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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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가 암살된 장소인 통로(위)와 궁전

1. 개요
2. 사료
3. 배경
4. 암살
5. 암살의 진상
6. 이후 상황과 로마 제국
6.1.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
6.2. 클라우디우스의 제위 등극과 반격
6.3. 클라우디우스 1세 이후의 로마 제정



1. 개요[편집]


서기 41년 1월 24일, 별명인 '칼리굴라'로 오늘날 잘 알려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인 가이우스가 수도 로마의 팔라티노 황궁과 극장이 이어진 비밀 통로에서, 원로원 내부 인사들과 공모한 카시우스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 20명 남짓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장교 및 병사들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과거에는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과 칼리굴라의 폭정에 대한 정의감으로 벌어진 사건이라는 수에토니우스세네카 등의 기록을 그대로 적어 소개한 디오 카시우스의 고대 기록이 받아들여진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현대 이후 다양한 유적, 기록, 비문 등의 해석 등을 통해 동시대 로마인들이었던 요세푸스나 세네카의 기록을 옮겨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분석도 서술한 디오 카시우스의 평가처럼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이후 시작된 프린키파투스(원수정)에 대한 원로원의 마지막 공화정 복귀 시도와 그에 따른 급박한 국가 원수 시해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2. 사료[편집]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3년 313일에 걸친 짦은 치세에 관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얼마 되지 않으며, 그나마도 칼리굴라에 적대적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의 기록 혹은 수에토니우스와 같은 심정적인 공화주의자들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일각에선 플라비우스 왕조의 제3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관료로 활동했으며, 그의 치세를 전반적으로 다뤘던 타키투스의 《역사》에 이 암살 사건이 상세히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나, 그 기록은 전부 유실되었고, 간접적으로 전한 기록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의 치세는 티베리우스의 시대와 판박이었다."

는 문구와 그를 연상케 하는 기록 정도이다.

따라서 칼리굴라 암살 사건에 대한 주요 문헌 기록으로는 유대계 로마인인 요세푸스의 기록,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De vita Caesarum), 소실된 세네카의 기록 일부와 수에토니우스와 세네카의 기록을 참고한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를 들 수 있다. 이중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칼리굴라의 막장 이야기를 서술한 수에토니우스는 서기 2세기 경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때 살았던 사람으로, 그의 조부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를 극도로 혐오하면서, 네로의 모든 것을 깎아 내린 대표적인 반(反) 카이사르파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가 관직을 역임하면서 정부가 보관하는 공문서들을 참고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가 적은 칼리굴라의 기록은 홍등가의 소문, 칼리굴라 정적들의 주장, 역사가 본인의 창작이 교차검증을 통해 많은 것이 밝혀져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에 대한 부분도 비슷한데, 이 사건을 가장 현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 이는 동시대의 로마인이자 유대인이었던 요세푸스와 서기 2세기 말 ~3세기 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였다.


3. 배경[편집]


고대 기록과 현대의 연구 실적들에 따르면, '칼리굴라'로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는 서기 37년 3월 16일 공식적으로 황제에 즉위한 후, 불과 8개월여 만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터져나오는 끊임없는 암살 음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티베리우스나 도미티아누스처럼 정적들에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통치술을 구사한 것도 있었지만, 칼리굴라의 직계인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공화정 위에 프린키파투스로 알려진 원수정을 연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칼리굴라의 혈연상, 법률상 직계 증조부였던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1월, 사실상의 제정을 개시한 직후부터,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 관료들에 의한 수없이 많은 암살 음모에 시달렸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사탕발림을 통해 야금야금 "조상들의 관습과 전통"으로 불린 로마 헌법을 편법적으로 악용하여 본인과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세습적인 황조로 구축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은 아우구스투스 및 티베리우스의 계속된 견제와 강력한 대처로 모두 무산되었다.[1]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그들을 모조리 반역죄, 간통죄, 비리 혐의, 명령 불복종 등으로 기소해 줄줄이 박살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가문을 몰락귀족으로 전락시켰다. 허나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는 여전히 암살 위험에서 안전하지 못했고, 이는 티베리우스 시대를 거치면서 한층 교묘해지고 위험해진 정국 속에서 세야누스로 대표되는 악명 높은 근위대장까지 가세해 황제가 언제라도 암살될 위험을 노출시켰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에 별궁을 마련하고 서기 26년부터 서거할 때까지 네아폴리스(나폴리)와 카프레이아 섬을 오가며 로마를 원격 통치했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직계 계서조직으로 활용했다. 그러면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 원로원의 로마 복귀 요구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통해 정중하게 일갈했다.

"저는 국가를 위해 몸을 (암살)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로원에 등원할 때는 언제나 친위대장인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소수의 프라이토리아니 부관 및 백인대장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해주길 요청합니다."

-

- 타키투스, 《연대기》


이에 당시 원로원과 두 집정관은 황제의 요청에 따라 황제를 경호하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 인력의 위계 및 인원수를 따로 규정하지 않는 포괄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누구보다 믿었던 세야누스에게 진짜 암살될 뻔하고 혈육들이 비극속에 희생된 경험을 한 티베리우스는 여전히 불안한 로마로 돌아갈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살아있는 동안 수도의 성벽 근처에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고, 회의장 근처에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고리대 사건'이 터지면서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위기 의식을 느끼고 거취의 불안함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서기 36년 말,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두 후계자들이었던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보호하고, 로마 근교에서 정치와 담을 쌓은채 원로원과 세간의 눈에서 벗어나 있었던, 자신의 조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외손자였던 클라우디우스를 위해 자신의 충직한 근위대장이었던 마크로를 앞에 내세워,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목숨을 노린 남은 정적들을 모조리 반역재판에 넘기고, 범죄혐의로 기소하여 처리했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오래 걸릴 작업이었고, 서기 37년 티베리우스는 미세눔에서 두 후계자와 측근들 및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로마 원로원은 서기 26년 티베리우스가 스스로 카프레이아 섬으로 떠난 이후, 10년여 동안 황제 없이 통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젊은 칼리굴라가 로마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하길 원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가 계속 로마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된 이후, 원로원의 숙원을 풀어주고자 티베리우스 시대에 벌어진 반역 재판 기록을 재검토해주었다. 이 판결들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등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황실를 따른 친 황제파 원로원 의원과 비 황제파 원로원 의원들의 신원을 복구한 조치로 진행되었는데,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이전 시대의 재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새로운 일련의 조사 및 고발자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을 명령하자 갑작스럽게 칼리굴라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저항했다. 이는 칼리굴라와 원로원 사이의 끝없는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을 하고 새로운 일련의 조사와 재판을 진행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칼리굴라는 원로원의 숙원을 이뤄주겠다고 밀어붙였다. 그러자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와 비슷하게 행동한다면서 그를 대놓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이 힘이 없음을 알고 칼리굴라가 원로원과 파워싸움을 노골적으로 벌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는 카프레이아 섬에서 제왕 교육을 티베리우스에게 배우며 원로원을 경계할 것을 익힌 칼리굴라가 종조부의 조언에 따라 힘 대 힘으로 맞붙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때부터 칼리굴라가 하는 것은 모두 딴죽을 걸었고, 칼리굴라는 이를 주동한 두 집정관과 여러 인사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재판에 넘겨 모조리 처벌하는 것을 시작으로 강하게 맞대응했다.

