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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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
Κροῖσος | Croesus



출생
기원전 595년
아나톨리아 리디아 왕국
사망
기록 없음
키루스페르시아 제국
재위기간
리디아의 왕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46년

1. 개요
2. 생애
2.1. 탄생
2.2. 화폐 발행
2.3. 정복
2.4. 페르시아와의 전쟁, 리디아의 멸망
2.4.1. 델포이 신탁과 전쟁의 개전
2.4.2. 프테리아 전투
2.4.3. 팀브라 전투
2.4.4. 키루스 대제의 조언자
2.5. 철학자 솔론과의 일화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다(Rich as Croesus)[1]

-John Gower, Confessio amantis(1390)

크로이소스는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아나톨리아 위치한 고대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리디아 왕국을 기원전 560년부터 기원전 547년까지 통치했다. 크로이소스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고,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또한 크로이소스는 저명한 그리스 철학자 솔론을 포함한 많은 지식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솔론이 그를 방문하여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해준 일화는 여전히 서양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고전 문학에서 부와 번영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을 촉진시킨 사람으로 기억된다. 크로이소스 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패배해 사로잡혔다. 키루스 대왕은 그에게 화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형이 집행되던 중, 불길이 그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아폴로 신이 크로이소스의 경건한 마음에 감탄해서 그를 불길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고 고대 서사시에 서술되어있다. 신의 도움으로 죽음을 피한 크로이소스는 키루스 대왕의 신뢰 받는 조언자가 되었다. 크로이소스는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 왕국의 화폐 시스템을 페르시아에 적용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결과로 페르시아는 크게 번영하게 된다. 크로이소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운명의 변덕스러움과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본성을 보여주는 예로 인용된다.

2. 생애[편집]




2.1. 탄생[편집]


메름나데스 왕조의 3대 왕인 알뤼아테스와 그의 여러 왕비 중에 한 명인 카리아의 귀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된 크로이소스는 아드라미티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폰토스 출신 유목민들과 킴메르 인들이 리디아를 지속적으로 침입했는데, 아드라미티움은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거점 도시였다. 폰토스 유목민과 캄메르 인들은 알뤼아테스의 증조부인 기 왕을 죽였을만큼 리디아에게 큰 위협이었다. 아버지가 기원전 585년에 메데스 인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는 계승경쟁자였던 이복형제 판텔레온을 제거하고 리디아의 4대 왕이 되었다.


2.2. 화폐 발행[편집]


고대 서사시에 따르면 크로이소스의 전설적인 부는,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바뀌어버리는 저주에 걸린 미다스 왕이 손을 씻은 곳이라고 알려진 팍톨루스 강에서 흐르는 황금을 모아 축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현대 학자들은 그가 기록 역사상 최초[2]로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함으로서 부유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크로이소스는 아버지인 알리아테스 왕이 리디아를 통치하는 동안, 자신이 관리하는 도시에서 화폐를 주조했고, 상인들로 하여금 그 화폐를 사용해서 거래하도록 명령했다. 통용되는 거래 방법이 만들어지자 리디아의 상업은 크게 발전했다. 그는 화폐를 통해 시장을 마음대로 주물렀고, 이를 통해 크로이소스는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크로이소스가 건설한 것이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에는 크로이소스의 서명이 새겨져있다. 이 서명은 크로이소스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크로이소스의 주화 : Croseid(크로세이드)
파일:coin.jpg
54%의 금과 44%의 은으로 구성된 10.7g의 주화. 세계 최초의 주화/동전이다. 호랑이와 황소 문양이 있다.


The half-Hellenized kingdom of Lydia first coined electrum since this natural alloy of gold and silver was obtainable from certain alluvial deposits, notably the sands of the river Pactolus. Later, the minting of silver coins of warranted value spread in Greece itself, where the metal was not too scarce. Finally, the Lydian King Croesus was the first to issue gold coins. At the same time and progressively, minting became a state prerogative. The governments of the Greek cities took away the right of coinage from private individuals and eventually reserved this valuable privilege for themselves.

