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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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崔蘭洙
1909~?[1]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일본 제국과 대한민국의 경찰, 고문기술자.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다. 직급이 낮아서 각종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는 제외되나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다. 광복 후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하고 제주 4.3 사건 당시 학살을 자행했으며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을 계획했다.


2. 생애[편집]


1909년 충청북도 영동 출생. 1939년 전북 고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다.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발발 당시 본정경찰서 수사주임으로 재직했다. 정판사 사건 당시 노동자들과 독립운동가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등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공적(고문기술)을 인정받아 제1관구경찰청 수사주임으로 영전하고 8월에는 제3관구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전임했으며 1947년 동대문경찰서 수사주임을 거쳐 1948년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이 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각 경찰관구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약 1500명을 파견할 때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대장의 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를 사찰했다. 그리고는 사태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서는 강력 무장부대의 파견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1949년 11월 제주도에 내려가 무차별 강경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그가 지휘한 특별수사대는 고문과 학살로 악명높았다.출처

한편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장이 된 최난수는 1948년 10월 하순 전임자 노덕술의 지휘 하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중부경찰서장 박경림과 함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1월 초순 노덕술로부터 소개받은 전문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하여,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던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및 핵심 관계자 곽상훈, 권승렬, 김병로, 김웅진, 김장렬, 노일환, 오택환 등을 비롯하여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지청천 등 15명의 국회의원을 납치하여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인 1949년 1월에도 백민태에게 자금과 무기를 주면서 계획 실행을 재촉했다. 그러나 백민태가 자수함에 따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출처

그리하여 최난수는 1월 25일 노덕술, 홍택희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박경림은 2월 1일 구금되었다. 그러나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6월 20일 개정된 1심 결심 공판에서 재판부는 노덕술, 박경림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최난수, 홍택희에게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7월 26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2심 결심 공판에서는 노덕술, 박경림은 무죄, 최난수와 홍택희는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출처

이후 최난수는 경찰로 복귀하여 1952년 남원경찰서장, 1954년 전남경찰서 수사과장, 1956년 춘천경찰서장, 1958년 김제경찰서장, 1961년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중앙분실장[2]을 지낸 후 퇴직했다. 출처

이후에는 1963년에 신정당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 외에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았다.

참고로 그의 아들인 최극은 1976년에 신민당 충북제3지구당 위원장으로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를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한 바가 있으며, 그의 조카인 최환검사로 일하며 부정한 고문경찰이던 큰아버지와는 달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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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한 몰년은 미상이나, 이 기사에 따르면 197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 정확히는 5.16 군사정변 전인 1961년 2월에 임명된 거라고 한다. 1961년 2월 9일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