결국 칼리굴라는 재위 1년여 만에 본색을 드러낸 원로원과 힘싸움을 벌였고, 과거의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과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은 말빨 좋고 배짱 좋은 사람들을 시작으로, 복점관 외엔 제대로 된 정규 공직을 맡지 못한 젊은 칼리굴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시작은 웅변가 카르니나스 세쿤두스였다. 그는 수사학을 활용해 갓 즉위한 칼리굴라와 그의 조상인 아우구스투스, 종조부 티베리우스를 폭군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와 친 황제파 원로원 파벌은 그를 즉시 추방했다.

다음은 칼리굴라가 서기 38년 원로원에게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벌어진 재판을 재검토 및 재조사하겠다고 했을 때 그대로 들이박은 두 현직 집정관과 조카뻘 친척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젊은 황제를 암살하려고 첫 번째 음모를 꾸몄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는 이들을 모두 반역죄로 넘겨 처벌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자신이 믿고 임명한 현직 법무관이었던 율리우스 그라에키누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가 꾸민 범죄를 눈감아주면서, 처벌을 요구한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반역죄 근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에게 반항한 것이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세간의 눈을 의식해야 함에도 그라에키누스를 즉시 고발해, 그를 반역죄와 명령불복종으로 처형했다.

이런 까닭에 그라에키누스의 손녀사위였던 역사가 타키투스는 칼리굴라가 짦은 밀월 이후부터는 선제 티베리우스 이상으로 원로원으로부터의 암살 위협을 실제로 시달렸다고 적고 있다. 타키투스는 수사체 문장으로 애매모호하면서도 확실한 문구로 <티베리우스>편과 <클라우디우스> 편에서 사라진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편의 내용의 직•간접적인 서술의 분위기와 직•간접적인 서술을 보여주면서 젊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수없이 많은 암살음모에 시달렸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서기 38년이 지날 즈음, 또다시 황제 암살 미수 음모가 터졌다. 이번엔 자신이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특권을 준 방계 황족이자 둘째 여동생과 최근 사별한 오랜 친구였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주도하의 황제 암살 모의였다. 여기에는 두 여동생들인 소 아그리피나율리아 리빌라까지 가세했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는 더 과격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레피두스와 두 여동생이 증거를 부인하기보다는 인정까지 하자, 황제는 큰 충격에 빠졌고, 원로원 안에선 매일 같이 황제에게 힘 대 힘으로 맞붙었으며 거리엔 뜬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로마 귀족들과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 황족들을 모두 죽이고 싶어했으며, 현직 프린켑스를 없애려고 하거나 회의 등에서 자신들의 불만과 분노를 직•간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음을 의미했다.

결국 서기 39년 초부터 양측의 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원로원과 귀족들은 젊은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직계 일가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적대감을 표출했다. 뛰어난 웅변가였던 도미티우스 아페르가 황제로부터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주도하의 축제를 일부러 불성실하게 하여 논란을 야기시켰고, 원로원 입성때부터 칼리굴라에게 자신의 웅변술과 재능을 뽐내며 개기고 황제를 은근히 깔본 세네카와 같은 젊은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황제 암살을 모의했다. 이에 칼리굴라의 부모인 게르마니쿠스대 아그리피나 부부의 해방노예였던 칼리스투스가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고발했고, 친 황제파 의원들은 세네카와 그 친구들을 모조리 반역죄로 고발해 황제에게 그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자신에게 용서를 진심으로 구한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마지막으로 용서했다. 그 대신 그를 집정관 자리에서 해임했다. 허나 칼리굴라는 원로원 입성때부터 웅변 능력을 뽐내면서, 수사학적인 웅변술이 부족해보이는 황제에게 웅변술로 맞대응을 하고 친구들과 공모한 세네카는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는 원로원 재판에 그와 그의 친구 무리를 내세웠다. 황제를 상대로 권모술수를 부린 점과 일개 새내기 의원이 황제 암살을 하고자 판까지 짠 일이었으니 재판은 유죄로 확정이 났다. 이렇게 되자 세네카와 그의 친구들은 칼리굴라와 웅변술로 맞대결을 하자는 패기보다는, 피고 세네카가 스스로 마른 몸을 드러내면서,

"얼마 살지 못할 듯 싶으니 아량을 베풀어 달라"

고 간곡히 호소하고, 친구들이 싹싹 비는 방법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그래서 카이사르 이후의 반역죄에 따라, 사형이 당연한 세네카는 마지막 관용을 베푼 칼리굴라의 결단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는 결국 분통이 터진 나머지 원로원 앞에서 작심 연설을 하면서 울분을 토했다.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와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및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간신 세야누스의 음모로 억울하게 고발당하여 처형된 일을 직접 언급했다. 이때 황제는 원로원이 율리우스 가문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사실상 방치한 세야누스의 공범이라며 맹비난했다고 한다. 과거 칼리굴라는 어머니와 두 형이 비극속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 조절을 잘 해내면서 위기를 넘겼고, 가족들의 장례식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에서는 칼리굴라가 그토록 원망 섞인 지적을 하는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계속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칼리굴라가 갈리아로 떠나던 해 9월, 두 집정관이 모반을 계획한 것이 또 발각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큰 충격을 받고, 이례적으로 두 집정관을 모두 직권 면직시켰다. 이는 오늘날 연구들을 통해 분석되듯이 사실로 보여지는데 집정관 2명을 모두 면직 처리한 이 이례적인 사건은 원로원 전체를 벌집 쑤시듯 혼란의 소란돌이에 빠뜨렸다. 이후 칼리굴라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집정관에 추천해 당선시켜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도미티우스 아페르는 대담하게도 악티움 해전을 기리는 행사를 주최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면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증손자이기도 했던 칼리굴라의 가계를 알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띄우는 척 하면서 비판하고, 안토니우스는 더 크게 비난해 큰 소란을 일으켰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는 도미티우스 아페르가 잘못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자신과 황실에 대한 도전에 상당히 과민반응하는 칼리굴라를 단단히 화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미티우스 아페르는 황제가 손수 추천해 취임한 집정관임에도 불구하고, 눈치껏 행사를 진행하지 못한 죄로 면직 처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39년 9월, 게르마니아 방면 군사령관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가 황제 암살을 직접 계획하여 반란 세력을 모은 것이 들통났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이례적으로 빨리 갈리아를 방문했다. 이때 황제는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자 친족들과 함께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옹)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삼촌과 함께 자신의 증조부인 아우구스투스, 조부인 대 드루수스, 부친인 게르마니쿠스의 업적을 다시 한번 강조해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서 황제는 겨울을 나자마자, 재빨리 라인 강으로 향했다. 이는 게르마니아 방면 군사령관으로서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없앨 세력을 모으던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예기치 못한 황제의 빠른 대응에 가이툴리쿠스는 무력 대응도 못하고 반역죄로 즉시 체포되었다. 이때 황제와 친 황제파 인사들은 게르마니아 방문 직후 가이툴리쿠스를 해임한 뒤, 그에게 증거를 들이밀고 무능함과 반역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가이툴리쿠스는 체념한 후 곧바로 자결했다.

