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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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
2. 역사
2.1. 스탈린 집권 이전
2.2. 스탈린 집권 시기

кула́к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말기와 소련 초기에 상당한 토지와 가축을 소유한 농민, 즉 부농을 말한다. 공산주의집단농장 이론에 따라 스탈린 집권기에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2. 역사[편집]



2.1. 스탈린 집권 이전[편집]


쿨라크라는 말은 짜르 시대인 스톨리핀의 개혁 당시에 만들어진 단어로, 본래는 '주먹'을 의미한다. 스톨리핀의 개혁이 농민들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완전히 철폐함에 따라 당시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 중에서도 자신의 토지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소수 생겨났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 체제를 옹호하고, 농민이라기보다는 반쯤은 지주처럼 행동했다. 볼셰비키들은 이들을 빈농에 대한 적으로 보았고, 쿨라크는 부농들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생겨난 말이다.

볼셰비키가 집권한 러시아 혁명 이후 쿨라크는 공산주의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볼셰비키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쿨라크들의 저항도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과 혼란으로 인해 생산능력이 바닥을 찍자, 레닌신경제정책을 통해 쿨라크 탄압을 중단한다.

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은 대표작 《수용소 군도》에서, <쿨라크>라는 말이 원래는 <스스로 일하지 않고 고리대금업이나 중개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간사하고 인색한 거간꾼>을 뜻하다가, 1917년 이후 즉 이런 거간꾼들이 혁명으로 일소된 뒤로는 <자기 가족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경우 날품팔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라는 뜻으로 변했다가, 1930년경에 이르러서는 <강인한 농민>이라는 뜻으로까지 바뀌었다고 쓰고 있다[1].


2.2. 스탈린 집권 시기[편집]


쿨라크 탄압은 스탈린 시기에 다시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제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쿨라크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 한쌍" 혹은 "5~6에이커"의 땅[2]을 가진 농민으로 규정되었다.

스탈린이 쿨라크를 적대시하며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에는 산업화를 위한 막대한 곡물(도시 노동자들을 먹이고, 외국에서 고급 기술과 설비를 수입하는 용도로 쓸)이 충분히 수급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영토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펼쳐졌는데 이 시기 농민들은 붉은군대에 대개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차르와 귀족들이 사라지면 그들에게 낼 소작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붉은군대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선전했다. 이렇게 되자 도심지에 공급되는 공물량이 사라졌는데 이는 부재지주가 농촌에서 식량을 착취수준으로 수탈하여 모스크바에 판매함으로서 유지되는 식량공급 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귀족이 행하는 착취의 부재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에 대규모 식량난의 원인이 되었고 공산주의 지도부는 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조악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도시의 노동자들을 식량 징발대로 편성해 농촌에 보내어 식량을 기부받는다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스탈린 초기 시절까지만 해도 소비에트는 드넓은 러시아 지방영토를 장악할 인력이 없었다. 현지를 관리하던 짜르 정부와 귀족은 혁명으로 쓸려나갔는데, 현지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함량미달인 자들이 한가득이었던 데다가 지나치게 지방에 밀착되어 있어 중앙당이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중앙에서 임명한 노동자 출신 지도자들은 문맹을 겨우 면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들이라 지방행정을 할 능력이 없었다. 이는 훗날 대숙청의 한 원인이 된다.

결국 세금수취제도 역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는데,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의 주민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자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감지한 중앙당 지도부는 이를 반혁명적인 농촌의 반동분자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그 반동분자들에게 식량을 강탈할 식량징발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차르 정부 때보다 공식적인 수탈량을 올릴 수는 없었다. 해답은 대대적인 곡물징발대의 운용이었다. 도시 출신의 군인들을 곡물징발대로 편성해 농촌에 보냈다. 명목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건설을 위한 "기부"였지만 총칼을 든 외부인이 종자와 겨우내 버틸 식량조차도 모두 빼았아가는 행태 덕에 농민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이는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행정조치로 수확량을 조사한 후 수취한 게 아니라 애초에 숨겨놓은 물건이 많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몰수하는 징발대를 운영했으니[3] 농민이 협조하면 아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수확물과 가축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징발대가 순순히 협조를 고하면 농민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협박과 고문을 통해 "취조"하면 성공적으로 수확물이 "발견"될 수 있었다. 번번히 나타나는 이런 상황은 중앙당에게 있어 농민의 반동성을 확인시켜주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으며 점점 수탈은 거의 농촌에 대한 습격에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자영농까지 부농 즉 "쿨라크"로 칭하며 국가의 적으로 명문화하고 이들에 대한 약탈을 장려했다. 징발대는 사실상 국가공인 산적떼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자국 농민들에 대한 증오감을 감추지 않게 된다. 이게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부농이라는 쿨라크가 1500만이나 낙인찍힌 이유가 되었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들을 신속하게 굶겨죽여서 식량위기를 해결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식량위기를 정책수정을 통해 되돌리거나 식량증산을 통해 이루어낸게 아니라, 만들어낸 적을 1500만 명이나 굶겨죽여서 해결해냈던 것이다.

식량공급을 담당하는 농민과 유목민들을 대거 처형한 이 자살적 정책 때문에 러시아는 급격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소련라스쿨라치바니예를 통해 궁극적으로 쿨라크의 땅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가두고 굶겨죽였다. 5년만에 1500만명이나 되는 농민이 사망했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유목민들은 전부 쿨라크로 규정되었으며 모든 가축을 몰수당한 채로 목화농장과 옥수수농장으로 무리배치당했다. 이들 농장에 대한 식량공급은 부실하기 그지없고 수탈량은 가혹해서 결국 인구 절반이 총살당하거나 아사했고 그 자리는 중앙에서 이주시킨 러시아인들로 채웠다. 러시아 농촌 어디에서나 굶어죽은 사람들이 널려있었고 처음에는 기초대사량이 많음에도 식량공급없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남자들이 쓰러졌다. 이후 식량공급을 못받아 굶주렸던 아이들이 굶어죽었으며 최후에는 여자들이 남편과 아이들의 시체를 파먹다가 그마저도 떨어져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어나갔다.

이런 지옥도를 연출한 중앙당은 5년이라는 단기간에 사람들이 굶어죽은만큼 수요가 없어지니 곡물수지가 점점 개선되는걸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노고를 칭송했다.

스탈린은 훗날 이들 농민과의 전쟁이 독일과의 전쟁보다 더 어려웠다고 회고했다는 야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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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용소 군도》 1권 p97-98, 열린책들, 김학수 옮김..[2] 참고로 쌀농사 문화권인 남한의 농지개혁법 당시 가구당 농지 소유 상한선이 3헥타르(약 7.4에이커)였다. 그러니까 대략 그 정도를 일개 농가에서 현실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최대 면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다만 밀농사의 특징상 쌀농사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떨어지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3] 징발을 수행하는 군인들 역시 도시 빈민들이었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증오에 가득차있었으며 굶주려있었다. 당연히 현지에서 무자비하게 모든 식량을 징발했으며 그중에 일부를 횡령하고 상부로 올려보냈다. 저항하면 가차없이 죽였으며 저항하지 않아도 예쁜 처자가 있다고 하면 강간살해한 후 저항했다고 조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