Jean Hatzfeld

헬레니즘 시대의 리디아 왕국은 금과 은의 천연 합금[3]으로 주화를 제조했는데, 이 천연 합금들은 프락톨루스 강의 모래를 포함해 리디아 왕국의 다양한 곳에서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리디아에서 제조된 화폐는 무역상들을 통해 그리스이집트,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서도 유통되었다. 조폐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이 공공연한 사실로 여겨지면서, 조폐업은 점진적으로 국가&정부 만의 특권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민간 상인들이 임의로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했다.


2.3. 정복[편집]


새로운 왕에 의해 순식간에 할리스 강 서쪽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복되었다. 실리키아인과 리키아인을 제외하고 크로이소스는 리디아인, 프리기아인, 미시아인, 마리안디니아인, 칼리베인, 파플라고니아인, 티니아인, 비티니아인 트라키아인, 카리아인, 이오니아인, 도리아인, 아이올리인, 팜필리아인을 모두 제압하고 나머지 모든 백성들도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

헤로도토스

크로이소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행정적, 정치적, 군사적 기술을 배웠고, 긴 시간 동안 군사 거점인 아드라미티움에서 총독으로 있으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의 천재성은 경제 뿐만 아니라 군사 부문에서도 두드러졌다. 크로이소스는 왕이 된 직후,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동맹을 맺어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한다. 자신이 총독 시절 만들어놓은 화폐 시스템을 메디아 왕국 전역에 적용시켰고, 왕국은 크게 풍요로워진다.

리디아가 충분한 금과 인력을 갖게 되자, 크로이소스는 즉시 이오니아의 도시국가 에페소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한다. 원래 에페소스 왕조는 크로이소스의 메름나데스 왕조와는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에페소스의 군주 핀다르는 과거 크로이소스가 지신의 이복형제인 판텔레온과 왕위 계승 전쟁이 발생했을 때 판텔레온을 지원했었다. 이후 판텔레온이 사망하고 크로이소스가 왕이 되면서 두 왕조는 척을 지게 된다. 크로이소스는 에페소스의 핀다르 왕에게 리디아에게 항복하고 복종하라는 서신을 보낸다. 핀다르가 거절하자 크로이소스는 에페소스를 공격한다. 에페소스의 군대는 리디아의 군대에 완패해 지리멸렬 됐고, 크로이소스는 핀다르가 있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다. 핀다르는 크로이소스에게 항복하고 도시국가 에페소스는 리디아 왕국에 병합된다. 에페소스를 병합한 후 크로이소스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한다.

크로이소스는 다른 이오니아, 아이올리스와 도리스를 모두 정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를 침공했다. 밀레투스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이 무력에 의해 병합당하거나, 항복 권고를 수용해 리디아에 공물을 바쳤다. 크로이소스는 그리스 군도 지역의 도시 국가들은 정복하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 조약의 대가로 리디아그리스와 나우크라티스[4]와의 무역 상품 중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을 독점해서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책에서는 크로이소스가 아나톨리아 지방을 정복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지방은 크로이소스의 아버지인 알뤼아테스 시대에 이미 리디아 왕국에 복속되어있었다. 알뤼아테스 재임 시절 킴메르 약탈자들은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었는데, 이는 일대의 중앙집권 국가였던 프리기아를 포함해, 내로라 하던 정치 세력을 모두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약탈이 끝난 후 아나톨리아는 군소 부족들로 쪼개어졌다. 알뤼아테스는 아나톨리이아의 부족들로 하여금 리디아 왕국과 속국 및 동맹 관계를 맺도록 설득했다. 속국이 된 부족은 리디아 왕국에게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대신, 리디아 왕국은 그들이 공격받았을 때 도와주기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는 리디아 왕국의 영향력이 소아시아의 동쪽 끝자락까지 확장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리디아의 요새 유적은 소아시아의 북서부인 미다스 시의 프리기아 고지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서부인 하치투울, 아피온카라히사르, 코냐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리디아가 군소 부족들과 단순 조공 관계가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아나톨리아 지방의 생산물과 도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완전히 병합된 관계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크로이소스가 아나톨리아 지방을 정복했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리디아와 프리기아 사이의 관계를 서술한 고대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됐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기록 중에 산악 리디아 부족과 킬리키아 인들이 크로이소스로부터 독립했다는 기록 또한 틀린 것으로 입증이 됐다. 리디아 왕국은 산악 리디아 부족을 침략한 적이 없고, 킬리키아 인들은 리디아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정복하기 한참 전에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이미 정복당해 있었다.[5][6]