이 사건 외에도 원로원 귀족들은 여러 번에 걸쳐 칼리굴라와 그 일가를 비난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기 40년 말, 요세푸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황제 앞으로 측근의 비리가 보고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기록은 완벽히 남아 있지 않으나, 이 보고 이후 칼리굴라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결론지었다. 황제는 이후 카시우스 카이레아를 불러 업무상의 무능함을 크게 질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뻘 가신으로, 자신을 아들처럼 생각한 카이레아에게 거친 말을 했고, 그에게 남자답지 못함을 강하게 질책해 인격적 모욕감까지 느끼게 했다.


4. 암살[편집]


칼리굴라는 8개월 동안의 원로원과의 짧은 밀회 이후, 계속된 암살 음모에 맞서 스스로를 신으로 자처하면서 본인과 황실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온갖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전제군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시대 사람들이었던 세네카,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의 기록들에 따르면, 정신병자의 행동보다는 의도적으로 보였고 어딘가 어색해보였다고 한다. 이는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도 비슷한데, 그 역시 칼리굴라가 미쳤다기 보다는 의도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원로원 내부에선 황제 암살이 끊임없이 모의되는 상황속에서 결국 서기 40년 겨울, 황제에게 큰 꾸중을 듣고 모욕감까지 느낀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은밀히 부하들과 일부 원로원 인사들을 모아 암살을 모의했다. 그리고 서기 41년 1월 24일 정오. 극장에서 팔라티누스 황궁으로 통하는 지하통로에서 칼리굴라는 비무장 상태로 암살되었다. 당시 상황은 두 가지 버전이 전한다.

가장 유명한 수에토니우스 버전에 따르면 칼리굴라 암살은 다음과 같았다.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사실 가이우스는 극장 안에 있었다. 이때 그는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가이우스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가이우스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

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교가 가이우스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2]

두 번째 이야기는 좀 더 정확한데, 장교인 사비누스가 먼저 부하를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고,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가이우스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가이우스는 웃으며

"유피테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

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인 경호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는 아직 살아있다!"

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

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가이우스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에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인 경호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

를 외치며 암살자 몇 명과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죄없는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오늘날 믿을 수 없고, 거짓과 과장이 가득한 그의 기록답게 잘못된 부분이 많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당장, 작가 본인부터 로마의 길거리와 본인의 고향이었던 푸닉(북아프리카)에서 떠돈 이야기임을 전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주목할 부분은 동시대 사람인 필로의 조카였던 요세푸스 및 수에토니우스의 것을 참조했음에도 다른 이들의 기록도 살펴 적은 디오 카시우스가 전한 칼리굴라 암살 부분이다.

이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가이우스 암살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국가 원수 시해 사건이었다. 따라서 발생부터 결과까지 급박하게 전개되었고, 주동자와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은 이리저리 튀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공통된 이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아이깁투스(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길 것이라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반대파들 사이에서 나오던 무렵에 황제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는 평소처럼 황제의 업무 중 하나인 공공 건축물 보수와 관리 업무를 살펴보고 국가 행사 준비를 확인코자 황숙인 클라우디우스와 멘토인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과 함께 극장에 들렸다고 한다. 이후 칼리굴라는 황궁 내 지하통로에서 암살되었다. 이때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었던 이는 얼마 전 부정부패 혐의가 보고된 황실 관료들로부터 정보를 받은 카이레아 등의 암살범 20명 남짓과 황제의 멘토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였다. 그런데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암살범들에게 어떤 위해도 입지 않았고, 멀쩡히 돌아가서 원로원에 황제가 죽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직위를 물려 받아야 함을 주장했다. 반면 황숙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죽기 살기로 탈출하여 황궁 안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본인을 비롯한 아우구스투스 친족들만이 아는 방으로 몸을 숨겼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과 암살범들은 8시간 가까이 클라우디우스를 추적하다가, 카이사르 가문의 사람들 중 생존자인 황후 카이소니아와 율리아 드루실라 황녀를 죽였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29세(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재위 기간은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였다. 이 일에 관해 서기 2세기 말 ~ 3세기 초반까지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이우스는 3년 9개월 28일 동안 관련된 모든 일을 수행한 후에야,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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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 카시우스



5. 암살의 진상[편집]


당시 칼리굴라 암살에는 직접적인 암살 가담자들인 카시우스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외에도 원로원 의원들 중 영향력이 있는 인사 몇 명[3]과 해방노예 출신으로 칼리굴라를 배신한 것으로 알려진 칼리스투스,[4] 두 명의 근위대장을 움직일 수 있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황제의 동선을 관리하던 황실 관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고대 기록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다. 하지만 용의자 명단 중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는 카이레아와 사비누스가 칼리굴라 암살 정당성을 내세울 때 이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아내의 오빠였던 율리우스 루푸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와 황실을 지지하며 그 복수를 결행한 근위대장이었다. 또 다른 암살범으로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해방노예 출신의 황실 관료 몇 명도 이와 비슷한 실정이라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최근 들어 그 신뢰도가 의심스럽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당시 로마인들[5]은 이 갑작스러운 범행의 배경에 카이레아와 칼리굴라가 빚은 개인적인 트러블에 의한 원한 관계가 있다고 증언한다. 이는 모든 로마인들이 공통되게 명기한 부분으로, 암살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이에 대해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는 카이레아가 경비 당직을 서는 날이면 암구호를 '고자', '자지', '계집애' 등의 온갖 모욕적인 말로 지정해 건네주거나 그가 자신의 반지에 충성 또는 감사의 표시로 키스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일부러 그 손으로 온갖 망측한 (성기를 흉내낸) 모양을 하고, 눈앞에서 덜렁덜렁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고 말한다. 즉,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자기 측근을 자극해 스스로 자살 행위를 한 멍청이였던 셈이다. 자극적인 가십을 좋아하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이외에 디오 카시우스 역시도 가이우스(칼리굴라)가 '고전적, 옛날 스타일'이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로 명예를 중시하며 모범적인 로마 사내였던 카이레아를 두고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모독을 퍼부었으며, 늘상 '계집년'같은 말로 그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교차검증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비슷하게 원한 관계였다고 적은 요세푸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그 결이 살짝 다른 공적인 사건들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칼리굴라가 신으로 자처하면서 황제 권력을 강화해 원로원과 기사계급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선제 티베리우스처럼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냉혹했던 부분이나 업무상 마찰이 결국 측근에 의해 살해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도 기록했다. 우선 두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가 카이레아를 모욕한 이유는 그의 업무성과가 미미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

이었으며,

"가이우스는 카이레아의 업무능력이 부족함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서 크게 질책했다."

고 말한다.

