 허용하지 않는 이상은 남녀 사이에서는 처음 보는 입장에서 인사로 잘 해봐야 악수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자 유인촌을 비난한 네티즌들을 문체부가 “유 장관이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하려 했으나 마치 성추행을 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동영상을 편집해 올려 명예훼손 혐의가 있다”고 하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가 논란이 되자 유인촌 측이 이메일로 사과를 받고 취하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유인촌이 브라이언 오서 코치를 포옹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김연아의 불쾌한 듯 찡그린 표정을 보면 이유야 어찌 되었건 유인촌의 포옹을 거부하는 제스처가 맞았다. #, #

[1] 일부 방송사에서는 '삐~' 처리를 하거나 아예 무음 처리해서 방송했다. 다만 그냥 그대로 내보낸 방송사도 있었다.[2] 시기상으로 리먼 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때였다.[3] 재차 상기하자면 그 자리는 국정감사 자리로, 국회에 출석하는 국무위원과 정부위원은 피감기관의 신분으로 출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질의에 바른 자세로 정중히 답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어떤 정부의 차관도 대통령 앞에서 팔짱을 끼고 대화를 하는 예의없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신재민도 무례하기는 마찬가지였다.[4] 노무현 정부 때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했던 김명곤은 별다른 구설수 없이 임기를 마치고 연예계로 복귀해서 지금도 드라마와 영화 출연이 활발한데 비해 유인촌은 이후 연극계로는 복귀했지만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는 전혀 복귀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후술할 다른 사건들도 지적되지만 아무래도 이 찍지마 사건을 통하여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세다.[5] 2010년은 비록 여당인 한나라당이 다수석을 점하던 시절이었으나 박원순이 이듬해 2011년에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는 등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점차 선거로 입증되던 시기였다.[6] 트위터 등을 통해 아이패드 사용 및 분해기를 올렸다.[7] 다만 1950년대생의 경우 용어에 대한 비판 없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에 교육 받았기에 미화 의도 없이 이 명칭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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