공격적인 정복 활동으로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국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그리스 문화권의 대부분의 해안을 차지했고, 북쪽으로는 페르가몬 지방에서 흑해 남쪽 해안선 일대까지 차지했다.

2.4. 페르시아와의 전쟁, 리디아의 멸망[편집]




2.4.1. 델포이 신탁과 전쟁의 개전[편집]


기원전 550년,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는 그의 손자인 페르시아키루스에 의해 축출되었다. 아스티아게스는 처남[7]인 크로이소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델포이 신탁에 자문을 요청한다. 델포이 신탁은 "키루스를 공격한다면 위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이 대답을 듣고 페르시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 소국이 리디아를 배반하고 키루스에게 복속되기를 원한다는 소문이 리디아에 퍼졌다. 이 소문을 사실이라고 판단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치기 앞서 프리기아의 수도인 프테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리디아의 대군이 프테리아로 향하는 도중에 할리스 강 때문에 진격이 늦어진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에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기 위해 할리스 강이 흐르는 경로를 바꿨다고 기록했다. 그의 책에 따르면, 리디아 군은 강을 오른편에 두고, 왼편에 있는 땅에 수로를 판 후, 오른편에 있는 강을 막음으로서 오른편에 흐르는 강이 왼편으로 흐르게끔 바꿨다고 한다.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할리스 강(Halys River)은 유폭이 좁고 유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 강이다. 당시에는 할리스 강에 군단이 건널 수 있는 다리나 배가 없었기 때문에 강의 경로를 바꿔서 강을 건넌다는 기록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4.2. 프테리아 전투[편집]


프테리아는 손쉽게 크로이소스의 군대에게 정복당한다. 키루스는 즉시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해 리디아 군이 주둔 중이던 프테리아를 공격하면서 기원전 547년 프테리아 전투가 발생한다. 프테리아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전투가 어디서, 어떻게 진행됐고 양측의 피해가 어떤지와 같은 상새한 전투 내막에 대한 기록은 남겨져있지 않다. 전투가 끝난 후 양측은 서로를 먼저 공격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겨울이 되자 크로이소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리디아의 수도인 사디스로 물러난다. 당시 소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겨울 건조지에선 말을 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군대를 물렸다가 봄이 오면 다시 싸우는 관례가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키루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서쪽으로 후퇴하면 키루스가 프테리아를 점거해 요새화 할 것이라고 생각해 프테리아에 불을 질러 방어 시설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크로이소스는 고용했던 용병을 해고하고, 동맹국의 병력을 돌려보낸 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2.4.3. 팀브라 전투[편집]


키루스는 크로이소스가 프테리아를 버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자, 즉시 그를 추격한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에게 없는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베두인으로 구성된 낙타 기병 부대였는데, 이들은 건조지와 사막에서 경기병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보여줬다. 이들 덕분에 크로이소스와 달리 키루스는 겨울 건조지에서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키루스는 낙타 기병으로 리디아의 경기병 부대를 무력화시키고, 물러나던 크로이소스 본대를 팀브라 지역에서 따라잡는다. 크로이소스는 행군하면서 상당수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병력의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로이소스의 군대가 키루스의 군대보다 2배 더 많았다. 크로이소스의 주력군은 12만 명의 이집트의 중보병과 300대의 전차,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의 정예 궁수들이었고 총 42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키루스의 주력군은 1만 명의 불멸자 군단과 2만 명의 펠타스트, 그리고 300명의 낙타기병과 6개의 공성탑이었고 총 196,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치들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당시의 보급 능력과 인구수 및 재원 등의 정보를 고려하면 터무늬 없는 수치로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절반 미만일 것으로 추측된다.