또한 칼리굴라 암살에는 근위대가 연루된 비리 사건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암살범 카이레아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결행했다고 해도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리한 범행이었는데, 학자들은 칼리굴라 암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요세푸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 중 몇 가지 주장을 주목하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적힌,

"가이우스 암살 직전, 황실의 그리스인 해방노예 칼리스투스와 일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의 비리가 고발되었다. 증거가 명확해 이 과정에서 가이우스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는 부분, 동시대 사람 요세푸스의 증언에서 확인된,

"여러 번의 암살미수와 별개로 가이우스에게 측근들의 비리가 접수되어, 젊은 황제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는 부분이다. 이를 분석하면 카이레아의 개인적인 원한 외에도 근위대 일부가 연관된 비리에 관해 칼리굴라가 이 문제로 근위대장인 카이레아를 강하게 질책했고, 이 때문에 그간 쌓인 카이레아의 불만과 두려움이 겹쳐 칼리굴라 암살로 이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이레아는 끝내 그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담담하게 처형된 까닭에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원한으로 결행된 암살이라고 한들 칼리굴라 암살의 대의명분은 이 세 명의 역사가가 평가했듯이 분명하게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멸족과 공화정의 재건

이었다. 따라서 제정 반대파인 수에토니우스는

"모두의 증오를 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모두 카시우스의 손에 죽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과 칼리굴라 시해는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연구에서 여럿 발표되었듯이 카이레아와 루푸스 등 20명 남짓의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병사들은 원로원 내 누군가와 정치적인 연대를 맺고, 그들의 후원 속에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혈육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카이레아와 루푸스 등은 아우구스투스의 남자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옹립시킬 생각을 갖고 움직이지 않았으며, 거꾸로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살해한 직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마지막 남성까지 제거할 생각으로 원로원과 함께 칼리굴라 정부의 제2인자이자 조력자인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제거하고자 그를 추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암살범 20명은 칼리굴라의 동선을 알고 함께 행동한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의 도움 아래 황실 시종 등 극소수만 알고 있는 황제의 개인 일정에 맞추어 기민하게 행동했다. 또한 암살범들은 사건 발생 이전 원로원 인사 몇 명과 함께 가담 조직을 만들면서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황제 호위병들과 게르만 경호대를 떨어뜨리기 위해 열연을 펼친 것도 확인된다.

분명한 사실은 칼리굴라 황제의 암살은 요세푸스나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처럼 매우 비정상적인 돌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 가이우스의 암살은 원로원 의원 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자신이 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고, 정치적인 목적이 뚜렷하지 않는 이상 벌어지기 어려운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카이레아와 사비누스는 20명의 부하들과 함께 칼리굴라를 암살하기 전, 황제를 밀착 경호하는 게르만 경호대 및 로마 근교의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 내의 근위대장 클레멘스 등 9개 대대 병력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또 그들은 칼리굴라 황제와 게르만 경호대, 대다수의 프라이토리아니 병력을 따로 떼어 놓기 위해 연기를 했으며, 체포 후 처형 과정에서 모종의 정치적 연대를 위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또한 당시 집정관은 원로원의 결의 이전에 이미 칼리굴라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소유의 국고에 있는 거액의 돈까지 모두 원로원 회의장 내의 다른 국고로 재빨리 옮기는 조치를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칼리굴라의 황후 카이소니아와 어린 황녀 율리아 드루실라의 실제 살해 시각이 칼리굴라 암살이 끝나고 8시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는 부분, 원로원과 암살범들이 클라우디우스 즉위를 안 직후 보인 행동 등도 연구자들에게 흥미를 끌고 있다.

이런 경위들로 인해 현대 연구자들은 칼리굴라 암살 사건을 과거 고대 기록의 주장처럼 폭군 제거를 위한 가장 완벽하면서도 우발적인 사건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황권 강화로 인한 근위대 내의 반발과 원로원 내 반 카이사르 일가 세력의 연합이 섣불리 칼리굴라를 암살해 벌어진, 갑작스러우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공화주의 복구의 움직임이라고 결론내린다. 이를 증명하듯이, 요세푸스는 원로원의 당시 상황과 프라이토리아니 내에서 카이레아가 젊은 황제로부터 업무적인 무능함으로 강하게 질책받아 앙심을 품었던 것을 증언하고 있다. 더욱이 카이레아를 비롯한 근위대, 관료 내 암살집단이 내세운 클라우디우스는 그들의 생각처럼 결코 허수아비가 아닌 인물이었다.[6] 황제로 옹립된 그는 암살 결행자들에게 연행된 인질이나 다름없었지만, 칼리굴라가 암살된 지 24시간도 안 된 상태에서 원로원 주도하의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완전하게 제압했다.

실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치세때 반역죄로 처형된 아시아 속주 총독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근위대장 클레멘스와 다르게 이 암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여러 정황상 칼리굴라 암살에 직접 개입한 이들을 도운 세력의 흑막인 것이 확정적으로 확인된다. 이 사람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도움으로 갈리아 속주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집정관까지 올랐지만, 칼리굴라 암살 직후부터 제위를 원했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한 격한 감정과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적대감도 상당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즉위 직후 반란들을 후원하고, 반 아우구스투스 일가 파벌을 구축하면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친 황실파와 메살리나가 아시아티쿠스가 가진 막대한 재산과 '루쿨루스의 정원'이 탐이나 기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아시아티쿠스는 그런 혐의들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어서 체포 후 자살해버렸고, 온순한 것으로 이름난 클라우디우스 1세조차 갈리아에서 이 사람의 비열함을 간접적으로 힐난했다.

이 외에도 음모에 가담한 원로원 인사들로 추정되는 인사들은 원로원 소집 이후 열린 회의에서

“율리우스 가문, 그리고 카이사르 가문 남자들[7]

에게 제위가 가서는 안 된다.”

는 이야기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는 회의 소집 후 폐회할 때까지 원로원 대다수로부터 전적인 동의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키투스의 원전 중 이 부분은 완벽히 남아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원들이 이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고, 밀어붙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6. 이후 상황과 로마 제국[편집]



6.1.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편집]


"그날(칼리굴라 암살날) 곧 원로원이 임시로 소집되어 밤늦게까지 사태를 논의했다. 공화제 부활을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 가문 외의 사람 중 프린켑스(황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산회했다. 바깥에선 대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이사르 가문에 고용된 게르마니아인 병사들이 황제(칼리굴라)의 복수를 기도했다. 음모 사건과 무관한 명사들이 살해됐다. 민중도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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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라미우스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대충 태워져 얇은 잔디층 아래에 가매장되었다.[8] 그 사이에 율리우스 루푸스와 백인대장은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황후인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였다. 또한 황녀 율리아 드루실라 역시 벽으로 던져져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이에 대해 당대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칼리굴라의 황후 카이소니아가 오빠 코르불로와 닮은 성격처럼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채, 용감하고 당당한 태도로 살해되었다고 전했다. 암살자들은 이렇게 칼리굴라 일가를 죽인 뒤, 원로원의 의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의 조각상들을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것처럼 끌어내려 모조리 부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 역시 추가적인 움직임을 취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때 원로원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에 그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 제작과 사용을 중단시키면서, 모조리 녹여버리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원로원의 포고령은 하루도 못 되어 폐기되어,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원로원의 이런 일방적인 포고령, 암살을 벌인 이들의 이런 폭력적인 시도가 분노에 찬 게르만족 경호대 소속의 모든 병사들과 로마 민중들의 분노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예견된 결과였다. 칼리굴라의 여러 조치들은 사실 원로원 입장에서만 변덕스럽고 냉혹할 뿐, 일반 로마 민중들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법정에서 원로원의 입김을 최소화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더욱이 민중들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증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칼리굴라에게 증오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도시에선 사람들이 원로원과 암살범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무리를 이뤘다.

