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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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내문(乃聞) / 우고(于皐)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901년 1월 6일[2]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3] 222번지)
사망
1987년 3월 20일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01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222번지)에서 아버지 채병대(蔡炳大, 1880. 7. 19 ~ 1960. 6. 27)와 어머니 벽진 이씨 이원대(李元大, ? ~ ?. 5. 11)[4]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5촌 당숙 채병용(蔡炳容, 1879. 2. 26 ~ 1920. 3. 7)에 입양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채학기는 22촌 지간의 족조(族祖) 채갑원과 자주 접촉하며 국권회복에 대해 논하고 그 의지를 다지곤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희각과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에 앞서 세 사람들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에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교육사업에 참여하여 1953년 7월 재단법인 공산학원이 설립되자 초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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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감공파(少監公派)-영모재공파(永慕齋公派) 29세 기(基) 항렬.[2] 인천채씨대동보 4권 47쪽에는 2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이승재(李承載)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