크로이소스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투를 예상하고 그에 따라 군대를 배치했다. 페르시아 궁수의 화력에 맞서기 위해, 그는 보병을 깊은 진형으로 배치하여 전방이 무너지더라도 후방이 공격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크로이소스는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여 가벼운 페르시아 말을 뚫고 페르시아 측면을 강타할 계획을 세웠다. 크로이소스는 리디아 군의 숫자적 우위을 믿고 손쉽게 키루스 추격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키루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투가 진행된다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트릭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병력을 일렬로 배치하는 대신 편자 모양으로 배치했으며 측면을 다소 비워두웠다. 이 라인의 빈 공간은 필요할 때 더 많은 화력을 제공할 수 있고, 상대 기병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공성탑으로 채워졌다. 그런 다음 그는 말굽 편대가 리디아 군대에 의해 포위당할때 리디아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전차를 뒤로 물러나 편대 뒤에서 위치시켰다.

개전 직후, 리디아의 기병들이 언뜻 보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강타하려고 돌진해왔다. 이에 페르시아 군대의 좌익에서 키루스의 낙타 기병들은 계획한대로 그들을 차단하기 위해 달려와 그들과 충돌했다. 수적 우위로 페르시아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본대를 치려던 크로이소스의 계획은 낙타를 처음 마주한 리디아 말들이 낙타의 냄새에 깜짝 놀라 순식간에 대열을 잃으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말들은 기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고, 페르시아 군대가 질서를 잃은 리디아 기병들을 뒤로 밀어버렸다. 공격을 계속하기 위해 리디아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도보로 싸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궁병의 집중 사격으로 인해 대열을 갖추기 몹시 어려웠고, 창은 기병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병이 쓰기엔 너무 무겁고 길어 사용자를 쉽게 지치게 하였다. 페르시아 우익의 병사들이 그들을 들이받아 그들의 전열을 뚫고 그들을 부숴뜨렸을 때 그들은 여전히 진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페르시아 오른쪽에서 키루스는 근위대와 함께 리디아 본대의 측면과 후방으로 가서 그들을 포위했다. 크로이소스는 대열을 회전시켜 포위를 차단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그 결과로 리디아 군대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한편, 중앙에서 이집트 중보병들이 페르시아 보병대를 밀어낸다. 페르시아의 불멸자 군단은 이집트 중보병 대열을 돌파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격을 당해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페르시아 중앙 전선이 무너지자 이집트 중보병들은 그들을 추격해왔는데, 페르시아의 공성탑에서 추격해 온 이집트 중보병을 향해 불과 화살을 퍼부어서 잠깐 동안 이집트 중앙군을 밀어냈다.

키루스는 자신의 기병과 공성탑을 불러모았다. 키루스는 패퇴하는 리디아 기병을 추격하는 대신 이집트 군을 정리하기 위해 그들의 측면과 후방으로 기동했다. 자신들이 포위된 것을 본 이집트군은 대열을 바꿔 방어 진영을 형성했다. 키루스의 불멸자들은 이집트군의 대열을 돌파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이러한 공방은 최소 며칠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수 차례 치열한 전투에도 페르시아 군은 이집트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이집트 군도 페르시아의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이집트 군대는 리디아 본대가 패퇴한 상황에서 포위를 뚫고 퇴각하기를 원했고, 키루스는 만만찮은 이집트 군대를 상대하느라 시간과 병력을 소모하기 보다는 도망치는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군을 추격하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의 요구조건을 교환하기 위해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페르시아는 이집트군이 완전 무장 상태로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여는 대신, 이집트군은 리디아 왕국을 위해 싸우지 않고 페르시아와 리디아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양측 모두가 수용할만한 거래였고, 이집트인들은 전선에서 이탈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양측의 피해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페르시아군은 곧장 사디스로 진군해 공성전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숫자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키루수는 사디스의 성벽을 겹으로 포위하고 총공세를 펼친다. 크로이소스는 소수의 패잔병과 함께 사디스를 지키려고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고, 14일을 버틴 후 페르시아 군대에게 생포당한다. 크로이소스의 아내는 사디스가 무너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로이소스는 사슬이 묶인체로 키루스 앞으로 끌려갔다. 크로이소스가 생포당하면서 리디아 왕국은 페르시아의 부속 왕국으로 편입된다.