그 결과, 로마는 위기에 빠졌다. 먼저 칼리굴라 암살에 관여한 몇몇 암살자들은 게르만족 경호대의 병사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이런 경호대의 행동을 지탄하기보다는 방관하듯이 무시했다. 이어서 그들은 무리를 이룬 다음, 죽은 칼리굴라와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겠다며 포고령을 발표하고, 실제로 실행한 원로원 의원들이 모인 곳을 포위했다. 이후, 그들은 곧 이곳을 우격다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일을 적은 디오 카시우스는 게르만족 경비대의 모든 병사들이 폭동과 싸움에 빠졌고, 그 결과 약간의 유혈 상태가 있었으며 분노한 군중들은 흥분해, 가이우스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원로원에게

"가이우스를 죽인 놈들이 누구냐"

고 따져 묻고, 무리를 지어

"당신들에게 목은 하나 밖에 없고, 그들에게도 목이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아주 살벌한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겁에 질렸고, 자신들이 내린 포고령이 정식이 아니라는 자세를 취하더니, 곧이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권위와 위엄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성난 게르만족 경호대와 민중들은 그럴 생각이 없음을 밝혔고, 약간의 유혈사태가 더 일어났다. 그들은 원로원의 이런 태도에 더 흥분했고, 원로원은 당황해 더 큰 화를 피하고자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항의의 규모는 커졌고 이들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이제 그들은

"죽은 가이우스 동상과 서명에 침을 뱉고, 마음대로 그 조각상을 치운 놈을 데리고 와라"

"가이우스를 죽인 자식들이 누구인지 밝혀라"

"그딴 포고령을 내리자고 한 사람을 당장 앞으로 데리고 와라"

등의 험악한 말을 외치고 계속 따졌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더 크게 놀랐다. 그래서 칼리굴라와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했고, 죽은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었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나오기로 하고,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성난 게르만족 경호대와 군중들을 조용히 시킨 뒤, 눈에 띄는 곳에 올라갔다. 그러자 게르만 병사들과 군중들은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했다. 헌데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닥쳐라! 네 녀석들도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고함을 치더니, 본인이 알아서 할테니 좋은 말로 할 때 해산하라고 경고했다.[9]

그리고 이 발언이 끝난 직후,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집정관 센티우스와 세쿤두스가 즉시 황제 국고에서 원로원 회의장으로 황제 및 황실의 막대한 개인 자산과 그 자금을 옮겼다고 한다. 이때 그들은 이 조치의 취지로 국가 혼란 상황을 이용한 민중들의 약탈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두 집정관은 관리들과 암살자 사비누스, 카이레아 및 그 추종자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하고 있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기록하면서 원로원 내 두 집정관이 암살자들과 같은 편임을 명확히 적었다.

이렇게 국고를 장악한 원로원은 암살을 주도한 사비누스 및 카이레아와 함께 다음 단계를 밞았다. 그들은 카이레아, 사비누스, 루푸스의 명령 아래 서둘러, 방금까지 극장에서 조카인 칼리굴라와 함께 있다가 사라진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비누스와 루푸스는 완전 무장한 상태로 팔라티누스 황궁에 재진입하여, 상술한 대로 부하들을 보내 코르불로의 여동생으로 황후였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 율리아 드루실라 황녀를 모두 죽였다. 이후, 그들은 원로원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남은 씨를 모두 없앴다고 사실상 보고했다.


6.2. 클라우디우스의 제위 등극과 반격[편집]


그러나 암살범들은 여전히 칼리굴라와 함께 있다가 놓쳐 죽이지 못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를 황궁 지하통로와 연결된 극장에서부터 놓쳤다고 하는데, 클라우디우스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암살 대상인 칼리굴라에게 신경쓰면서 클라우디우스와 길이 갈리게 되었고, 함께 끌고 가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혼란 속에서 조카를 찾고자 했다가 그가 암살되었고, 암살범들이 무리를 지어 자신을 쫓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죽기살기로 숨어서 황궁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게르만족 남성들로 구성된 황실 경호대가 클라우디우스의 친구들이었던 로마 귀족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칼리굴라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파악해 잡아 죽이는 것 역시 목격했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는 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의 생전부터 놀이터처럼 돌아다닌 황궁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방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약 8시간이 흐르는 동안, 칼리굴라의 황후인 카이소니아와 황녀인 율리아 드루실라가 살해되었고, 카이레아 등 20명의 암살범들이 아우구스투스 일가 중 클라우디우스의 행방을 쫓고 있다는 보고를 원로원에 올렸다. 그러나 카이레아와 원로원의 지휘하에 수도 경비대에서 황궁 전체를 이 잡듯이 수색해도 클라우디우스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카이레아의 주도 아래 황궁 안과 로마 거리에서 칼리굴라의 오른팔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추적했지만 시간은 지체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흐르자, 원로원과 두 집정관, 그리고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은 카이사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야 자신들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면서도, 칼리굴라의 모든 지위를 어떤 원로원 의원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때 노골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한 원로원 의원은 2명이었다. 첫 번째 후보는 칼리굴라의 모든 동선을 관리하고, 황제를 비밀 통로로 유인해 암살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였다. 그는 암살범들의 보고를 받으면서 본인이 가장 적임자라고 주장했으며, 게르마니쿠스의 오랜 친구로서 황제로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 역시 비슷했다. 그는 칼리굴라 암살을 별개의 계획 아래 꾸몄던 만큼 황녀 세 명과의 특별한 관계 등을 명분으로, 황제 자리를 노골적으로 노렸다.

카이레아가 이끈 암살범 20명은 원로원의 도움 아래 황궁을 넘어 로마 시가지 전체를 뒤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클라우디우스를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중 일부가 무법천지가 된 팔라티누스 황궁에 잠입했다. 구전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이었던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휘하의 무리로 혼란한 틈을 타서, 황궁을 돌며 값나가는 보물을 훔치려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황궁 안에서 가장 후미지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황숙인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했다.

전승과 기록 모두에 따르면, 이때 커튼 뒤에 숨어 있었던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한 사람은 클레멘스 휘하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인 그라투스였다. 그는 황궁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손들만 알고 있는 비밀의 방인 헤르마에움을 우연하게 발견했다. 앤서니 바렛의 추정에 따르면, 헤르마에움은 아마도 평범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사저를 개조한 단독 주택에 있었던 방으로, 훗날 로마 황궁 중 이집트 문양으로 장식된 궁전 동쪽 건물에 있었던 아울라 이시아카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맞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라투스가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하고 그를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정중히 모시고 보호하면서, 칼리굴라 암살 충격 속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고자 한 클레멘스에게 가는 것을 묘사할 때, 아울라 이시아카의 특징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만남에 대해 요세푸스는 클레멘스의 부하들인 프라이토리아니 병사 중 그라투스가 동료들과 달리, 어두운 방 안에서 가장 먼저 클라우디우스를 알아 봤다고 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무척 긴장했는데, 그라투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 더 가까이 접근하기에 앞서, 동료들에게

"여기 계신 분은 게르마니쿠스[10]

[11]이십니다. 자, 우리 모두 그를 모시고 황제로 선택합시다."

라고 한 다음, 클라우디우스에게 예의를 갖췄다고 한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얼떨떨한 나머지, 은퇴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라투스는 계속해서 클라우디우스를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불린 이름처럼

"게르마니쿠스"

라고 불렀고, 그라투스의 동료들도 클라우디우스를 대 드루수스 이래 그 일가에서 사용한 가족 성씨가 된 게르마니쿠스로 부르며 그를 프라이토리아니 병영까지 호위했다.

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전승에서는 클라우디우스가 마치 구걸하는 것처럼 볼썽 사납게 구출된 것으로 묘사된다. 이중 구전의 이야기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고해 적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극장에서 나올 때 가이우스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소동이 두려워서 길가에 웅크리고 있었다."

