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니아 카이소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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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onia Caesonia |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롤리나 파울리나
후임
메살리나
신상 정보

Milonia Caesonia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출생
서기 6년
로마 제국 로마(추정)
사망
서기 41년 1월 24일
로마 제국 로마 팔라티누스 황궁 (향년 35세)
배우자
루푸스(추정)[1]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AD 39년–AD 41년)
자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3명
율리아 드루실라
형제자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가계
2.2. 첫번째 결혼과 이혼
2.3. 재혼과 아우구스타 등극
2.4. 암살
3. 평가 및 여담




1. 소개[편집]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이다. 남편은 로마 제국의 3대 임페라토르, 프린켑스인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네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부인이다.

가이우스 ~ 네로 시대까지의 장군, 정치가, 행정가, 외교관인 코르불로가 이부오빠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2.1. 출생과 가계[편집]


카이소니우스 막시무스와 비스틸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어머니 비스틸리아의 일곱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우구스타가 된 후, 6월 2일부터 6월 4일까지가 그녀의 생일 기념일로 축하된 것으로 볼 때 대략 6월 2일생 내지 6월 4일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본가 카이소니우스 씨족은 공화정 후기에 등장한 가문으로, 그녀가 태어날 당시에는 아직 귀족에 편입되지 않은 이탈리아 평민에 속한 기사계급이었다고 한다. 카이소니우스 가문은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죽고 100여년이 지난 뒤인 2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이르러 마침내 귀족반열에 올랐는데, 그녀의 본가가 로마 정계의 유력 가문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이 가문 출신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화정 말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분야에 있어 권위자로 손꼽히는 로널드 사임에 따르면, 카이소니아의 외삼촌과 어머니는 일찍부터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의 코호스 아미코룸(친구집단) 멤버이자 '황제의 식탁 친구들'의 핵심인사 섹스투스 비스틸리우스의 여동생인 만큼 야심많고 고위직 진출에 욕심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매력적인 신붓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는 총 6번 결혼했고 6명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뒀는데, 카이소니아는 비스틸리아가 마지막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일곱번째 아이였다. 이를 통해 카이소니우스 막시무스가 출세를 위해 이미 5번이나 결혼해 6명의 자녀를 둔 비스틸리아와 정략혼을 맺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

외삼촌 섹스투스 비스틸리우스는 법무관까지 지낸 고위급 원로원 의원으로,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의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가장 가까운 오랜 친구이자 오랜 참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외삼촌 비스틸리우스는 티베리우스 말년, 티베리우스 황제와 대 드루수스의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카프레이아 섬에 머무는 것이 음탕한 행동을 위해서 벌인 것이 아니냐는 풍자시를 지은 죄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진노를 얻고 자살했다. 하지만 이 사건과 별개로, 카이소니아의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여전히 신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비스틸리아가 6번이나 정략결혼을 하고,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둔 만큼 카이소니아에게는 6명의 이부오빠들이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한 오빠들로는 시인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전직집정관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네로 시대의 저명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있다.


2.2. 첫번째 결혼과 이혼[편집]


카이소니아가 언제 결혼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또래 로마여성들과 비슷한 나이에 첫번째 결혼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첫 남편은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의 후원자였던 루푸스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대략 39년 전 즈음에 첫 남편과 이혼했으며, 사이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 명의 딸을 뒀다고 한다.


2.3. 재혼과 아우구스타 등극[편집]


수에토니우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이우스보다 몇 년 이상 연상인 카이소니아는 정부로서 확실한 시험기간을 거친 후 39년 늦여름 결혼을 했고 한 달 뒤 칼리굴라의 혈육 율리아 드루실라를 낳아줬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 후 곧 아우구스타에 올랐다고 한다. 또 다른 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불륜관계로 연애를 하다가 39년 말부터 진지한 사이가 됐고 40년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의 신부 간택이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여론이 생겼고,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한 일은 로마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카이소니아의 인기는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길거리 소문 등을 죄다 기술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소니아는 무분별한 사치를 즐기고 닥치는 대로 남자와 자는 음탕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이런 그녀에게 열정과 헌신을 담아 사랑했다고 한다. 또 칼리굴라가 아내 카이소니아에게 투구, 망토, 방패를 갖추게 한 다음 군대에게 보여주거나,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옷을 벗겨 알몸 상태로 만든 뒤 앞을 걷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엄청난 미인도 아니었고 젊은 편도 아닌데다 첫 결혼에서 세 명의 딸까지 뒀음에도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무슨 이유로 열렬히 빠져든 여성이었는지 의문이라고 기록했다. 또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가 카이소니아를 발가벗긴채 걷게 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인지한 이유가 자신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한 기질을 확인한 이후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들 대부분이 길거리 소문과 저자의 머릿속 상상력 등을 동원해 기술한 이야기가 많아, 카이소니아에 대한 묘사 역시 상당수가 거짓으로 보인다고 평가받는다.[3]

