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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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중국에서 귀국한 연안계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소련 외교문서를 보면 해방 이후 북한에 파견된 소련인 고문 중 한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최 콘스탄틴으로, 1906년 연해주에서 출생하였다가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당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의 극성 콜호스에서 일하다가 1945년 8월, 조선중앙은행장 김찬, 조선중앙방송위원장 남봉식, 25여단장 오기찬, 군단정치부장 김학천, 장 보리스 등과 함께 소집되어 북한에 파견되었다. 북한 배치 이후 소군정 기관지인 조선신문사에서 일했다. 1952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창옥의 뒤를 이어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수상 서기장에 임명되면서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창만에게 선전선동부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7월, 김일성의 동유럽과 소련 순방에 수상 보좌관으로 동행하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점에서 내각 사무국장에도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5월 18일, 김일성와 소련 대사 푸자노프에게 최철환을 크게 칭찬하면서 "나의 오른팔이다. 침착하고, 능력 있으며, 사업에 충실한 자이다."라고 불렀다. 하지만 최철환은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혹한 숙청에 학을 떼고 친구 남봉식이 출국하기 직전 그를 불러 앞으로 소련에서 온 사람들을 더 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자신은 그물에 든 고기처럼 되어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에 숙청당했단 소문이 있었으나,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보아서 이때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까지만 해도 김일성과 소련 외교관의 대화에 배석하여 김일성을 위한 러시아어 통역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회고를 보면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체포된 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일부 가족들은 소련에 남아 있어서 1990년, 남봉식의 팔순 생일 때 최철환의 아들 최 세냐가 찾아왔기에 아버지 소식을 아냐고 물었더니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으며 북한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3. 참고문헌[편집]


  • 북한관계사료집 75.
  • 북한관계사료집 76.
  • 北韓關係史料集 79.
  • 北韓關係史料集 80.
  • 김국후,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서울: 한울아카데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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