며 그가 목숨을 구한 이유를 적었다. 어쨌든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한 무리는 칼리굴라를 따른 황제파 근위대장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휘하의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생존을 알자마자,

"당신께서는 황실 출신으로 황제로 적합하십니다."

라고 말한 다음 클라우디우스를 그 자리에서 황제로 떠받들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경호하면서, 황궁을 탈출한 뒤 근위대 병영까지 호위했다.

이렇게 클라우디우스가 생환했는데, 동시대 기록에 가까운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라투스와 동료들은 클라우디우스를 계속

"게르마니쿠스"

로 불렀고,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에 입성한 뒤에도

"게르마니쿠스!"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때 그들이 부른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상징적인 이름으로서 당시 로마군과 프라이토라이니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 모두에 대한 큰 사랑과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 장병 전체는 은인의 마지막 혈육을 배신하고 암살한 카이레아 일당을 증오했고, 곧 마지막 게르마니쿠스로 선포된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가 될 것을 요청했다. 이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도 비슷했다. 그는 간절히 생환을 고대한 황숙 클라우디우스의 귀환에 감복했고, 그라투스와 그 동료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공을 크게 치하했다. 따라서 영국의 비문학자이자 고전학자인 바바라 레빅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라투스가 어쩌면 고전의 전승처럼 황궁에서 뭔가 훔칠 것을 찾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칼리굴라의 암살 소식 직후부터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프라이토리아니에서 중책을 맡은 결사대로 보는 경우가 많다.

클라우디우스는 계속 프라이토라이니 전체로부터

"게르마니쿠스! 게르마니쿠스!"

로 불렸고, 그때 클레멘스와 그 휘하의 프라이토리아니 장병 약 10,000명이 그라투스와 그 동료들을 치하하면서,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이 선포에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을 구출해 끝까지 존경을 표한 그라투스 일행을 공개적으로 칭찬했고, 이를 시작으로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는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할 때의 첫 장면과 똑같이 충성 맹세를 시작했다. 이 선포는 클레멘스를 필두로 한 7명의 대대장, 2개 대대 중 20명의 암살자들을 제외한 9,920명의 부대원들의 절대 충성으로 진행되었다. 즉, 수에토니우스나 세네카 등의 주장과는 달리 클라우디우스는 모양새 빠지는 모습으로 황제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제4대 로마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그라투스의 호위 아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에 등장한 순간부터 이미 정신을 제대로 차린 상태였다. 그러니 그는 맨처음부터 당황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위엄있고 냉철한 모습을 보이며 죽은 칼리굴라의 소식으로 상심에 잠긴 병영 안 부대원들을 일일이 위로하고 그들의 군심과 규칙을 다 잡았다. 이렇게 되자 프라이토리아니는 재차

"게르마니쿠스!"

를 외쳤고, 클레멘스를 시작으로 7명의 대대장, 각 백인대장과 부대원까지 절대 충성과 칼리굴라를 위한 복수를 다짐했다. 심지어 그들은 투표까지 해서,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클라우디우스 1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함을 보여줬고, 원로원에 대항해 내전을 불사할 의지를 보였다. 이는 프라이토리아니로서는 자신감이 있는 행동이었다. 로마군 중 서방 주력인 라인(레누스) 강 및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일대 로마 군단병들 역시 그들 전체의 자존심이었던 대 드루수스 일가에 대한 애정이 상당해, 원로원을 상대로 할 클라우디우스 1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임은 확실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행동이었다.[12] 그러자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그 자리에서 프라이토리아니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병사 1인당 15,000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한 다음, 이를 즉시 실행에 옮겨 일시불로 병사 모두에게 모조리 주었다. 이 자금은 모두 조카인 칼리굴라가 관리한 황제 국고에서 지출되었는데, 병사들에게 일시금으로 줬음에도 불구하고 국고 상황은 넉넉했다고 타키투스는 전한다.

이렇게 클라우디우스 1세는 이날 황제로 선포됨과 동시에, 프라이토리아니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의 모든 동향 및 정보도 보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칼리굴라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 장교였던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필두로 한 7명의 대대장과 2대 대대 중 20명을 제외한 2,000명을 포함한 10,000명에 이르는 근위대의 병사들은, 클라우디우스 1세의 즉위 이전부터 칼리굴라에 대한 암살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티베리우스 황제처럼 활용하면서 힘을 키워준 칼리굴라 황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그라투스의 무리가 비밀리에 황궁에 잠입해 8시간 가까이 클라우디우스 구출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끝까지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 프라이토리아니는 원로원에서 게르만족 경호대와 성난 군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길 간절히 원했음에도, 이를 방치한채 오히려 그들에게 정보까지 주면서 원로원을 답답하게 했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우스 1세가 충성 보너스를 쿨하게 일시불로 즉시 지급하면서, 이는 원로원이 그나마 반전으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까지 무산시켰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특별 상여금 지급으로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군심을 일시에 다 잡았고,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수도 경비대 및 소방대의 군심까지 흔들리게 했다. 그 결과, 원로원은 수도 경비대와 소방대를 우선 장악한 다음 본인들 중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 정쟁 중이었다가, 무력 기반인 두 집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 별 소득 없이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온 카이레아를 필두로 한 암살자 20명은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에 들어온 뒤, 동료들에게 공화정 체제의 수호와 아우구스투스 일가 및 칼리굴라에 대한 지지 철회를 호소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호소도 하기도 전에, 즉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옛 동료들 중 그 누구도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율리우스 루푸스는 매형인 클레멘스를 설득하지도 못한 채, 매형의 명령으로 끌려갔고, 카이레아와 다른 암살범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따라서 이들은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개선장군처럼 자신만만하게 갔다가 암살의 정당성도 연설해보지도 못한 채, 황제 살해 및 가족법에 따른 존속살해 혐의, 즉 대역죄로 불명예스럽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그들은 반역자들처럼 묶여 모조리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회부된 직후, 이들은 새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주재로 열린 군사재판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 또는 자결 명령을 선고받았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근위대에게 황제로서 명령을 내려 국법과 가족법에 따라, 칼리굴라와 그 일가의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의 암살범들을 인도받아 그 즉시 사형 판결을 내리고 자살을 명령했다.[13] 그런데 이 날, 암살범들은 심문 과정에서 배후가 누구인지 끝까지 불지 않고 모두 죽었다. 루푸스와 추가 심문이 예정된 몇 명은 즉결 처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린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연한 말인데 이들의 시체는 처형이든 자살이든 상관없이 전통적인 로마의 반역자 시체 처리 방법대로 처리되었다.