2.4.4. 키루스 대제의 조언자[편집]


파일:3169183.jpg
크로이소스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된 도자기
키루스는 크로이소스를 리디아의 젊은 귀족들 14명과 함께 산채로 화형시키라고 명령한다. 크로이소스는 이 화형에서 살아남는데, 이 부분에 대한 기록 문헌과 헤로도토스의 서술이 각각 다르다. 기록 문헌에는 키루스가 화형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나와있고,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는 아폴로가 소나기를 내려 불타는 장작을 꺼버렸다고 나와있다. 어쨌든 불이 꺼지자, 크로이소스는 눈물을 흘리며 "오 솔론! 솔론! 솔론!" 이라고 외친다. 키루스 대제는 그 소리를 듣고 크로이소스에게 솔론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크로이소스는 불확실한 미래와 인생의 흥망성쇠에 대한 솔론의 교훈을 키루스에게 들려준다. 키루스는 솔론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고 크로이소스에 대한 화형 선고를 취소하고 리디아 속주 왕국의 왕으로 복위시킨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를 신뢰했으며,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크로이소스가 키루스에게 해준 가장 유명한 조언은 국가에서 규격화된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키루스가 페르시아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규격화된 금&은 주화를 발행하자 페르시아 전역에서 상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키루스의 주화는 다리우스 대왕이 금화를 페르시아 다릭으로 교체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키루스 시대에 사용된 크로아이드 동전들은 이전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국에서 발행하던 동전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게가 초기 황금 다릭과 은색 시글로이의 것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달랐다.

크로이소스의 죽음은 확실하지 않다. 역사가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크로이소스를 자신의 조언자로 유지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역사가 크테시아스는 키루스가 메디아의 바레네 시의 총독으로 크로이소스를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자 바킬리데스는 제우스가 크로이소스를 하이포레아로 데려갔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시인 바킬리데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는 크로이소스가 벽난로에서 자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위 사람들은 모두 크로이소스와 키루스가 죽은지 수백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가장 확실한 기록문헌은 나보니두스 연대기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는 키루스 대제가 'LU'라는 국가를 상대로 행군해서, 왕을 죽이고, 그의 소유물을 강탈하고, 페르시아의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나와있다. 여기서 'LU'는 리디아아카드어 이름의 첫 음절로 추정된다. 만약 이 추정이 맞다면 키루스가 리디아를 정복한 직후 크로이소스를 죽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추측이 맞다고 해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죽이는 것"과 "군사력으로서 파괴하는 것"의 의미로 모두 사용될 수 있어서 크로이소스의 운명을 정확하게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5. 철학자 솔론과의 일화[편집]


아테네솔론은 그의 지혜로 유명했다. 솔론은 효과적인 새로운 법률로 그의 도시를 바로잡은 후, 세상에 대해 알기 위한 10년 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 중에 솔론은 고대 리디아의 가장 부유한 왕인 크로이소스의 궁정에 도착했다. 솔론을 귀빈으로 맞이한 크로이소스는 모든 보물과 풍요로움과 함께 궁전 주변을 안내받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의 이방인이여, 우리는 지식을 사랑하고, 진실을 보고 싶기를 소망하며, 많은 땅을 보고 경험한 당신의 지혜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난 모든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까?"

