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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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카사노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의 몇 안되는 패전 중 하나이다.

2. 배경[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이래, 프랑스군은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1703년까지 사부아 공자 외젠오스트리아군에게 거듭 패배했다. 이에 고무된 사보이아 공국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1704년 외젠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1세의 요청에 따라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던 라인강 전선으로 향하자, 북이탈리아 전선은 다시 프랑스에게 기울였다. 푀이야드 공작 루이 도뷔송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외젠이 떠난 틈을 타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했고 1705년 4월 니차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수도 토리노피에몬테 남부를 가까스로 사수하며 오스트리아에 구원을 호소했다.

한편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외젠이 일찍이 점령했던 영토를 회복했다. 이때 방돔 공작은 자신의 형 필리프 드 방돔에게 2만 병력을 맡기고 카사노에서 아군의 후미를 보호하게 했다. 얼마 후, 외젠은 블레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북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영국 함대에 의해 운송된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 휘하 프로이센군 8천 명과 합세한 뒤 브리안차에서 이베자까지 이르렀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포 강 건너편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했고, 방돔 공작은 적이 포 강을 곧 건너올 거라고 판단하고 건널목을 방어할 준비를 갖췄다.

그러나 그것은 외젠의 허장성세였다. 그는 형식적으로 강을 건너려는 시도를 하다가 밤중에 부교를 불태운 뒤 만토바로 향하다가 방향을 틀어 8월 14일 약 40km 떨어진 루마넨고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이틀 간 전력을 재정비 한 뒤 8월 16일 아다 강 건너편 카사노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편집]


  • 총사령관: 사부아 공자 외젠
  • 프로이센군 사령관: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
  • 병력: 29,000명

3.2. 프랑스군[편집]


  • 총사령관: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병력: 30,000명

4. 전투 경과[편집]


아다 강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물살을 헤치며 건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다 강을 건널 방법은 강 우측 둑에 위치한 카사노 마을에 설치된 돌다리를 통하는 것 뿐이었는데, 이 돌다리 주변엔 작은 요새와 참호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아다 강은 여러 작은 개울과 관개 수로로 나뉘어졌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관개 수로는 레토르토 하천이었다. 이 수로는 아다 강과 평행하게 흘렀고 아다 강 좌측 둑과 연결되었으며, 또다른 다리가 참호의 보호를 받으며 거기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방돔 공작은 적군이 자취를 감춘 걸 보고 외젠이 만토바로 향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형에게 카사노를 떠나 만토바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필리프는 동생의 지시에 따라 짐을 꾸리다가 8월 16일 오후 2시 오스트리아군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급히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당시 그들의 군수품들은 돌다리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의 프랑스군은 적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퇴로마저 끊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방돔 공작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 1,500명의 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형과 합세했다. 그는 다리를 막고 있는 짐들을 강으로 던지라고 명령했고 수로를 따라 전선을 형성한 뒤 아일랜드 5개 연대를 포함한 최정예 병력으로 다리를 지키게 했다. 이후 외젠은 레토르토 수로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다리를 확보했다. 외젠은 프로이센군에게 레토르토 다리를 통과한 후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본인은 돌다리에 자리를 잡은 프랑스군 중앙을 향해 공격했다.

이후 양측은 4시간에서 5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한 프로이센군은 여러 둑을 점령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돌다리를 점거하려 애썼지만 적군이 수비에 유리한 위치를 사수하며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외젠 본인도 전투 도중 총상을 입고 전장을 떠나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아다 강의 돌다리를 점령하는 걸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리하여 카사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카사노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양측 모두 수천 명 가량의 사상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며, 그 중 프랑스군 1,000명은 아다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외젠은 자신이 카사노 전투의 승자라고 주장했으며 1708년 네덜란드 화가 얀 반 후첸베르크에게 카사노 전투를 기념하는 전쟁화를 그릴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이 전투의 승자는 프랑스군이었다. 카사노에 주둔한 프랑스 분견대를 섬멸하려는 외젠의 의도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사보이아 공국을 구원하려던 적의 진군을 저지해냈기 때문이다.

외젠은 부상을 회복한 뒤 10월 초에 트레빌리오 마을에 숙영지를 건설해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오스트리아군이 그곳에서 겨울을 날 생각이라고 여기게 유도했다. 그러다가 10월 9일, 외젠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밤중에 진영을 떠나 크레마 방향으로 진군해 방돔 공작을 따돌리려 했다. 방돔 공작은 이틀 후에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그를 추격했다. 그러나 외젠에겐 불행하게도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오스트리아군은 더이상 진군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외젠은 몬티차리와 칼치나토 부근에서 군대를 숙영시켰다. 얼마 후 적과 인접한 지점에 도착한 방돔 공작은 카스틸리오네와 만토바 부근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하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다가 1706년 초 외젠이 잠시 본국에 가 있는 틈을 타 승부를 보기로 결심한 방돔 공작은 공세를 개시, 칼치나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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