이렇게 암살범 무리를 손쉽게 잡아 제거한 뒤, 클라우디우스 1세는 가매장된 조카 칼리굴라의 유해를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그는 칼리굴라의 최측근으로 게르만족 경호대와 성난 군중 무리들을 사실상 지휘 중이었던 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와 접촉해, 본인을 위해서 그들을 안정시키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칼리굴라의 장례를 위해, 조카들인 칼리굴라의 여동생들 즉 소 아그리피나와 율리아 리빌라 자매의 유배형을 해제하고 귀환을 명령했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유해는 정식으로 수습된 이후, 정식 장례 절차에 따라 황제의 예우로 명복을 빌고 화장되어, 납골항아리에 담긴 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정식으로 매장되었다. 이때 그 자리에는 클라우디우스 1세를 비롯해 칼리굴라의 두 여동생이 함께 했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1월 30일 원로원에 정식 출석해 자신의 즉위를 알림과 동시에 칼리굴라를 추모하면서, 원로원에게 정중하게 경고를 한 이후에 집행되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 1세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그의 즉위 소식을 듣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당도한 황제파 원로원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30일이 될 때까지 원로원에 들어가지 않고, 원로원에게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이런 조심스러운 행동과는 달리, 이때부터 황제로서 로마와 이탈리아의 민중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민심 잡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마음을 다잡음과 동시에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을 상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예와 공훈을 행사 등을 통해 알렸다. 이 방법은 로마와 이탈리아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칼리굴라가 암살된 지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내의 혼란이 잠재워졌고, 모든 분위기는 클라우디우스 1세를 중심으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사람들에 대한 재신임으로 흘러갔다.

반면 원로원은 마치 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계획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상술한 대로 원로원 내 반 황제파들의 회의 소집은 카이레아 측과의 사전 교감을 통해 진행된 일이 아니었던 척 행동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같아도 원로원은 놀라울 정도로 어리버리했고, 디오 카시우스의 표현처럼 저마다 생각이 달라 회의를 하면서도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로 난장판이었는지, 누구는 민주주의(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회귀)를 외쳤고 누구는 내가 황제 후보로 적합하다며 동료들과 서로 논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칼리굴라의 모든 직책을 이어받아야 된다며 지지세력까지 모았다. 그렇지만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린 이 회의는 끝내 비상사태로 인한 혼란 수습이라면서도 실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이전의 원로원 중심 공화정 체제로의 회귀로 흘러감에도 알맹이는 없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과 공모한 카이레아와 그를 따른 20명 남짓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 혈육 2명을 모두 제거할 거라는 판단 아래 짠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며 논의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살골만 넣으며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셈이었다.

이런 덕에 실제로 공화정 복귀의 분위기가 현실화되는 듯 했으나, 클라우디우스가 생존했으며, 근위대 동료들을 같은 주장으로 설득하려던 카이레아가 아예 반역자로 단죄되었고, 황제파인 클레멘스가 중심이 되어 칼리굴라의 측근들을 규합해 반격을 펼칠 준비가 보인다는 보고가 알려지자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원로원 회의 분위기는 최악이 되었다. 암살 직후, 첫 회의 도중 원로원 선배들에게 대놓고

"황제 암살범들을 국법에 따라 이름을 공표하고, 복수부터 의결해라"

고 따진 전년해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필두로 한 인사들은 원로원과 클라우디우스 1세를 번갈아 오갔고, 뼛속까지 프린키파투스(원수정)를 지지한 인사들은 아예 클라우디우스 1세쪽으로 달려가 고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죽은 조카가 추천하고 밀어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성난 게르만족 경호대를 설득해 남은 암살 배후를 처단한 뒤 그들을 위로하라고 명령한 후, 자기에게 조언을 해준 중진들의 뜻에 따라 원로원 스스로 무너질 시간을 벌면서 남은 암살 위험요소까지 제거하는 여유로움마저 보여줬다.

이렇게 되니 곧 원로원은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근위대를 장악하고, 친 황실 세력은 그 아래로 집결해 가이우스 칼리굴라를 위한 복수와 원로원 내 반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으며, 원로원과 소통할 수 있는 황제 암살범과 이에 동조한 근위대 소속 대대장 등은 모조리 반역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황궁 내 엘리트 관료들도 이때부터는 반 칼리굴라, 반 클라우디우스 분위기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되려 그들은 원로원과 손절했다.

칼리굴라가 피살된 그날(서기 41년 1월 24일)이 지난 다음날, 원로원은 일단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무력 폭동을 막을 요량으로 수도 경비대를 장악한 뒤 더 강경하게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근위대에게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라"

는 서한을 보내며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이미 타이밍을 완벽히 놓친 상황인데다가 과거처럼 주도권을 행사할 힘도 없었고, 죽은 칼리굴라의 복수를 외치며 원로원 의원과 여러 명사를 잡아 죽인 황제 친위 세력을 처벌하지도 못했다.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의 강경 발언과 서한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게르만족 경호대 및 잠시 수그러든 군중 무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력 집단이었던 프라이토리아니의 심기를 다시 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원로원의 이런 행동은 자살 행위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 내의 유일한 최정예 부대였던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 중 일부까지 게르만인 경호병들과 함께, 죽은 황제 칼리굴라의 넋을 위로하자며 복수를 벌였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에게 충성 명목으로 돈을 하사받으며 프린켑스의 최측근 세력으로 공인된 유일무이한 무력집단이라서,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 1세와 교섭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는 무척 신중했으며, 또 다른 암살 시도가 있다고 여겨 그들을 원로원 연설 이전까지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고, 설령 만나더라도 온 몸을 모두 검사한 뒤 무장한 병사들을 곁에 두면서 면담을 짧게 진행했다.

즉,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칼리굴라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고, 원로원은 제대로 절벽 끝에 몰리게 되었다. 더욱이 카이레아가 불만을 품고 동조자들을 모았다고는 해도 이는 주동자를 포함해 2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카이레아는 고작해야 개인적인 앙심[14]을 이유로 거사를 벌인 인사인지라 원로원의 이런 행태는 비정상적인 암살범들과 동조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런 것을 차치하고라도, 상관인 클레멘스가 죽은 칼리굴라와 새롭게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를 지지했으며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개인당 15,000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즉석에서 하사했다는 현실적인 이유 덕에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근위대에게 원로원의 이런 행동은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근위대는 원로원의 서한이 공개된 직후, 오히려 클라우디우스 지지를 더욱 확실히한 후, 당장이라도 원로원을 제압할 태세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속에서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 인사들과 클라우디우스 1세의 개인 고문들은 원로원과 동조하지 않고 새 황제 밑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원로원의 경고성 서한을 무시할 것을 조언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움직여 반역 행위를 명백히 한 원로원을 끝장내고, 판 전체를 갈아 엎어야 한다며 강하게 권고했다.

원로원이 강하게 나가고, 새 황제를 필두로 한 황제파 세력이 근위대를 무력삼아 내전이라도 다시 일으킬 위기 상황속에서, 수도 경비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체감했다. 그들은 애당초 근위대와 맞붙을 생각이 없었던데다가, 반강제로 원로원에 의해 내세워진 존재인 터라 근위대가 표명한 입장을 듣는 순간 원로원을 저버리고, 클라우디우스 1세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민중들의 지지 역시 일찌감치 클라우디우스 1세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기운 터라 원로원은 코너로 몰린 상태가 되었다. 원로원은 오래 전부터 신체적 장애로 다리 한쪽을 절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미세하게 남은 클라우디우스 1세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혈육이라는 후광과 스스로의 인품 등이 민중들에게 높게 평가받아,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의 생각 이상으로 이탈리아 민중들과 제국의 주력인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황족이었다.[15]

이렇게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원로원이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갔고, 이는 원로원에게는 카이사르 이전 체제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며, 차기 황제가 향후 칼리굴라 이상으로 황제권을 강화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사망선고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때 로마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근위대를 장악해 통제하고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상술했듯 고문들의 권고에 따라, 30일이 되자 무장한 근위대를 대동한채 원로원에 찾아갔다.[16] 이때 그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복귀에 따르겠다는 의사 표시 대신

"당신들을 존중하겠다."