그렇지만 수에토니우스 외의 후대 사가 중 디오의 기술에도 드러나듯, 카이소니아는 황제보다 6살 정도 많은 연상인데다 기사계급 출신이고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3명인 이혼녀였던 이유로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녀가 죽고 15여년 뒤 태어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활동한 풍자작가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는 칼리굴라가 광기에 휩싸였어도, 카이소니아에게 헌신한 이유는 사랑의 묘약 때문일거라고 풍자했다. 하지만 이런 세간의 평과 별개로, 칼리굴라는 이전의 아내들과 달리 카이소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아꼈다. 이는 그가 친삼촌 클라우디우스 가족이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에게도 놀라울 만큼 헌신적이었고 애정을 베풀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기에,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기적같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2.4. 암살[편집]


서기 41년 1월 24일,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루푸스 등이 20명 남짓의 프라이토리아니 일부 대원들과 공모해 비무장 상태의 칼리굴라를 암살했다. 이후 그들은 황궁으로 들어간 다음, 카이소니아와 그녀의 딸 율리아 드루실라마저 암살한 다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자체를 멸문시켰다.

이 사건에 대해 당대 사가 요세푸스는,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카이소니아는 코르불로의 여동생답게 남편을 죽인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내밀면서 용감하게 칼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3. 평가 및 여담[편집]


남편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의 대중적 이미지가 그의 정적 세네카, 100년 뒤의 수에토니우스, 200년 뒤의 디오 카시우스 기록 탓에 광기, 사치, 부도덕함, 잔인함으로 단단히 각인된 것처럼, 카이소니아 역시 대중매체 등에서 묘사될 때 방탕하고 음탕하게 묘사되고 있다.[4] 이런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수에토니우스였는데, 이 사람의 묘사대로라면 카이소니아는 뒤에 등장할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 소 파우스티나 못지 않은 막장 아우구스타였다.[5] 수에토니우스를 주요 자료로 쓴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아예 좋은 가문 출신도 아니고 치안대장의 딸로 전남편은 빵집 주인이었으며 칼리굴라의 광기를 유일하게 달랠 수 있어 황후가 된 것이라고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서술했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 외에는 그녀가 그렇게 음탕했다거나 부도덕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녀의 인기가 없었던 부분 역시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로마 상류층들이 환영하지 못할 이유[6]라서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고대기록 내 평가는 그 신뢰성부터 많이 의심받고 있다. 당장 남편 칼리굴라만 하더라도 옛 로마 제국 영역에서 비문, 유적, 유물 등이 발굴돼 대차대조된 연구로 이미지와 다른 황제로 재평가 중이며, 고대 기록의 이미지가 거의 대부분 조작된 폄하로 밝혀진 상태다.

이는 카이소니아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녀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음탕하고 탐욕스럽고 형편없는 황후라는 주장을 있는 그대로 믿는 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있다. 즉, 세네카, 수에토니우스, 디오의 기록 중 그 일부만 확대해 창작된 대중매체 속 묘사와 실제 카이소니아의 모습은 같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후세 사가들 중 카이소니아를 메살리나 수준의 악녀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또 그녀를 묘사한 이야기 중 상당수는 수에토니우스의 창작 내지 길거리 내 뜬소문이 옮겨진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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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한 풀네임이 전해지지 않는 탓에, 인스타니우스 루푸스라고 불린다.[2] 여담으로 카이소니우스 막시무스는 딸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아버지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 수에토니우스가 칼리굴라와 카이소니아 이야기를 기록한 <가이우스> 편 중 그 마지막 이야기를 기록한 60쪽 마지막 기술 내용을 보면, 노골적으로 그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그 마지막 당주였던 칼리굴라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저자는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율리우스 가문 남성들은 칼을 맞아 모두 죽었고 당연한 결과였다는 식으로 말하며, 카이사르의 아버지대부터 가이우스를 이름으로 쓰는 사람들은 모두 칼에 맞아 암살됐다는 식으로 그 증오심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4] 대표적으로 1979년 영화 칼리굴라에서 카이소니아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가 있다.[5] 다만, 소 파우스티나의 경우에는 아들 콤모두스가 워낙 막장 폭군인 탓에 그녀 사후 그 평가가 깎인 경우였다. 물론 살아생전에도 온갖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까닭에 리비아 드루실라 같은 이미지였지만...[6] 신랑보다 연상인 이혼녀, 결혼 과정에서의 불륜 의혹, 혼전임신, 그리고 그녀의 출신 가문이 이전의 아우구스타들과 비교해 한미한 가문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