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치나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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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an_Baptiste_Martin_Schlacht_bei_Calcinato_1706.jpg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스페인 동맹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6년 4월 19일 이탈리아의 칼치나토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사부아 공자 외젠이 부재한 틈을 타 공세를 감행한 프랑스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2. 배경[편집]


1705년 8월 16일, 사부아 공자 외젠 휘하 오스트리아군과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휘하 프랑스군은 카사노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1705년 겨울 몽티차리와 칼치나토 부근에서 숙영했고, 프랑스군은 카스틸리오네와 만토바 부근에서 숙영했다. 그러다가 1706년 초, 외젠은 잠시 군대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 전쟁 평의회 의장으로서 밀린 엄무를 처리했다. 방돔 공작은 외젠이 떠나 있는 틈을 타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하고 4월 19일 적 숙영지를 향해 행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몽티차리와 칼치나토 부근에 3개 부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각 부대간 거리는 대략 11km였다. 방돔 공작은 잠시 척후병들을 파견해 적의 동태를 살펴본 후 칼치나토에 주둔한 오스트리아 분견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프랑스-스페인 동맹군[편집]


  • 총사령관: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부르봉
  • 병력: 23,000명

3.2. 오스트리아군[편집]


  • 총사령관: 레벤틀로프 백작 크리스티안 데틀레프
  • 병력: 10,000 ~ 12,000명

4. 전투 경과[편집]


4월 19일 새벽, 방돔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드 로나토 운하에 도착한 직후 서둘러 부교를 여러 개 건설해 운하를 신속하게 건넜다. 이후 방돔 공작은 200명의 기병을 파견해 칼치나토 마을 전면의 언덕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일출이 되자 비로소 적의 접근을 눈치챈 레벤틀로프 백작 크리스티안 데틀레프는 휘하 기병 전체를 같은 언덕으로 급파하여 프랑스 기병대를 몰아냈다. 이후 그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언덕에 보병 8개 대대를 배치시켰다.

얼마 후, 방돔 공작의 공격 명령을 접수한 프랑스 포병대는 언덕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군 보병대는 좌익, 중앙, 우익 전체에 걸쳐 돌격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언덕 측면으로 돌아가면서 적의 후방을 노렸다. 레벤틀로프 백작은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우익의 측면을 공격해 약간의 피해를 입혔지만, 방돔 공작이 예비대를 끊임없이 전선으로 보내자 결국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방돔 공작은 그런 적을 추격해 레자토로 몰아냈다. 이리하여 칼치나토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프랑스군은 칼치나토 전투에서 500명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6천명의 사상자 또는 포로를 기록했으며, 군마 1,000마리, 대포 6문, 군기 25개를 상실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외젠은 칼치나토 전투에서 패배한 레벤틀로프 백작 휘하 오스트리아군을 수습하느라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한달 후 프랑스군이 플랑드르 전선에서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지휘하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라미예 전투에서 참패하자, 이번엔 방돔 공작이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플랑드르 전선으로 급히 이동해야 했다. 이에 외젠은 반격을 개시, 토리노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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