고 언급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과 두 집정관에게

''일부 불충한 세력에 의해 황제가 죽음을 맞았다''

고 언급하면서, 죽은 조카에 대한 기록말살형 선포는 큰 화를 부를 것을 공손하게 경고했다. 이어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주 정중하면서도 엄격하게 자신이 클레멘스를 위시한 근위대 9개 대대와 함께 대역죄인인 암살범 카이레아 등을 인도받아 국법에 따라 즉시 처형했다고 공표했다.

연설 내용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정중함이 묻어난 경고성 부탁이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무력하게 박수를 치며 클라우디우스 1세의 의견을 따라주겠다고 할 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의 예상치 못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상황 정리를 두 눈으로 본 터라, 클라우디우스 1세가 과거 아우구스투스처럼 자신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사후에도 황제 지위를 인정받고, 기록말살형이 연상되는 어떤 단어도 일절 언급되지 않은 채 시신이 수습되어 국장에 따라 영묘에 매장되었다. 그렇지만 이날 클라우디우스 1세는 원로원을 형식상 존중한다는 의미로, 조카의 조각상을 예의상 회의장 내에서 치워주었다.


6.3. 클라우디우스 1세 이후의 로마 제정[편집]


칼리굴라 암살 이후, 로마 제국은 클라우디우스 1세의 통치하에서 더 이상 돌릴 수 없는 제정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칼리굴라가 생전에 입안한 내각 구축, 인프라 건설, 황제의 재정 장악과 화폐 주조권 확보 등은 원로원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도 원상복구되지 못했다. 되레 클라우디우스 1세는 조카 암살 이후의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이어진 자그마한 반란까지 진압한 뒤 원로원 전체를 갈아 엎었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창건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역시 똑같았다. 그는 칼리굴라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례를 언급하면서 원로원이 반역을 꾸미는 것을 막고, 프라이토리아니 내 불충한 세력을 없애고자 자신의 후계자였던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해 반란 기미만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를 접견할 때 없었던 여러 예법이 이 암살 사건 직후 로마 제정에 도입되었다. 모든 방문객은 사전에 몸수색을 받았고, 황제의 동선에는 충성을 다하는 게르만족 호위대와 같은 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이는 모두 클라우디우스 1세가 즉위한 후, 조카가 무방비 상태로 암살되었음을 알고 내린 결론이면서도 클레멘스를 비롯한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의 건의에 따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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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단순히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강경한 조치 뿐 아니라 로마 시민들이 황제를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로원파는 로마 시민에게 돌아가야 할 전리품들을 횡령하다시피 해서 라티푼디움(대농장)을 경영했던 자들이라 당대의 로마 평민들에게는 인기가 거의 없다시피했다.[2]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곳은 황궁 내 지하통로였다.[3] 학자들은 정황상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비니키아누스 등이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다른 원로원 인사들도 몇 명 더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중 아시아티쿠스는 소시비우스와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 등이 메살리나와 함께 유죄를 밝혀내 클라우디우스 1세의 치세때 칼리굴라 암살 배후와 반역 혐의, 비니키아누스의 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운동을 도운 혐의 등으로 처형되었다.[4] 밑에 서술된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의 외조부이다.[5] 현대 연구자들은 로마인 이외에도 당대의 사람인 요세푸스가 언급한 이야기도 주목 중이다. 유대인인 요세푸스는 필로의 조카로 서기 41년 칼리굴라 황제 시해 사건을 꽤 흥미롭게 서술했다. 물론 요세푸스의 저술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그 역시 당시 어린아이였던데다가 사건이 일어난 로마에 거주하지 않아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으며, 요세푸스 역시도 카이레아의 개인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언급을 하고 있다. 당장 그가 주장한 칼리굴라가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거처를 옮겨 살아있는 신이 되려고 했다(AD 40)는 기록은 그 실체가 없어 확실하지 않다고 평가받는다.[6] 클라우디우스 1세는 어렸을 때부터 황실 가족들과 주변 귀족들로부터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이때 친할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 친어머니인 소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가족들 중 형인 게르마니쿠스,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굉장히 아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양아들이었던 대 드루수스의 사후 그가 남긴 세 아이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조카딸의 자녀들이기도 한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를 물심양면껏 지원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생전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정치 외에 하고 싶은 모든 학문 공부를 적극 지원해줬고,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녁마다 클라우디우스를 자신의 옆에 앉게 해 같이 식사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누나의 외손자이기도 한 혈육의 비범함과 문제 해결의 용의주도함을 꿰뚫어봤고, 정치쪽에서 후계 수업을 받을 수 없었던 외외종손에게 로마 제국 최고의 역사가였던 리비우스를 스승으로 삼게 해 로마 제국의 법과 전통, 정치 등을 자연스레 익히도록 했다.[7] 여기에는 황숙 클라우디우스도 포함되었다고 한다.[8] 이때의 일에 대해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암살자와 수위들은 훗날 죽은 황제의 유령을 보고, 처형 직전까지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9] 이런 그의 행동은 클라우디우스 1세의 즉위 이후, 황실과 프라이토리아니가 이 사람의 뒷조사를 하기 전부터 의심을 받게 했고, 암살 배후로 확정된 결정적인 증거물이 되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자신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체포된 뒤, 명확한 증거가 여러 가지라는 점을 거론할 때 이때의 일을 짚고 넘어가면서 이것부터 변명해보라고 물었다.[10]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쓴 이름은 서기 4년 6월까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였고, 그의 본명으로 흔히 알려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는 큰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의 합의 아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가 넘어간 직후부터였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혈연상 외종손이며 양손자였던 클라우디우스를 "내 손자", "사랑스러운 아이" 혹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로 불렀고, 티베리우스와의 합의 아래 그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새로운 가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뒤에 게르마니쿠스를 붙이도록 했다.[11] 대 드루수스 일가에게 있어 게르마니쿠스는 상징이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였던 그들은 티베리우스 황제 생전 드루수스 카이사르(칼리굴라 황제의 둘째 형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였다.)의 또 다른 공식 이름이었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게르마니쿠스에서 드러나듯이, 가족의 성씨를 게르마니쿠스로 앞세워 표기해, 프라이토리아니와 로마군에게 그들의 인기 기반이 누구인지 확실히 강조했다.[12] 실제 로마군 중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일대의 로마 군단들은 그들 지휘관들이 클라우디우스 제거를 공모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죽이거나 본인들이 토벌대가 되어 수뇌부들이 자살하게 하는 것을 보여줬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1세를 향한 실제 반란들은 모두 자체 진압되었다.[13]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칼리굴라 황제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의 휘하 백인대장으로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도움을 받아 근위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가족법상 클리엔테스였고, 이 혐의도 추가되었다.[14] 요세푸스, 디오 카시우스, 수에토니우스는 공통적으로 카이레아가 남자답지 못하다며 칼리굴라 황제가 놀리고 모욕을 줘서 이에 원한을 가졌다고 기록했다.[15] 특히 명문가의 수장인데다가 부친은 대 드루수스였고, 형은 게르마니쿠스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고 향수가 강한 이탈리아 민중들과 이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상당했다.[16] 이 연설 후에도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모든 암살의 위험요소를 제거할 시간이 될 30일 동안 극소수의 인사 외엔 어떤 방문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경호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