물론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이 막강한 힘과 마르지 않는 재산을 소유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즉시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솔론은 아테네의 텔루스라는 사람이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누구? 도대체 아테네의 텔루스는 누구입니까? 왜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솔론은 "그는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고 죽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텔루스에게는 아름답고 착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자르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았고, 이 아이들은 모두 훌륭히 성장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최후는 매우 영광스러웠습니다. 아테나와 엘레우시스 근처의 이웃들 사이의 전투에서, 그는 그의 친구들을 보호하던 중 죽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최고의 예우로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작에 죽은 사람입니다."라고 크로이소스가 말하고 되물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만난 사람 중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솔론은 천천히 대답했다.

"아르고스의 클레오비스와 비톤이 두번째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클레오비스와 비톤? 그들은 또 누구입니까?"

"헤라의 사제의 건장한 두 아들입니다. 그들은 튼튼한 몸으로여러 게임에서 상을 탔습니다. 어느날, 그들의 어머니가 사원에 가야하는데 마차를 끌던 황소가 들판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소 대신 그들이 직접 마차를 힘으로 끌고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그 사원의 사람들은 이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사제는 여신에게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부탁했고, 여신은 클레오비스와 비톤에게 최고의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최고의 축복은 바로 두 젊은이가 성전에서 잠이 든 후에 깨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잠자는 꿈을 꾸면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다. 여신이 그들을 데려간 것입니다.모두가 이 잠자는듯한 죽음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조각상으로 만들어졌고, 아직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화가 나서 외쳤다. "그들도 죽은 자들입니다! 나의 행운과 행복은 어떻습니까? 확실히 나의 행운과 행복은 이 평범한 인간들을 훨씬 능가하지 않습니까?"

"크로이소스 폐하, 당신은 나에게 행복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나는 70년은 장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26,250일 중, 어떤 날도 같은 날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완전한 우연의 연속입니다. 행운과 불행은 항상 뒤섞여 있습니다. 고요던 날씨가 회오리바람으로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여정에는 무한한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신들은 질투심이 많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행복을 언뜻 보고는 파멸에 빠집니다. 당신은 운이 좋고, 놀라울 정도로 부유하고, 많은 사람들의 군주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좋은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나쁜 일도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는겁니까!"

크로이소스는 깜짝 놀랐으나, 솔론에게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은 인생은 흥망성쇠가 있다는 솔론의 가르침은 크로이소스가 장작 위에서 화형을 기다리는 순간에 그를 깨닫게했다. 키루스는 이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키루스 대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크로이소스를 석방하고 그를 리디아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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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좌의 게임 라니스터 가문을 묘사할때 쓰는 Rich as Lanister 문구가 이 문장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2] 알뤼아테스(크로이소소의 아버지)가 최초 동전 개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알뤼아테스는 약 10g 정도로 나뉘어진 은 덩어리로 거래를 하게 해서 시장에서 유동적인 거래가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알뤼아테스의 동전은 순수 은이었고, 정형화 된 금속이 아니었고, 만든 곳을 인증하는 특정한 문양이 없었기 때문에 주화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3]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합금으로, 주로 모래에서 추출 할 수 있다[4]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에 정착한 그리스인들[5]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집필한 역사서를 통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에게 침략을 받은 원인이 크로이소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원래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수천 키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방 왕국이었는데, 크로이소스가 능력에 비해 야심이 넘쳐서 무리하게 동방원정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페르시아에게 병합되었고, 이 때문에 부유한 리디아를 흡수하고 강성해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대대적으로 침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크로이소스 아버지의 업적인 아나톨리아 정복을 크로이소스의 업적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보인다.[6] 또한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국이 이미 헤로도토스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멸망한 나라라는 점도 역사 왜곡에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리디아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 없었고, 구전동화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형태로만 이어져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크로이소스가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사시를 부르는 음유시인들에게서 크로이소스의 역사를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7] 아내의 오빠