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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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병심.jpg
성명
최병심(崔秉心)
자 / 호
경존(敬存) / 금재(欽齋)[1]
본관
전주 최씨
생몰
1874년 10월 5일 ~ 1957년 10월 3일
출생지
전라도 전주부 부남면 향교동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2]
사망지
전라북도 전주군 옥류동 염수당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병심은 1874년 10월 5일 전라도 전주부 부남면 향교동(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서 아버지 최우홍(崔宇洪)과 어머니 이천 서씨 서학문(徐鶴聞)의 딸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살 때 청하(靑下) 이병우(李炳宇)에게 사서 및 주역, 춘추, 상서를 배웠다. 23세 때 송병선을 만나 그로부터 <근사속록(近思續錄)> 1부를 받고 학업의 정진을 독려받았으며, 24세 때 태안으로 가서 전우를 스승으로 모셨다. 전우는 최병심이 "우리 유학을 맡길 만하다"고 평하고 상서의 ‘欽明文思'에서 '欽'자를 따서 호를 지어 주었다.

<금재행록>에 따르면, 1901년 최병심이 경명행수(經明行修)[3]하다는 소문을 들은 전라도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이 찾아와 종일 오래 사귄 벗처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는 전주 옥류동에 서당을 열고 이름을 옥류정사(玉流精舍)로 짓고 이 곳에서 평생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31살 때인 1904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거절했고,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배포했다. 37세 때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하루종일 통곡하고 두문불출했으며, 이때부터 옥류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1912년 이석용 의병장이 조직한 임자동밀동맹단(壬子冬密盟團)에 가담하여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활동을 지원했으나, 이석용이 끝내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무위에 그쳤다.

1917년 도지사 이진호가 토지를 팔라고 요구하자,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진호는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순경 30여 명과 소방서원 90명 등을 최병심으로 집으로 보내 집을 철거하고 불을 질렀는데, 가족은 이에 항거하다가 유혈이 낭자하도록 맞았다. 특히 최병심의 부인 통천 김씨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1919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 상황에 분노하여 "불에 타 죽겠다"고 버텼지만 끝내 끌려나왔고, 토지는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

1918년 만동묘를 철폐하려는 일제의 조치에 항거하여 제향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다가 괴산경찰서에서 7일 동안 구속되었고, 1919년 2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 무복설(無服說)[4]을 주장하는 조긍섭을 반박하는 <고팔역사문(告八域士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돌리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46세 때 최병선의 문인인 조장섭(趙章燮)이 쓴 <성사심제변(性師心弟辨)>의 내용을 비판하는 <성사심남재변이(性師心弟再辨二)>를 지었으며, 51세 때 스승 전우의 문집 간행 문제로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과 대립했다. 52세 때 일제가 한벽당을 헐고 철로를 깔려고 하자 이에 항거하여 한벽당을 사수했다.

64세 때인 1938년, 최병심은 조희제가 기술한 염재야록(念齋野錄)의 서문을 써주었다. 다음은 그가 기술한 서문의 일부이다.

우리나라가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기는 하나 단군의 화육으로 시작하여 기자의 주범(疇範), 그리고 신라, 고구려의 의관이 모두 중국 제왕의 그것과 서로 백중의 세를 이루어왔고, 조선조에 와서는 예악과 문물이 중화제도 못지않게 찬런했으며, 순수한 왕도정치를 하여 이른바 “주(周)의 예를 노(魯)가 지키고 있고 정통을 한(漢)이 이어받았다”고 한 그 말과 같이 되고 있었다. 불행히도 지난날 적신이 임금을 속이고 적을 방안에까지 끌어들여 온 나라를 원수에게 넘기고, 그리하여 우리의 오백년 종묘 사직을 복망시키고 우리 이천만 동포를 노예로 만들어 사천년 역사의 신성한 나라, 그리고 그렇게 깨끗했던 삼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가 춤추는 비린내 나는 장소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조우(趙友) 희제(熙濟)를 비롯한 제군이 그것을 개탄한 나머지 고종 32년(1895) 을미 이후의 국가 변란 또는 그를 전후하여 있었던 여러분의 충의(忠義)와 사행(事行) 등을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기고 이름하여 야록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로 말하면 화변이 혹독하면 할수록 여러분들의 기개와 절의도 더욱 모질고 매서워 그야말로 우주와 높이를 겨루고 일월과 빛을 다툴만한 일들로서 거기에서 그들의 국수주의적 정신을 읽을 수 있고, 따라서 열성조(列聖朝)의 배양을 받은 소치인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는 일이었다.(중략)

아! 사람이면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나라도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는 법이지만, 중화라는 것까지, 왕도라는 것까지 모두 송두리채 없어져버린다면 하늘, 땅 같은 전례와 가을빛과도 같은 대의가 씻은듯이 없어져 관상(冠裳)이 양놈(鶖犈)으로 바뀌고 충량(忠良)이 효경(梟獍)으로 변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그리하여 인류가 모두 없어지고야 말 것이니 이 어찌 천하에 망극한 큰 재변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 없을 수 없는 것이 이 기록이며, 따라서 조우(趙友) 등 제군을 일러 비록 성현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임실경찰서에 5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단식으로 풀려났다. 1942년 창씨개명을 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8.15 광복으로부터 3년 후인 75세 때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57년 10월 3일 전주 옥류동 염수당에서 병사했다. 향년 8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병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최병심은 스스로 '흠(欽)'자의 옛날 음인 '금'으로 불렀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호를 부를 때 '흠재'가 아닌 '금재'라 불렀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그의 호를 '금재'로 기재한다.[2] 전주한옥마을 내에 있으며, 출생지인 교동 7번지에는 현재 전주한벽문화관이 위치하고 있다.[3] 경학에 통달하고 행실이 올바르다[4] 간단하게 말하면 망국의 책임이 있는 왕은 왕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로 상복을 입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